‘김용균들’을 위하여
  • 사진 이명익·글 은유(작가)
  • 호수 641
  • 승인 2019.12.30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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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김미숙씨는 아들 용균을 보내고 삶이 “손바닥 뒤집듯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라고 말했다. 어느새 아들 없는 두 번째 겨울이다.
ⓒ시사IN 이명익김미숙씨의 ‘동지’는 노동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다른 유가족들이다. 12월8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고 김용균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꿈을 꿨어요. 우리 아들이 나왔어. 애 아빠한테 우리 용균이 어딨어? 집에 없는 거야. 용균이 데리고 와! 울면서 떼를 썼거든요. 애 아빠가 다른 집에 있다면서 데리고 왔어요. 네 살짜리 아이만 한 용균이가 왔어요. 차에 태웠는데 뭐가 가려져서 잘 안 보이는 거예요. 그걸 치우니까 우리 아들이 웅크리고 있어요. 그래서 깼어요.”

김미숙은 이틀 연속 꿈에서 아들을 보았다. 전날은 용균이 얼굴은 없이 목소리만 들렸다. 원래 꿈을 잘 꾸지 않는데 아들 기일이 다가와서 그런가 싶다. 어느새 아들 없는 두 번째 겨울이다.

김용균은 2018년 12월11일, 태안화력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몸이 분리된 채 발견됐다. 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져준 이 산재 사망 사건은 한편으론 이런 의미였다. 김미숙은 용균이를 만질 수 있는 용균이 엄마에서 용균이를 만질 수 없는 용균이 엄마가 됐다. 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는 “짐승처럼 악을 쓰면서” 울었다. 누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한 청년의 생을 무자비하게 끊어내고, 한 엄마의 생을 뒤집어버린 이 참혹의 근간을 밝혀내기 위해 지난 1년 동안 김미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던 집도, 하던 일도, 만나는 이도, 쓰던 말도,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믿음도.

지난 6월 김미숙은 용균이를 낳고 길렀던 구미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특조위)’ 활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감시하기 위해서다. 용균이 방을 마련했다. 용균이가 쓰던 행거에 아이가 입던 교복, 양복, 즐겨 입던 후드티셔츠 같은 옷가지를 걸어놓았다.

유품 상자도 그대로 옮겼다. 물건 하나하나마다 사연이 많다. 폼클렌징과 수분크림은 용균이가 매일 쓰던 것이다. 아이는 얼굴에 여드름이 잘 나는 편이었다. 얼굴은 자기도 잘 안 만지고 엄마도 손을 못 대게 했다. “그래서 맨날 손등으로 만졌다.” 스킨도 한 가지 브랜드만 썼다. “집에 있을 땐 지 꺼 아깝다고 내 꺼 쓰는데, 같이 바르니까 좋았다.” 뭐든지 세트로 했다. 똑같은 우산을 세 개 사서 엄마·아빠·용균이, 셋이 나눠 들었다.

ⓒ시사IN 이명익고 김용균씨가 작업지시 사항을 적어놓은 수첩은 석탄 때로 까맣게 얼룩져 있었다. 그의 메모 습관은 어머니 김미숙씨에게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샤워타월도 같은 제품을 두 개 사서 하나는 용균이에게 주었다. 원래는 흰색 바탕에 잔무늬 모양이었는데 유품으로 돌아온 그것은 거무스름했다. 아무리 빨아도 색이 빠지지 않았다. 일한 지 3개월 만에 샤워타월 색이 변할 정도로 탄가루 먼지가 심한 데서 아들이 일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져서 “둘이서 을매나 울었는지(용균이 아버지)” 모른다. 용균이가 일할 때 쓰던 수첩도 하얀 지면이 거무스름하다. 회사가 지급한 소형 렌턴은 금방 고장나버렸고, 그것을 대체하느라 조명으로 쓰던 스마트폰에도 석탄가루가 꽉 차 있었다. 이 검게 변색된 유품들은 아들을 삼켜버린 암흑과 야만의 노동 현실을 그대로 증거했다.

“용균이랑 영상통화를 많이 했어요. 주변이 완전 새까맣고 뭔가 반짝반짝 일어나는데 그게 탄가루인지 몰랐어요. 특조위에서 조사하러 갔을 때 공장을 가동한 상태에서 갔는데 이 사람들이 다칠까 봐 몸을 웅크리고 다녔대요. 위험한 게 말로라도 설명이 됐더라면…. 분진이 그렇게 날리는데, 위험한 것도 있지만 되게 더럽잖아요. 그런 곳에 자기 자식 집어넣을 사람이 어딨어요. 나도 하기 싫은 일을 어떻게 자식을 하게 만들어요. 내가 용균이 회사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그 속이 환경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더라면 발 빼게 하지 않았을까….”

취업 후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용균이는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집에 왔다. 그새 아들의 얼굴은 살이 쏙 빠져 있었다. 회사가 힘들지 않은지 물었더니 힘들다고 했다. 그럼 나오라고 했다. 아들은 “엄마, 조금 더 해볼게요”라고 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첫 회사니까 저도 더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알아주는 공기업인데 그 정도로 위험할 줄 몰랐으니까, 엄마는 좀 더 다녀봐도 된다고 생각했다.

“좀 안쓰럽긴 했죠. 근데 사실, 자식 사회생활 보내놓고 안 안쓰러운 사람이 어딨어요. 원래 일 배우는 건 어렵잖아요. 직장 생활이 얼마나 어려움이 있는지 저도 겪어봤으니까 잘 알잖아요.”

ⓒ시사IN 이명익고 김용균씨는 회사가 지급한 소형 랜턴이 고장 나 스마트폰 불빛에 의지해 일했다.
ⓒ시사IN 이명익김미숙씨는 아들 용균이 작업 당시 착용했던 귀마개 역시 유품으로 보관해두었다.
ⓒ시사IN 이명익고 김용균씨의 개인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던 간식과 컵라면, 수저와 칫솔.

‘엄마’를 가장 닮고 싶어 했던 아들

김미숙은 충북 영동에서 육 남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농사를 짓는 부모와 조부모까지 대식구가 살았다. 3대가 시골에서 산다는 게 녹록지 않았다. 돈 나올 구멍은 없고 빚이 늘어갔다. 바로 위에 언니가 5학년 때 부산에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가서 살게 됐다. 자연스럽게 미숙이 집안의 맏이 역할을 했다. “책임감도 느껴지고 아버지 어머니한테 잘해드리고 싶고 속을 안 썩여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쌓였다.”

언니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극구 말리는 상황을 본 미숙은 아예 대학이란 말도 꺼내지 않았다.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시골 삶이라는 게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이었다. 고달픔이 다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원망이 들겠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미에 있는 섬유회사에 바로 취직했다.

그땐 비정규직이 없었다. 잔업수당 계산이 틀린 걸 얘기하면 정확히 챙겨주는 나름 괜찮은 사장 밑에서 10년을 일했다. 섬유업종의 특성상 일하다가 죽는 사람도 못 봤다. 일한 만큼 벌었고, 그 돈을 착실히 모았다. 기숙사에서 쓸 비누나 샴푸를 제일 싼 것으로 사두고 용돈은 한 달에 5000원, 두 번 외출하는데 한 번에 2500원이면 족했다. 여름엔 친구들이 매점에서 하드를 사먹는데 그조차 참았다. 최소한의 생활비만 제하고 남은 돈은 몽땅 집에 보냈다. 보너스는 열어보지도 않고 다 드렸다. 그렇게 3년간 집안의 빚을 갚아드렸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집에 갔어요. 그날 무지개가 떠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곁에 계셔가지고, 아버지 저기 봐봐 무지개 정말 예쁘다. 보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이리 와봐, 하면서 손 내밀어보래요. 손 내밀었더니 갑자기 제 손에 뽀뽀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 무지개 되게 예쁘지?’ ‘네’ 이랬더니 ‘저 무지개보다 더 예쁜 게 있어.’ ‘뭔데?’ 그랬더니 ‘우리 미숙이 속마음’ 이러셨지요.”

남편과는 사내 커플이다. 동료로 일하면서 티격태격 소소한 신경전을 벌이다가 정이 들었다. 저 사람이랑 살면 괜찮겠다 싶은 마음이 서로 있었지만 말은 안 하는 상태에서 그녀가 다른 회사로 가게 됐을 때 그가 고백했다. 1994년 12월6일 용균이가 태어났다. 스물여섯 김미숙은 엄마가 되었다. 출산 후 집에 있으니까 우울증이 올 것 같았는데 다시 “나가서 일하니까 살 것 같았다”. 용균이 초등학교 때 시댁 쪽에서 농사를 지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김미숙은 출퇴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이왕이면 수당이 높은 주야 근무로 했다.

8년 전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는 생계를 전담했다. “남자만 가장 역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남자가 아프면 여자도 가장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는 전자부품 검사하는 일을 했다.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만 반복하지 않고 항상 전체 업무 흐름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대충 넘기지 않는 꼼꼼함으로 다른 파트의 전산 오류를 잡아내기도 했고, 새로운 업무에 처음 투입됐을 때도 집중력을 발휘해 불량률을 현저히 낮췄다. 매년 우수 직원을 뽑을 때 상사들이 김미숙을 꼽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가정을 지키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가정도 못 지키고…. (한숨) 애도 철이 일찍 들었죠. 엄마 아빠 고생하는 걸 어려서부터 봤잖아요. 저하고 약간 심성이 비슷해요. 저는 애한테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다 얘기해줬어요. 회사에 가서 일을 배우는데 잘 못 알아들으면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기도 힘들잖아요. 제가 정말 눈썰미가 없거든요. 업무를 익히기가 어려워서 꼭 메모를 했어요. 용균이도 저 닮았어요. 그래서 애한테도 새로 배울 땐 무조건 쓰라고 했죠. 군대 가면서부터 메모를 했고, 사회생활 시작하면서도 메모 습관을 길들이게 했어요. 저는 메모가 참 좋다고 생각해요.”

유품이 된 용균이의 때 묻은 수첩은 엄마가 물려준 유산이었다. 요령 부리는 법 없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것으로 삶에 헌신한 김미숙이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귀한 것이자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엄마를 용균이는 자랑스러워했다. 한번은 명절에 고모가 용균이에게 넌 닮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엄마!”라고 대답했다. “울 엄마는 일도 너무 잘하고 자식한테도 끔찍하게 잘해주니까 저절로 그렇게 생각이 된다”라고 한 것이다. 용균이 고등학생 때 일이다.

“모든 생활의 중심이 용균이였어요. 초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제가 데리고 받아쓰기부터 가르쳤어요. 알림장 보고 예습을 시켜서 보냈어요. 학원 다니면서 선행학습 한 애들이랑 다르다고 담임선생님도 칭찬하셨죠. 애 아빠랑 저랑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용균이가 중간에 끼어들어요. 그럼 뽀뽀를 하는 게 우리는 일상이에요. 어릴 때부터 커서까지 쭉 그랬어요. 애가 잔병치레도 많았는데 자라면서 괜찮아졌거든요. 용균이한테 그랬죠.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돼, 어렸을 때처럼 아프지만 않고 우리 곁에 오래 있으면 우리는 그걸로 만족해.”

김미숙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반짝인다. “아들 얘기 하니까 기분이 좋아서”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간다. 아들을 손으로 만질 순 없지만 말로는 어루만질 수 있다. 아들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아들 이야기를 하는 동안엔 행복한 용균이 엄마로 돌아간다. “가슴에 식지 않는 불덩이”를 잠시라도 식힐 수 있다.

ⓒ시사IN 이명익아들 이야기를 할 때면 김미숙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김미숙씨가 아들 용균이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당시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쓴 글들

‘저는 신에게 빌고 싶습니다. 우리 아들과 같이 올바르게 성장한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 이윤 앞에 목숨이 하찮게 버려짐을 안타까워하며, 그렇게 구조를 만든 인간 같지 않은 사람들이 강한 천벌을 받게 해달라고 빌고 싶습니다. 저를 지켜주는 신이 있다면 나라에 의해 처참하게 자식을 잃어 힘든 세상을 사는 어미의 심정을 헤아려, 약육강식을 만들어놓은 사업주와 정부를 강한 처벌로 혼내주었으면 합니다(12월2일 김미숙이 쓴 글).’

김미숙은 아들을 보내고 삶이 “손바닥 뒤집듯이 완전 바뀌어버렸다”. 언론사 카메라 앞에도, 광장에도 섰다. 수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대통령을 만났다. 토론회에서, 추모제에서, 문화제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발언을 하고 글을 썼다. 이처럼 맹렬한 활동의 계기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김미숙은 답했다. “집에 있으면 아들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으니까 사회운동을 하러 나간다”라고.

“전에는 접해보지도 않았고 상상도 안 해봤던 일들이에요.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정신없이 했던 일이고 지금은 업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런 활동들이 쉽지는 않아요. 제가 충청도에서 살다가 구미로 갔잖아요. 처음에는 사람들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사투리가 심해서요. 꼭 그런 기분이었어요. 애 사고가 나고 대책위가 꾸려져서 회의를 하는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어요. 한 열흘쯤 지나니까 귀에 들어와요. 이젠 동지라는 말이 참 좋아요. 뜻을 같이한다는 거잖아요.”

김미숙의 동지는 노동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다른 유가족들이다. 처음엔 저 사람들이 왜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가 미심쩍기도 했다. 그런데 같이 어울릴수록, 알아갈수록 진국이었다.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해 오래전부터 꾸준히 일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는 크게 놀라고 감동했다. 지금은 존경하고 의지한다. 유가족에겐 어디서도 얻기 어려운 위로를 받는다.

“가족들은 혈연관계라서 당연히 의지가 되는데 자식 잃은 깊은 힘든 심정은 잘 몰라요. 근데 유가족들은 알잖아요. 이런 사고 안 겪은 가족들은 맨날 좋은 거 얘기하고 자기들 삶 얘기하지만 우리는 좀 동떨어져 있죠. 말하고 싶은 게 달라요. 그러니까 말도 좀 덜하게 되고 내가 말하면 좀 어두워지고 그러니까 꺼려지고. 유가족들 만나면 같은 상황이니까 눈치 안 보고 얘기해요.”

김미숙은 늘 그랬다. “배울 때는 정말 어렵게 배우는데 한번 배웠다 하면 끈기 있게 한다.” 요즘 그의 중요한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글쓰기도 그렇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낭독하는 모든 글은 김미숙이 직접 쓴다. 아들을 보내고 아픔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때, 하루에 두세 시간 눈 붙이고 나면 밤이 무척 길었다. 울다가 끙끙대다가 고통을 잊고자 조금씩 쓰기 시작한 글들을 광화문에서 읽었다. 정부, 여당, 유가족, 합의 이행, 권고안, 고용불안, 비정규직, 원하청 등등 용균이랑 살 때는 입에 올릴 일이 거의 없던 낯선 말들도 쓴다. 뉴스에서나 보던 저 단어들만이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설명해주기에 자꾸 사용하다 보니 일상어가 되었다. 정치가 김미숙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시사IN 이명익12월10일 충남 태안군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열린 고 김용균 1주기 추모식에서 동료들이 고인의 책상에 헌화하기 위해 국화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

“저도 가장으로서 내 할 일은, 열심히 돈 벌어서 우리 가족 잘 보살피고 앞길 잘 닦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그때는 그게 너무 당연했죠. 내가 정치를 외면했고 사람들이 이렇게 죽고 있다는 걸 모르고 살 수밖에 없었어요. 만약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뭔가를 하지 않았을까요. 대부분 사람들도 자기는 그런 일이 안 닥칠 거라고 생각하니까 외면하겠죠. 수명도 길어졌잖아요. 정규직으로 일하다가 비정규직이 되는 경우도 있고요. 우리 사회에서는 일하다가 죽는 사람이 정말 많고 그게 언젠가는 내가 될 수도 있어요.”

‘소 잃어본 사람이 외양간 고치지 소가 멀쩡히 있는 사람은 모르더라’는 세월호 유가족의 말대로, 잘 몰랐다가 잘 알게 된 김미숙은 연장을 들었다. 지난 10월 김용균 재단을 세웠다. 작은 아이 하나를 기리기 위한 단체가 아니라 일하다가 죽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연대 조직을 꾸리려는 큰 그림을 그렸다.

“특조위 권고안이 22개가 나왔는데 하나도 이행되지 않고 있어요. 이행되려면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반대를 정말 심하게 할 거고 그러면 뭉칠 수 있는 게 국민밖에 없어요. 국민을 엮으려면 큰 조직이 있어야 되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제 주변에 많은 단체, 유가족들, 불의를 막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 같이 뭉쳐 조직을 만들어서 악법 만드는 것도 반대하고, 또 이렇게 뭉치는 것만 해도 저들에게 큰 위협이 되잖아요. 촛불 때처럼 모여야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미숙은 김용균 1주기 추모행사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너를 비록 살릴 순 없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처럼 삶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 싶다”고, 그래서 “엄마는 이제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길을 위해 걸어갈 것”임을 다짐했다. 이는 “저는 제 삶을 허투루 산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한 사람의 선언이다. 아버지를 감화시켰고 아들이 자랑스러워하던 “무지개보다 더 예쁜 미숙이 속마음”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김용균들’을 구하는 세상의 빛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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