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반란 피해자는 아직도 고통받는다
  • 정희상 기자
  • 호수 640
  • 승인 2020.01.20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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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해 예비역 중령은 12·12 반란군으로부터 총격을 받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당시 가명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탓에 국방부와 보훈처는 그의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시사IN 조남진김광해 예비역 중령은 “전두환 반란 세력을 응징하고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트라우마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광해 예비역 중령은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반란군 진압 진영이던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전속부관(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는 그날 밤 육군본부를 기습한 반란군(1공수여단)한테 총격을 받고 머리와 얼굴, 복부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김씨는 현재 서울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7시 김광해 중령은 퇴근했다가 ‘총장 유고’ 소식을 듣고 육군본부(육본)로 달려갔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최규하 대통령이 승인을 거부해서 아직 성공하지 못한 상태라는 보고를 본부 연락장교로부터 받았다.” 육본 벙커에는 윤성민 참모차장과 문홍구 합참작전본부장, 하소곤 작전참모부장, 김진기 헌병감, 안종훈 군수참모부장, 천주원 인사참모부장 등 10여 명이 모여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육군의 병력 출동과 이동명령 권한은 하소곤 작전참모부장에게 있었다. 하 작전참모부장은 육본 벙커에서 반란군을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시로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과 통화하며 진압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하지만 진압 주력 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와 특전사령부 주요 장교들이 이미 전두환씨를 정점으로 한 사조직 ‘하나회’ 소속이었다.

자정 무렵 육본 벙커에 머물던 장군들은 서울 필동 수도경비사령관실로 이동했다. 이들이 벙커를 떠난 직후 국방부와 육본 정문에서 콩 볶는 듯한 총성이 울렸다. 반란에 가담한 박희도 1공수여단장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국방부 장관과 육본 참모 장성들을 체포하기 위해 기습했다. “장성들이 필동으로 가면서 나에게 육본을 사수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병력이라야 장군 보좌관과 병사 40여 명밖에 없었지만 모두 소집해 경계를 강화토록 했다. 자정 무렵 1공수여단이 무차별 난사하며 군용 차량 40여 대로 돌진해 들어왔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순간 총알이 쏟아졌다.”

김 중령은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국방부와 육본을 무력으로 제압한 1공수여단 병력은 모든 방을 샅샅이 뒤졌다. 반란 진압군 측 장성들과 사라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날 새벽 반란군은 국방부 건물의 한 방에 숨어 있던 노 국방부 장관을 찾아내 서울 삼청동에 있던 최규하 대통령 앞으로 끌고 갔다. 쿠데타 사후 재가(정승화 총장 연행 승인)를 얻어내기 위한 압박 순서였다. 이로써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12·12 쿠데타는 형식적으로 완벽히 마무리됐다.

총상을 입은 김광해 중령은 육본 당번병에게 업혀 삼각지 근처 한 민가로 옮겨졌다. “병원으로 데려가면 반란군에 발각돼 죽을 것이라고 여겨 민가 문을 두드려 응급조치를 부탁했다고 하더라. 의식이 돌아온 뒤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 근처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는 군복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환자의 입원을 내켜하지 않았다. 김 중령은 신원 확인을 거부했다. “내가 모시던 하소곤 작전참모부장이 반란군 총격을 받고 생사 불명 상태라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발견되면 즉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들이 출근해 대책회의를 연 뒤에야 어렵게 가명으로 입원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며칠 후 병원 치료를 마친 김 중령은 육군본부로 나갔다.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 세력은 그의 보직을 박탈한 뒤 무기한 대기 발령을 내렸다. 알아서 나가라는 사인이었다. 김 중령은 부상당한 몸으로 하소곤 장군을 병간호하며 수모를 견뎠다. 12·12 쿠데타 당시 하소곤 작전참모부장도 총상을 입었다. 총알은 심장 아래를 관통했다. 하 작전참모부장은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보직이 없던 김 중령은 틈틈이 병원으로 가서 하 장군을 간병했다. “나중에 1공수여단 소속 장교가 내게 12·12 쿠데타 관련 비밀문서 하나를 몰래 넘겨줬다.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사전에 제압할 사람을 다 정했더라. 하소곤 작전참모부장,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체포하고 저항하면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 내용이 담겨 있었다.”

보직이 없던 그는 담당 사병으로부터 전역장 하나 달랑 받고 20여 년 봉직해온 군을 떠났다. 이후 구멍가게와 공사장 인부 등 안 해본 일이 없이 전두환 정권 시기를 버텼다.

그 와중에도 전두환·노태우 등 군사 반란 주모자들을 단죄하는 일을 필생의 업으로 삼고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두환 독재체제가 균열 조짐을 보이자 그는 정승화 전 참모총장을 찾아갔다. 이후 10년간 정승화 전 참모총장 비서로서 12·12 쿠데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을 벌였다.

1993년 군사반란 세력 고소

김씨는 1993년 5월19일 전두환·노태우씨를 내란죄, 살인죄 혐의 등으로 형사 고소했다. “1993년 초 김영삼 신임 대통령이 정승화 총장을 불러 칼국수 만찬을 할 때 내가 모시고 들어갔다. 김 대통령이 ‘국민들이 왜 12·12 쿠데타 조사를 안 하느냐고 아우성인데’라고 하더라. 그때 고소를 결심했다.” 김씨 고소 이후 쿠데타 세력은 협박으로 대응했다. “처음에는 30억원을 줄 테니 소송을 취하해달라고 회유하더라. 안 된다고 버텼더니 가족을 언급하며 협박도 했다.”

2개월 뒤인 1993년 7월19일 정승화·장태완·하소곤씨 등 장성 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군사반란 세력을 고소했다. 정식 고소인 모임 이름은 ‘12·12군사반란진상규명위원회’였다. 내부적으로는 일목회라 불렀다. 김광해씨가 간사를 맡았다. 전두환 반란 세력 측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정보 수집과 검찰 조사계획 등을 입수하여 최대한 진실 조사가 이뤄지도록 돕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1부(장윤석 부장검사)가 조사를 맡았다. 검찰 수사를 돕기 위해 자료도 100건 이상 제출했다. 1995년 7월 당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1995년 12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앞서 그해 10월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하면서 전두환·노태우씨 등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었다. 특별법 제정 이후 12·12 쿠데타까지 포함한 검찰의 전방위 수사가 이어졌다. 검찰은 1996년 1월 전두환·노태우 등을 내란죄 및 반란죄 혐의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1997년 4월 12·12 쿠데타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하고 전두환에게는 무기징역을, 노태우에게는 징역 17년 형을 선고했다. 반란 세력의 단죄가 이뤄지는 사이 김광해씨는 12·12 쿠데타 총상 후유증 등이 겹쳐 뇌경색이 발병했다. 그는 왼쪽 손발을 쓰지 못한다.

김씨는 아직도 할 말이 많다. “12·12 쿠데타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났으면 국회가 피해자 명예회복이나 피해보상을 하는 입법을 즉각 발의했어야 한다.” 김씨가 파악하기로는 12·12 쿠데타로 강제 예편당한 장성이 꽤 된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국방부와 보훈처는 아직까지 이들의 피해에 대해 정식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보훈처는 12·12 쿠데타 그날 밤 내 입원 확인서를 갖고 오라는데 그런 게 어디 있겠나. 당시 가명으로 입원했는데. 그 경위와 목격자, 병원 관계자 진술을 자세히 써서 냈는데도 피해자로 인정을 안 해주더라. 그나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해준 게 명예요 혜택이라면 혜택이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두환 반란 세력을 확실하게 응징하고 지금이라도 군사반란 피해자들을 정식으로 구제해야 한다. 이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지 않으면 반란이 또다시 일어나더라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교훈을 줄 테고, 반란을 막기 위해서 나설 사람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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