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pedia‘식료품의 왕’이라고 불린 포르투갈 국왕마누엘 1세.

1498년 11월, 바스쿠 다가마는 인도를 떠났다. 인도 서해안 무역도시 캘리컷의 군주 자모린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속에서 몇 달을 보낸 뒤였다. 자모린은 백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향신료를 구입해 돌아갈 수 있도록 관대함을 베풀었다. 향신료의 품질이 최상급은 아니었다. 포르투갈인에게는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들이 지난 세기 동안 찾아 헤맨, 약속의 땅에 다녀온 것을 입증하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이 인도 원정대가 돌아온 뒤 1500년 3월, 32세의 젊은 사령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지휘하는 13척 규모의 함대가 포르투갈을 떠났다. 선원 1000여 명은 명확한 목적지와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식민지 건설이었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나오는 동안 풍랑으로 배 4척을 잃었지만, 포르투갈 함대의 대부분은 캘리컷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다가마의 말이 엄포가 아니었음을 캘리컷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시사IN〉 제637호 ‘15세기 탐험가의 인도 가는 길’ 기사 참조).

향신료는 유럽 항해자들의 ‘성배’

카브랄은 캘리컷에 거주하는 모든 이슬람 상인들의 추방을 요구했다. 출항 준비가 끝나가던 이슬람의 대형 상선을 공격해 물건을 빼앗고 배를 부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포르투갈 선원들이 캘리컷 당국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카브랄은 캘리컷 시내에 포격을 퍼부었다. 군주 자모린은 피난을 떠났고, 상업에 종사해온 아랍계 거주민들은 교수형 또는 화형에 처해졌다. 항구를 가득 메웠던 그들의 상선들은 숯덩이가 되어 바다에 가라앉았다.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캘리컷을 근거지로 확보한 포르투갈 함대는 인근의 항구도시들을 차례로 굴복시켰다. 포르투갈은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했다. ‘포르투갈령 인도제국’이다. 인도 서해안에 모이는 향신료를 독점적으로 구매해 본국으로 안전하게 수송하는 게 목표였다. ‘후추제국’이라는 명칭과, 당시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를 가리키던 ‘식료품의 왕’이라는 칭호에는 향신료에 그토록 매달리는 포르투갈인에 대한 질투와 조롱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이슬람계 상인들의 향신료를 취급해 이익을 얻던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계 해양국가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나 지금의 이스라엘, 시리아나 레바논에 해당하는 레반트 지역의 항구도시에 향신료 무역선을 보내도 빈 배로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다.

포르투갈은 나아가 당시 가장 고가로 거래되던 정향(Clove)과 육두구(Nutmeg)의 원산지를 차지하기 위한 탐험대를 인도보다 훨씬 동쪽으로 파견한다. 이들 향신료는 같은 무게의 황금과 맞먹는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유럽의 항해자들이 목숨을 걸었던 성배나 다름없는 향신료였다.

지금은 대형마트에서 4900원에 한 병을 살 수 있는 한 줌의 정향. 뚜껑을 열면 풍겨 나오는 맵싸하고도 상쾌한 향기는 3000년 전부터 인류를 매혹시켜왔다. 그 향기를 좇아, 유럽은 본격적으로 아시아의 바다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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