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방글라데시 출신 아사드 씨(왼쪽) 가족. 딸 사미아(가운데)와 아내 모두 미등록 상태다.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이 선정한 ‘올해의 이주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은 당사자인 이주민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누군가는 판결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얻었지만 또 누구는 판결에 걸려 주저앉았다. 이주인권 신장에 긍정적 역할을 한 ‘디딤돌 판결’과 부정적 영향을 끼친 ‘걸림돌 판결’의 구체적 사례를 소개한다. 이주민이라는 정체성이 각각의 인생에 남긴 상흔도 함께 돌아본다.

■ 걸림돌 판결

“거기엔 한국 학교가 없거든요.”

사미아(11·가명)의 오른쪽 손목에 채워진 노란색 실리콘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팔찌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해요.’ 두 달 전 학교에서 현장학습으로 갔던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받은 기념품이었다. 시선을 의식한 사미아는 “일본의 사과를 받고 싶어서…”라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 아동이다.

사미아는 일곱 살 때 한국에 왔다. 지난 4년5개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국적은 방글라데시이지만 한국어로 소통하는 게 더 편하다. 2015년 한국에 온 후 초등학교에 다니며 정규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편한 언어를 묻자 “한국어가 첫 번째, 영어가 두 번째, 방글라데시어가 세 번째”라고 답했다. 한국어가 능숙해 부모와 변호사 사이의 통역도 톡톡히 해낸다.

사미아는 현재 체류 비자가 없는 미등록 이주 아동이다. 여권에는 출국 유예 도장이 찍혀 있다. 이 유예기간의 만료일은 2019년 4월27일이었다.

2015년 사미아의 부모는 본국에서 겪은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 신청을 했지만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는 불인정 결정을 내렸다. 방글라데시의 야당 국민당(BNP) 당원인 아버지 아사드 씨(42·가명)는 정부 여당인 아와미 연맹의 표적이 되어 살해 협박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와미 연맹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위협을 가했다. 내가 정부에 반대하는 BNP 활동에 꽤 열성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이다.” 2016년 9월 아사드 씨는 난민 불인정 결정에 대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가 있다고 보기 부족하다”라며 청구를 기각했다. 아사드 씨는 상소를 거듭했지만 대법원에서도 기각당했다.

난민 신청자에게 주어진 기타(G-1) 비자는 2017년 8월15일자로 만료되었다. 아사드 씨의 행정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가족은 1~3개월마다 한 번씩 출국 기한을 유예받았다. 올해부터는 유예 처분마저도 끝났다. 아사드 씨는 출입국 당국으로부터 2019년 12월10일까지 한국을 떠나라는 출국명령을 받았다. 현재 법적으로 미등록 상태인 아사드 씨 가족은 난민 신청을 다시 할 계획이다.

사미아 같은 미등록 이주 아동의 수는 전국에 2만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이 1991년 가입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차별 없이 모든 아동의 교육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13년 출입국관리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한국에서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20세까지는 강제추방이 불가능해졌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의료보험 가입이 안 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데다 학교 전·입학 시 거부당하는 일도 발생한다. 학교장 재량이기 때문이다. 사미아 가족을 돕고 있는 유승희 변호사(원곡 법률사무소)는 “단속은 안 하겠다는 최소한의 방침에 그치고 있다. 미등록 이주 아동의 경우 아이가 잡혀갈까 봐 부모가 학교에 안 보내기도 한다. 아이들이 사각지대에 있다”라고 말했다.

2017년 9월 사미아는 학습권을 안전하게 보장받기 위해 외국인 유학생 자격으로 체류자격 변경을 신청했으나 출입국은 이를 불허했다. 유승희 변호사는 사미아를 대리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을 근거로 이주 아동의 교육권을 강조했다. 수원지방법원 행정2단독 이정권 판사는 이주 아동의 교육권 보장과 체류자격 부여는 별개의 문제라며 청구를 기각했다(2017구단9030). 재판부는 “정부가 이주 아동의 교육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해서 무조건 체류자격을 부여할 의무가 직접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이 판결은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이 선정한 ‘올해의 걸림돌 판결’ 중 하나다. ‘체류자격 없이 불안정한 지위에서 학교에 다니도록 결정한, 아동 인권에 반하는 판례’라는 이유였다. 서울고등법원 행정3부(문용선 판사)와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도 각각 항소와 상고를 기각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아동은 불안정한 신분으로 체류하다 성인이 되는 순간 출국명령을 받는다. 사미아에게 방글라데시는 더 이상 ‘고향’이 아니다. 유 변호사는 “언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소년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아이의 인생은 붕 떠버리게 된다”라고 말했다. 사미아의 장래 희망은 의사이지만 당장은 영어를 배우고 싶다. 혹시 방글라데시로 돌아가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사미아가 말했다. “거기엔 한국 학교가 없거든요.”

ⓒEPA5월30일 톈안먼 사태 30주년(6월4일)을 앞두고 중국 경찰이 톈안먼 광장에서 사열하고 있다.

■ 디딤돌 판결

“에이즈 같은 질병에 대한 낙인을 없애는 데 작은 단초를 마련했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1월부터 11월까지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은 총 54명이다. 같은 기간 2018년은 100명, 2017년은 111명, 2016년 79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현저히 적다(난민법이 제정된 1994년부터 2019년 11월까지 997명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올해는 난민에 대한 법원의 판단도 인색했다. 판결문 선정 대상이 되는 기간(2018년 7월1일~2019년 6월30일)에 난민 관련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한 사건은 오직 한 건이었다.

중국 출신 장명우씨(47·가명)는 경기도 화성에서 용접공으로 일한다. 중국에서 반정부 민주화운동을 해왔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주파수에 잡힌 미국 위성방송에서 ‘톈안먼(천안문) 어머니회’ 설립자인 딩쯔린의 연설을 들은 뒤로 삶이 바뀌었다. 톈안먼 어머니회는 1993년 톈안먼 사태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진상조사 단체다. 장씨는 이 단체에서 활동하며 톈안먼 사태로 사망한 시민들의 유가족을 만났다. 1998년 중국민주당에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였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인 쉬원리가 조직한 당이다.

중국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장씨는 2012년 6월 한국에 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중국에서 독립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중국민주당 한국지부’를 설립하고 2014년엔 한국본부를 대표해 홍콩의 우산혁명 시위에 참여했다. 2015년 중국인들이 많은 서울 명동과 대림동 일대에 톈안먼 사태를 알리는 전단지를 배포했다. 2017년에는 라디오 방송을 개설해 톈안먼 사건의 진실을 알렸다. 그는 현재도 중국 공안부의 감시와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방송을 계속하면 위험할 거라는 협박 전화를 종종 받는다. 누군가 집에 침입해 CCTV 전선을 끊어놓은 적도 있었다.”

2014년 12월 그는 한국 정부에 난민 인정 신청을 했다. 중국민주당 설립자 쉬원리와 주고받은 메일을 포함해 50개가 넘는 증거자료를 제출했지만 출입국은 박해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없다며 난민 불인정 처분을 내렸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단독(김정환 판사)의 판단은 달랐다. 장씨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장씨가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박해받을 우려가 있다고 볼 만한 근거 있는 공포가 있다고 보인다”라며 난민 불인정 처분을 취소하는 판결을 내렸다(2018구단7993).

이는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이 선정한 ‘올해의 이주인권 디딤돌 판결’ 중 하나다. ‘난민의 경우 그 특수성과 취약한 지위를 고려해 진술이 일부 불일치하더라도 전체적인 취지를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선례에 부합되게 판시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현재 서울출입국·외국인청의 항소로 2심이 진행 중이다.

10년간 한국 정부와 싸워 끝내 이기다

디딤돌 판결을 이끌어낸 당사자 중에는 10년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싸워 이긴 뉴질랜드 출신의 에이미 씨(가명·50)도 있다. 지난 10월29일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 HIV 검사에 대해 국가가 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에이미 씨는 〈시사IN〉과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안도했다.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길 바랐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일자리를 잃을 염려 없이, 차별받을 거라는 걱정 없이 HIV 에이즈 검사를 받으러 갈 수 있어야 한다. 이 판결이 에이즈와 같은 질병에 대한 낙인을 없애는 작은 단초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2008년 울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원어민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 이듬해 재계약을 앞두고 HIV·에이즈 및 마약 검사를 요구받은 사람은 학교에서 오직 한 명 에이미 씨였다.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요구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저 당혹스러웠다.” 당시 국내의 외국인 원어민 교사가 늘면서 그들에게 ‘HIV 보균자’ ‘마약중독자’ 같은 근거 없는 꼬리표가 붙었다. 원어민 영어 보조교사를 모집하는 교육부 산하 국립국제교육원은 2008년부터 지침을 마련해 회화 지도(E-2) 비자를 받은 외국인에 대해 HIV·에이즈 검사 결과를 요구했다. 한국계 외국인 원어민 교사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에이미 씨는 차별적 조치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교육청으로부터 ‘도덕적 양심과 인격을 평가하기 위한 수단으로 HIV 검사가 필요하다’ ‘방문자이기 때문에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이 테스트는 HIV 관련 질병에 대한 낙인 효과를 만들고, 외국인은 위험한 존재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 뿐이다.” 그는 2009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으나 개인 진정이라 조사가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각하되었다. 대한상사중재원에 울산광역시 교육청을 상대로 재계약에 관한 중재를 신청했으나 이 역시 기각되었다. 계약이 연장되지 않아 1년 만에 한국을 떠나야 했다.

2015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에이미 씨가 입은 손해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그가 한국을 떠나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과나 정책적인 변화, 보상과 같은 권리 구제를 받는 것이 인권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에이미 씨는 2018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진행했다. 결과는 원고 승소. 10년 만에 얻은 승리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35단독 김국식 판사는 “원고는 위법한 지침의 폐지와 자신의 권리 구제를 위하여 국내·국외에서 법적 노력을 계속해왔다. 원고가 결코 권리 위에 잠자고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라며 에이미 씨에게 1년치 급여와 위자료로 3000만100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2018가단5125207). 피고는 ‘대한민국’이었다. 이미 그가 문제를 제기한 이듬해인 2010년부터 국가는 외국인 강사에게 HIV 검사 결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2019 이주인권 판결 어떻게 선정했나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이 ‘올해의 이주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25건을 선정했다(2018년 7월1일부터 2019년 6월30일까지 판결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은 이주민의 인권을 위해 활동 중인 법률가와 연구자들의 네트워크다.

먼저 대법원 및 헌법재판소에서 선고된 이주인권 관련 판결문 1년 치를 모았다. 이주민이 소송의 당사자로, 이주인권 주제가 주요하게 다루어진 판결을 선정 대상으로 삼았다. 각급 법원 홈페이지의 판결문 열람 서비스를 활용해 ‘외국인’ ‘난민’ ‘귀화 허가’ ‘체류자격’ 등 15개 키워드를 검색하는 방식으로 판결문 3200여 건을 모았다.

판결의 영향력, 이주민 관련 법령에 대한 이해, 이주인권에 대한 이해, 참신성 및 발전성, 구체적 타당성 등 다섯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주인권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면 ‘디딤돌 판결’, 부정적 역할을 했다면 ‘걸림돌 판결’로 구분했다. 긍정·부정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고 계속 주시해야 하는 경우 ‘주목할 판결’로 선정했다. 변호사 24명이 참여한 1차 심사에서 판결문 80개를 추렸다.

11월20일 진행된 2차 선정에는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에 소속된 내부 심사위원 3명을 비롯해 외부 심사위원 4명이 모였다. 내부 심사위원으로는 박영아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이진혜 변호사(이주민센터 ‘친구’), 이탁건 변호사(재단법인 동천)가, 외부 심사위원으로는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 이한숙 이주와인권연구소 소장, 김성수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 김영화 〈시사IN〉 기자가 참여했다. 그 결과 디딤돌 판결 7건(이 가운데 2건은 2019년 7월 이후에 선고되어 대상 기간을 벗어났지만 시의성과 의미 면에서 주목할 만해 포함됐다), 걸림돌 판결 10건, 주목할 판결 8건이 최종 선정되었다.

 

 

기자명 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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