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와 진보의 고질적 병폐 갈파하다
  • 장정일 (소설가)
  • 호수 640
  • 승인 2019.12.2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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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그림

2014년 12월4일에는 눈이 왔다. Y 문고에서 구입한 〈강남 좌파〉 (인물과사상사, 2011)의 뒷장 속지에 ‘2014. 12. 4. 雪’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책 더미를 파헤치고 이 책을 다시 꺼낸 것은 지은이가 최근에 〈강남 좌파 2〉(인물과사상사, 2019)를 출간했기 때문이다. 〈강남 좌파〉는 읽다가 말았는지 48쪽까지만 연필로 쓴 메모와 밑줄이 있다. 이 기회에 두 권을 통독하고, 내친김에 처음 읽을 때는 마뜩지 않았던 〈싸가지 없는 진보〉(인물과사상사, 2014)까지 다시 읽었다. 세 권의 책에 일관되어 있는 문제의식은 말과 행동이 다른 진보의 이중성, 이상을 내세워 분열을 가속하는 좌파의 선명성 경쟁,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역지사지를 못하는 민주당의 성찰 부재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화제를 ‘강남 좌파’에 국한한다.

높은 학벌과 좋은 구역에 사는 상위 20%에 속하는 좌파 성향의 정치인과 지식인을 조롱하는 용어는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다.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 프랑스의 ‘캐비어 좌파’, 영국의 ‘샴페인 사회주의자’, 독일의 ‘살롱 사회주의자’, 캐나다의 ‘구치 사회주의자’, 오스트레일리아의 ‘샤르도네 사회주의자’가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지은이가 월간 〈인물과 사상〉 2006년 5월호에 처음 사용한 ‘강남 좌파’가 이 용어로 굳어졌다.

지은이는 〈강남 좌파〉에서 강남 좌파가 정치 사회의 모순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민주화 이후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군부독재와 싸우던 김영삼·김대중 시대까지는 민주화가 당면한 절대 목표였기 때문에, 민주화 진영이나 운동권 속에 강남 좌파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강남성’은 꼬투리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운동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호의호식할 수 있는 귀인들이 투쟁의 일선에서 민중과 함께 고통을 당하겠다고 나섰으니 도리어 절을 할 만큼 감사한 존재가 그들이었다. 강남 좌파에 대한 대중의 호의는 노무현 시대에 들어 확 달라졌다. 민주화라는 절박한 목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서민들이 모아준 ‘희망 돼지 저금통’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갖고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의 ‘쌍끌이’ 골프 사랑은 진보를 서민으로 알고 있었던 진짜 서민들을 뜨악하게 했다. “강남 좌파의 원조는 노무현이다”라는 지은이의 말은 과한 데가 있지만 맥락을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노무현 정부 고위 공직자와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양극화의 한 축인 20%에 속했다. ‘좌파는 언제까지 가난하고 궁색해야 한다는 말이냐?’라는 항변도 나왔지만, 좌파더러 가난하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20%는 결국 20%만을 위한 정책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말로는 강남 ‘좌파’라고 하지만, 20%에 속하는 부유하고 학벌 좋은 정치가들은 사실상 ‘좌파냐, 우파냐’ 하는 구분이 불가능하다. 이들은 빈곤층 복지 강화, 부유층 세율 인상, 부동산 투기 근절, 지역 균형발전 추진, 공정거래법 강화, 병역 비리 척결, 학벌주의 완화, 전관예우(낙하산) 강력 금지, 노동조합 활성화 정책 등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나 민생 문제와 무관한 이념 문제 및 자기 영역에서의 이익 추구에 몰두한다. 공당(公黨)이 이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한 정치가 서민을 위할 리 없다. 이제 강남 좌파는 잊자.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교육도 ‘상속’되고 ‘유전’되는 사회

66일간의 ‘조국 사태’는 20% 계층이 관행처럼 저질러온 ‘스펙 품앗이’의 실태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강준만은 강남 좌파를 분석한 2011년의 책에서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자녀교육에서 있어서만은 보수주의자와 아무런 차별성이 없다”는 점에 주목한 그는, 딱히 진보주의자만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비교적 좋은 교육 여건을 제공해줄 수 있는 여론 주도층에 속하는 사람일수록 학벌 완화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형식적인 평등에 대한 광범위한 신념은 지배계급이 그 지위를 공개적으로 자식에게 물려주는 걸 어렵게 한다. 새롭고 더 신중한 사회통제 및 지위 상속 수단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고등교육의 ‘능력주의 시스템(meritocratic system)’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계급적 이해관계를 교육적 위계질서에 떠넘김으로써 사회적 위계질서를 재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돈만이 아니라 교육도 ‘상속’되고 ‘유전’되는 것이다.”

지은이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계급투쟁보다 더 치열하다는 대학 입시 경쟁이 한국 사회에 자연스럽게 심어놓은 능력주의다. 개인의 지능과 노력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 능력주의는 출신 성분에 따라 부와 사회적 지위가 대물림되는 귀족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진보적 이념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와 반대로 성공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떳떳이 차별할 수 있게 정당화해주는 논리가 되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에게 능력이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 롤스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제로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는데도, 능력주의는 부모나 환경으로부터 거저 얻은 특혜라는 ‘비능력적 요인’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한다. 조국 사태는 진보주의자들이 입버릇처럼 되뇌어온 ‘참교육’ 담론이 위선이었음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유력한 이데올로기인 능력주의의 허구마저 보여주었다.

오래된 책인데도 〈강남 좌파〉는 방금 나온 책인 것처럼 조국 사태를 조감하고, 오늘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어온 한국 정치와 진보가 당면한 고질적인 병폐를 진단해준다. 새로 나온 〈강남 좌파 2〉는 전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감과 진단 위에서 조국 사태에 대한 분석을 더했다. 이번 책의 새로운 논의는 ‘1% 대 99% 사회’ 프레임을 ‘20% 대 80% 사회’ 프레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1%와 20%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근거이고, 20% 대 80% 사회를 직시하는 데에 한국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 답은 어떤 프레임을 갖든 80%는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삼모사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외국인 노동자·난민· 동성애자(성소수자)· 여성주의·생태주의·대체복무·노동조합· 남북 문제 등에 대해, 80%가 동일한 집단인 것도 아니다. 프레임에 얽매이기보다, 닥치는 대로 싸우고 가치에 따라 연대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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