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월11일 검찰에 출석하기 전 대법원 앞에서 입장을 밝히는 동안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조합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매주 두 번씩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이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시작된 재판은 7개월이 지나도록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오늘까지 신문한 증인이 28명인데 (···) 현재 상황에서 예정된 증인은 250여 명에 이릅니다(11월8일 검찰 의견 진술).” 피고인도 증인도 법조인인 이 재판은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힘겨워 보인다.

김앤장 소속 한상호 변호사가 증인으로 출석한 8월7일에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와 있던 2015년 5월, 한 변호사는 대법원 집무실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을 직접 만났다. 한상호 변호사는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에서 일본 기업 측 대리를 맡았다. 재판 때 검찰이 김앤장 사무실에서 압수수색해 확보한 문건에 대해 물으려 하자 한상호 변호사는 재판부에 간곡하게 요청했다. “제가 걱정하는 비밀 보호에 어긋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건을) 인용하면서 물어보시면 제가 계속해서 증언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호인으로서 비밀 준수 의무가 있는데 의뢰인인 일본 기업과 관련된 내용이 공개될 경우 업무상 비밀 누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건 내용을 직접 읽는 대신 그 내용이 있는 부분을 특정해 묻는 방식으로 신문이 이루어졌다. “4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부터 5페이지 다섯 번째 줄 ‘많이 배웠다’ 부분, 증인이 한 얘기 맞습니까?(검찰)” “너무너무 죄송하지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한상호).”

양승태·박병대·고영한 피고인 측과 검찰은 거의 매번 재판 진행 절차를 두고 다툰다. 검찰은 “재판의 지연은 재판의 거부와 같다”는 법언까지 인용하며 신속한 심리를 요구한다. 반면 피고인 측은 “신속한 재판보다는 정확한 재판을 원한다”라고 버틴다.

“이런 재판은 처음 본다”

11월13일 재판에서는 서증 조사가 문제였다. 서증 조사는 검찰이 확보한 ‘서류로 된 증거(서증)’를 법정에서 재판부에게 설명하는 절차이다. 양승태 법원행정처 등에서 작성한 사법농단 의혹 문건들이 이 서증에 해당한다. 증인으로 나온 문건 작성자가 증거에 위·변조가 없음을 확인하는 ‘진정성립’을 거치면 해당 증거에 대해 서증 조사를 할 수 있다.

변호인들은 진정성립이 끝난 서증에 대해서도 대부분 증거 조사를 반대했다. 작성자뿐만 아니라 이 문건에 관련된 이들까지 증언을 마친 뒤에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서증 조사가 늦어질수록 재판도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검찰은 반발했다. “(재판장님) 진정성립이 된 서증 조사는 허락해주심이 기존에 맞는 소송 지휘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영한 피고인의 변호인은 “서증 조사 시기는 재판장의 원칙적인 권한”이라고 맞섰다.

ⓒ시사IN 신선영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함께 재판을 받고 있는 고영한 전 대법관.

11월1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5부 박남천 재판장은 핵심 증인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신문을 마칠 때까지는 쌍방이 동의한 서증만 조사하겠다는 기준을 다시 밝혔다. “저희 사건에 보고서가 많이 올라오는데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 검토한 사람, 또 거기에 대한 보조 자료를 준 사람, 중간에 전달한 사람 등 여러 관련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서증의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련자의 증인신문을 다 마친 다음에 증거 조사를 해야 바람직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재판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어느 변호사는 “원칙적으로 양측의 동의를 얻어 서증 조사 계획을 세우는 게 맞지만 보통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은 형사소송법에 아주 충실하게 진행되는데, 이런 재판은 거의 처음 본다”라고 말했다. 재판독립이라는 헌법상 기본 원칙을 어긴 혐의로 피고인석에 서게 된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에게 재판 절차의 원칙은 이례적일 정도로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사법농단 의혹 사건에 가담한 전·현직 판사들도 연달아 증인으로 나오고 있다. 대부분 20대 초반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최상위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서울 소재 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뒤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온 이들이다(21쪽 인포그래픽 참조). 그래서일까. 몇몇 판사 출신 증인들은 법대 아래 증인석에 앉아 검사의 추궁을 받는 상황을 참을 수 없어 하는 듯했다.

10월25일 증인으로 출석한 최누림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 판사는 공격적으로 답변을 이어갔다. 최누림 판사는 2015년부터 2017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 심의관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 최누림 판사가 작성한 보고서는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됐다. 헌법재판소의 현대차 비정규 노조 업무방해 사건을 검토한 이 문건에는 ‘불법파업을 업무방해죄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형사처벌 공백이 발생하고 불법 파업이 폭증해 산업계, 재계의 부담이 급증하고 국가 경제가 급속히 악화’될 것이라는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이날 재판에서 최 판사는 이 문건이 청와대 전달용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검사가 “검찰 조사에서는 청와대에 전달될 수 있다는 말을 임종헌 차장에게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라며 진술조서에도 그렇게 써 있다고 하자, 최 판사는 “몇 페이지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청와대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최 판사를 직접 조사했던 검사는 재판이 끝날 무렵 이렇게 되물었다. “그럼 제가 썼습니까?”

10월2일 증인으로 나온 임성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사법행정’에 대한 본인의 철학을 설파했다. 양승태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중요 사건의 접수와 종국 보고’라는 대법원 규칙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재판 정보를 수집했다. 임 판사는 “‘중요 사건의 접수와 종국 보고’는 최소한을 정한 것이다. 국회 국정감사 준비 등 사법행정상 필요한 한도에서는 얼마든지 보고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임성근 판사는 그 자신도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를 받고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있던 2015년, 임 판사는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 사건 재판부로부터 판결 구술본을 미리 받아보고 손수 첨삭했다. 임 판사는 이 혐의로 기소돼 별도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날 재판에서는 임성근 판사가 검찰 조사를 받으며 이에 대해 정당하다는 취지로 진술한 내용이 공개됐다.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조언해 해당 부분을 자진해 고치게 하는 건 수석부장판사의 당연한 임무(이다).”

ⓒ연합뉴스임성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법정에서사법행정에 대한 본인의 철학을 설파했다.

법관 경력이 길수록, 고위급일수록 증인으로 나온 판사들은 떳떳했다. 사법행정을 지휘할 권한을 행사했을 뿐 사법농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11월29일 재판에는 윤성원 전 인천지방법원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으로 임명돼 사법농단 연루 의혹을 받은 윤 전 법원장은, 올해 1월 시민단체가 발표한 탄핵 대상 판사 명단에 포함되자 사표를 냈다. 그의 증언 태도는 유별난 데가 있었다. 우배석 심판 판사의 질문에, 윤 전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의 일 중 하나를 말씀드리면”이라고 운을 떼며 답했다. 법원행정처 경험이 없는 후배 판사를 가르치는 듯한 말투였다.

모든 판사 증인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건 아니다. 변호인들은 11월6일 증인으로 출석한 문성호 서울중앙지법 판사로부터 원하는 답을 좀처럼 얻어내지 못했다. 문성호 판사는 2015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이규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지시로 ‘통진당 국회의원 행정소송 결과 보고’ 문건을 작성한다. 재판 개입으로 읽힐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병대 피고인의 변호인이 “이런 종류의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문제점과 향후 대책 검토는 심의관이 통상 하는 정상적인 업무이죠?”라고 묻자, 문성호 증인은 머뭇거리더니 “내용마다 다를 것 같다”라고 말했다. 변호인은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그 내용 중 위법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본인 의사에 반해 기재한 것이 있습니까?(변호사)” “보고 주체가 요구하는 내용을 반영시키는 식으로 일을 해왔습니다(문성호).” “그중 위법하고 부당하지만 한 일 있습니까?(변호사)” “당시는 둔감하게 넘겼던 문제도 지금 다시 보면 적절하지 않은 것도 보입니다(문성호).”

ⓒ시사IN 신선영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함께 재판을 받고 있는 박병대 전 대법관.

11월13일 증인으로 나온 임효량 수원지방법원 판사는 임종헌 차장이 시킨 일에 대해 “도저히 보고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2016년 법원행정처 기획 제2심의관이었던 임효량 판사는 ‘각급법원 주기적 점검 방안’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이 문건에서 검토한 내용에 대해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법원행정처에서 비공식적인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 자체가 사찰로 인식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임효량 판사는 법원행정처 근무 판사들은 법관이 아니라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행정공무원이라 상급자의 의사 결정에 복종해야 했다는 취지로 증언을 마무리했다. 증언 내내 괴로워 보였던 문성호 판사도 사법행정권 남용 가담 혐의로 법관징계위원회에서 받은 징계(견책)에 대해서는 징계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한번 하는 순간 관성이 생기더라”

8월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을 방청하며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증언이 하나 있다. 최희준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헌법재판소로 파견을 나가, 헌법재판소의 주요 재판 정보와 내부 정보를 수집해 법원행정처에 보고했다. 10월18일 증인으로 나온 최희준 판사는 “처음에는 주저했는데 한번 하는 순간 관성이 생겨 점점 보고를 많이 드리게 됐다. 부조리극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부끄럽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저를 이해한다는 연구관들도 있다.” 이 짧은 증언에서도 최 판사는 후회와 자기 연민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법원 조직 곳곳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손발이 되었던 판사들이 있다. 이 판사들이 없었다면 사법농단은 법원을 집어삼키지 못했을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제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지만, 이들은 오늘도 법대(법정에서 바닥보다 높은, 법관이 앉는 자리)에 올라 누군가를 심판한다. 경남지방변호사회는 11월19일 2019년도 우수 법관을 선정했다. 사법농단 연루 의혹을 받는 김민수 창원지법 마산지원 부장판사, 구민경 창원지법 부장판사가 이름을 올렸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