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령경모리카와 마치코 씨에게 문옥주 할머니는 일생을 고군분투한 여성이자 인생의 선배였다. 위는 지난 11월24일 열린 모리카와 씨 추도식.

두 사람 다 72년의 삶을 참 ‘열심히’ 살았다. 1924년 식민지 조선의 대구에서 태어난 문옥주는 열여섯 살이 되던 1940년 가을에 중국 동북부 만주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소로 징발되어 갔다가 2년 뒤인 1942년 멀고 먼 미얀마(당시 버마)의 일본군 위안소까지 끌려갔다. 생지옥이라 불리는 버마 전선에서 살아남은 문옥주는 예순일곱 살이 되던 1991년 ‘위안부’ 피해 생존자로 자신을 드러냈다. 그는 1996년 10월26일 세상을 떠났다(〈시사IN〉 제475호 ‘일본인이 기록한 위안부의 악몽’ 기사 참조).

1947년 3월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에서 태어난 모리카와 마치코는 야마구치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우정성에 취직해 1986년까지 근무했다. 시모노세키 우체국에서 근무할 때 퇴역한 일본인 병사들의 군사우편저금 미지급 건을 담당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되었고, 1986년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참여했다. 모리카와는 45세 되던 1992년 3월 문옥주와 처음 만났고, 일본에서 1996년에 초판 〈문옥주, 버마 전선 다테사단의 ‘위안부’였던 나〉를 썼으며, 2015년 증보판을 엮어냈다. 그는 지난 10월5일 운명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부고였다. 모리카와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며, 현지 조사를 해야 해서 장기간 미얀마에 머물 예정이라며, 노인요양시설을 하겠다며, 여생은 후쿠오카를 떠나 나가노에서 살겠다며 늘 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문옥주와 모리카와는 만나자마자 잘 맞았다.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남에게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을 듣고 기록하기 위해 여러 번 되새기기도 쉽지 않다. 문옥주와 모리카와는 책을 펴내기까지 약 3년간 만나면서 눈물짓는 날보다 웃는 날이 많았다. 모리카와는, 자신은 이야기를 듣고 기록을 남기는 사람일 뿐이라며 문옥주의 경험을 ‘해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모리카와는 문옥주가 경험한 전쟁을 더 깊이 상상하고 이해하기 위해 퇴역 군인들의 회상기를 읽고 관련 자료를 찾아 다녔으며 버마 전선에 참전한 전우회 회원들을 만나기 위해 애썼다. 버마에 머물며 어린 문옥주를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고 한탄하게 만든 현장을 찾아 다녔다. 그는 후쿠오카에서 페리를 타고 부산으로, 부산에서 대구행 새마을호를 타고 문옥주를 만나러 갔다. 열여덟 차례나 문옥주의 집에 머물며 진심을 다해 증언을 들었다. 모리카와에게 문옥주는 ‘참혹한 고통을 당한 가엾은 피해자’라기보다 일생을 고군분투한 여성이자 인생의 선배였다. 문옥주에게 모리카와는 규탄해야 할 가해국 일본의 국민이 아니라, 되풀이해서는 안 될 역사를 되새기는 동지였다. 그런 신뢰 속에 문옥주는 자신의 모든 삶을 말했으며, 기록하는 모리카와는 그 증언을 취사선택하지 않았다. 책의 후반부인 현지 조사와 연구는 문옥주가 풀어놓은 말의 행간을 채우기 위해 모리카와가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다.

책이 나온 후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자 모리카와는 안이하고 섣부른 오해와 일반화를 거부했다. 문옥주의 72년은 입맛대로 잘라 해석하고 단정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두 사람은 가부장제, 식민지 지배, 제국 일본이 저지른 전쟁과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과오, 해방 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헤치고 살아온 한 여성의 인생을 담은 소중한 책을 우리에게 남겼다.

가혹한 위안소에서 요령껏 자신을 지키며 살았던 문옥주는 조선인이라고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하는 일본군과 일본적십자사 간호사들에 맞서 싸웠다. 반면 상관에게 혼이 났거나 두들겨 맞은 말단 병사에게는 술을 사주고 위로했다. 군대와 함께 이동하던 중 병든 동료를 간호하고 그래도 사망하자 직접 화장을 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양반이라는 허울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빠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했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에는 자신의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 성심껏 마지막까지 챙겼다.

모리카와는 ‘여자라서 안 된다’는 차별과 싸웠다. 우체국 직원이 된 모리카와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도쿄의 연수원에서 외환 관련 업무 교육을 받았다. 능력 있는 직원을 선발해 따로 교육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첫날 담당 교육관으로부터 ‘실제 시험 성적대로라면 여자 8명, 남자 2명이 합격인데, 여자가 너무 많아서 남자를 8명, 여자를 2명으로 조정했다’는 말을 들었다. 모리카와에게는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는데 그 말을 한 당사자는 물론 그 이야기를 듣는 다른 합격자들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서 괴로웠다. 모리카와는 노골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여성 차별을 보기 시작했다. 연수를 마친 모리카와는 시모노세키 우체국에 부임하자마자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그 후 16년 동안 승진과 월급 등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회사와, 한국으로 ‘기생 관광’을 가는 남성 조합원들에 맞서 싸웠다.

ⓒ모리카와 마치코 제공1995년 모리카와 씨(오른쪽)가 미얀마에서 찍어온 사진을 현장 지도와 함께 보는 문옥주 할머니.

27년간 문옥주의 삶을 붙들고 살다

모리카와는 아버지에게 전쟁이란 여성과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저질러진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고 자위대 해외 파병 반대운동도 주도했지만, 진짜 전쟁은 문옥주에게서 배웠다. 모리카와는 문옥주를 만난 후 27년 내내 문옥주의 삶을 붙들고 살았다. 일본군 병사였던 아버지의 딸로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자매로서 그는 여성의 성을 도구로 이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남성 권력과 남성 본위 사회에 맞서며 살았다.

나는 나가노로 이사한 모리카와에게서 지난 5월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모리카와는 3월에 한국 MBC와 함께 미얀마를 방문해서 문옥주가 있었던 위안소 양곤회관과 조선인 위안부가 있었던 YMCA 건물, 중국인 위안부가 있었던 건물, 위안소경영자회의가 열렸던 건물이 모두 가까이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다며 기뻐했다. 문옥주가 양곤에서 폭력을 휘두른 일본군을 살해한 죄로 재판에 회부된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 군사재판 관계 문서를 찾고 있다며 자신의 평생 사업인 ‘위안부’ 문제 조사를 계속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지난 6월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할 일이 있다며 필사적으로 재활치료를 해서 9월 한국을 방문해 MBC의 후속 촬영에 협조했고(내년 1월 방영 예정), 돌아오자마자 도쿄에서 〈기록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 상영회를 열었다. 그리고 돌아가셨다. 1996년 5월 문옥주는 누워 있어야만 하는 몸을 이끌고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청구소송’ 재판의 본인 심문에 나섰다. 그리고 돌아가셨다. 두 사람 다 72년의 삶을 참 ‘열심히’ 살았다.

1992년 3월28일 문옥주가 ‘저는 일본군 위안부였던 문옥주입니다’라고 증언했던 남녀공동참획(참여기획)추진센터 아미카스의 4층 홀에서, 27년이 지난 11월24일 모리카와 마치코의 추도식이 열렸다. 문옥주를 이야기하는 모리카와의 환한 미소를 보고 목소리를 들었다. 모리카와 선생님, 문옥주 선생님 만나셨어요? 편히 쉬세요. 사랑합니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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