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런 법원이어도 괜찮습니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하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가 불거지고 1000일이 흘렀습니다. 2017년 3월6일 〈경향신문〉은 이탄희 판사(현 변호사)가 법원행정처로 발령을 받았다가 부당한 지시를 받고 사표를 썼다는 기사를 냈습니다. 이후 법원행정처에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양승태 대법원이 박근혜 청와대와 거래하기 위해 재판에 개입한 정황도 여럿 드러났습니다. 소송 동료 세 명을 먼저 보내고 혼자 결과를 기다리던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 대법원 판결 여파로 동료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KTX 여승무원 등, 당사자들에게는 온 삶이 걸린 재판입니다. 그런 재판이 양승태 대법원의 좌판에 흥정거리로 쭉 깔렸던 겁니다.

ⓒ시사IN 신선영지난해 5월29일 대법원에 진입해 농성을 벌이던 KTX 해고 여승무원이 로비에 걸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초상화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1000일 동안 한국 사회는, 법원이 스스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지켜봤습니다. 결과는 다들 확인한 대로입니다. 해법은 고사하고 진단부터 후퇴를 거듭한 1000일이었지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농단 사태의 핵심 인물들은 재판에서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법원 내부 기류도 많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경력이 긴 법관들은 “법원행정처가 늘 해오던 일을 하던 와중에, 임종헌 등 몇몇이 ‘오버’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버한 몇몇’만 내보내고 ‘선’만 넘지 않도록 하면 이대로도 큰 문제는 없다는 얘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법농단 사태의 본질이 ‘유난히 권위적인 양승태’와 ‘과잉 충성하는 임종헌’ 둘로 설명될까요. 일련의 사태에서 우리는 까다롭고 근본적인 질문의 꾸러미를 받아들었습니다. 판사들이 재판을 거래 대상으로 쓰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판사도 감시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판사를 감시하는 외부(청와대든 국회든)의 힘이 지나치게 세면, 이들의 입맛대로 재판이 휘둘릴 수 있습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재판 독립은 헌법정신입니다. 동시에, 재판은 사람 목숨까지 거둘 수 있는 권력입니다. 모든 권력은 견제와 균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 역시 헌법정신입니다. ‘재판 독립의 원리’와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본질상 충돌합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사법농단의 주역은 법원행정처였습니다. 법원행정처는 이 딜레마를 그럭저럭 다뤄내는 조직처럼 보였습니다. 국회나 청와대가 재판에 침투하려는 시도를 들어주는 척 흘려내면서, 한편으로 입법이나 예산 등 법원이 필요한 자원을 따내오는 기구로 보였습니다. “법원행정처 구조가 이상적이라고는 못해도 필요악은 된다”라는 정서가 법원 내에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가 큽니다. 그런데 이 법원행정처가 사법농단의 엔진이었습니다. 이제 이 모델은 폐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요?

그러니까 사법농단이란 사법부가 가진 구조적 딜레마가 극적으로 뒤틀려 분출한 사건이었습니다. “나쁜 놈들이 나쁜 짓을 했으니까 나쁜 놈들을 몰아내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는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정말 이런 법원이어도 괜찮습니까. 우리의 답이 ‘아니다’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이런 법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작업입니다.

헌법은 권력을 다루는 계약서입니다. 헌법의 세계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권력은 위험한 물건이니까, 그 누구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는 서로 다른 권력을 가짐으로써,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헌법의 세계는 기대합니다. 입법·행정·사법의 핵심 인물들이 서로 결탁하고 거래하면서 각자 원하는 것을 가져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이것은 ‘내부자들’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거래와 흥정의 원리로 작동합니다. 각자가 가진 권력은 서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데 쓰입니다. 이런 것을 정치학에서는 ‘딥스테이트(Deep State)’라고 부릅니다. 헌법의 세계보다 깊숙한 곳에 내부자들의 세계가 있고, 그게 실제로 나라를 움직입니다.

사법농단은 헌법의 세계가 내부자들의 세계로 미끄러진 사건입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거래와 흥정의 원리로 대체된 사건입니다. 〈시사IN〉은 3회에 걸쳐 이 미끄러짐을 다룹니다. 1부는 여러 권력기관을 넘나드는 내부자들의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법원이 인권과 법치를 보호하는 사법기구가 아니라, 조직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자원을 베팅하는 관료기구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을 베팅하고 행정안전부가 티오(TO·공무원 정원)를 베팅하듯 법원은 재판을 베팅합니다.

2부는 관료적 내부 정치의 한 플레이어인 법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룹니다. 블랙박스라고 할 수 있는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법원의 내부자들’이 작동하는 방식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이들은 법원 안의 법원이었습니다. 딥스테이트의 부속이었으니 ‘딥코트(Deep Court)’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효율적이고 강고해 보이던 이 딥코트가 실제로 얼마나 취약하고 허망한지도 2부에서 드러납니다. 딥코트는 몇 명 되지도 않는 법원 내 소모임에 과민 반응하다가 판사 사찰에 손을 댔고, 그에 항의하는 젊은 판사 한 명의 문제 제기로 속살을 다 드러내야 했습니다.

3부는 내부자들의 세계를 다시 헌법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다룹니다. 그러려면 ‘재판독립의 원리’와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충돌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부자들의 세계는 이것을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그래서 내부자들의 세계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법관도 많았지만, 헌법의 세계로 가려면 이 딜레마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어렵고 답 없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준비가 될 때, 우리는 사법농단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종헌. 1959년생. 전 판사. 지금은 사법농단 사건 피고인. 서울대 법대 졸업. 1987년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사법연수원 성적이 판사 중에서도 상위권이라야 첫 부임지를 서울로 받는다. 1999년 법원행정처에 입성했다. 이후 요직을 두루 거쳤다. 법원행정처에서도 핵심인 기획조정실(기조실) 실장을 2012년에 맡아 2015년까지 일했다. 직후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승진해 2년 더 있었다. 법원행정처의 장은 대법관이 맡는다. 법원행정처를 일상적으로 움직이는 축은 차장·기조실장 라인이다. 임종헌은 이 축을 2012년부터 2017년까지 5년간 틀어쥔 사람이다. 이 시기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하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이 일어난 시기와 겹친다. 사법농단 사태는 ‘임종헌 사태’라고 불러도 어떤 의미로는 말이 된다.

2016년 3월, 문성호 판사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심의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문 판사는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박한철 당시 헌법재판소장 비판 기사를 대필하라는 지시를 받고 버티다가 결국 기사 초안을 쓴다. ‘한 서초동 변호사’가 헌재소장을 비판하는 발언도 지어서 집어넣었다. 기사는 〈법률신문〉 기자 이름으로 보도된다. 문 판사는 검찰 조사에서 왜 끝까지 거절하지 않았는지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법원행정처 분위기가 그렇다. 임종헌 차장의 건배사로 ‘KKSS’라고 있다. ‘까라면 까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뜻이다.” ‘KKSS’는 임종헌 시대의 법원행정처를 상징하는 단어로 널리 회자됐다.

‘임종헌 사태’와 ‘KKSS’는 사법농단 사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인 동시에 함정이다. 조직에 충성하고, 상사의 지시를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무리수도 날리고, 부하직원을 상명하복에 묶어두고, 그렇게 해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인물형은 생각보다 흔하다. 그러니 중요한 질문은 “어쩌다가 임종헌과 같은 인물이 법원에 와서 KKSS를 외쳤나”가 아니다. 그런 인물은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권력에 접근한다. 핵심은 “사법부와 가장 상성이 나쁜 ‘임종헌 스타일’을 왜 법원은 걸러내지 못했나” 이 질문이다. 그런 유형의 인물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을 한참 뒤로 돌려 두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그리고 민복기 전 대법원장이다.

ⓒ연합뉴스2013년 12월6일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앞)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1961년 5월16일, 육군소장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감행해 정권을 찬탈한다. 군사정권은 ‘반공’을 명분 삼아 권력기반을 다져나갔다. 이러려면 주기적으로 간첩단 사건과 같은 공안 사건을 ‘생산’할 필요가 생긴다. 그래야 정권의 정당성도 유지되고 반대파를 숨죽이게 만들 수 있다. 공안 사건 생산이 정권을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 되고, 국가보안법은 헌법을 넘어서는 기본법이 된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의 작동 원리가 기본적으로 이랬다.

공안 사건 생산 벨트는 정보기관에서 출발한다. 중앙정보부(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안전기획부)가 간첩단을 찾아내거나 ‘발굴’한다. 여기까지는 초법적 권력을 휘둘러도 된다. 중앙정보부는 고문과 진술 조작 등 불법 수사기법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그다음 단계부터는 최소한 헌정체제와 법치주의의 외양을 지켜야 했다. 기소는 검찰이, 판결은 법원이 해줘야 했다. 여기까지 고리가 잘 이어져야 공안 사건이 잘 ‘생산’되는 것인데, 이것이 정권의 최대 관심사였다. 검찰이 상대적으로 더 쉬웠다. 행정부처의 일원인 검찰은 인사권과 상명하복 문화로 작동시킬 수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수사기록은 고스란히 검찰 공소장이 되었다. 그다음 단계로, 중앙정보부 기록이 고스란히 판결문이 될 필요가 있었다.

법원이 약한 고리였다. 판사들은 자존심이 세서 영 말을 안 들었고, 인사권이나 명령체계로 움직이기도 간단치 않았다. 각종 시국 사건에서 자꾸 무죄판결이 나와 대통령의 심기를 긁었다. 박정희는 1972년 친위 쿠데타인 10월 유신을 일으킨다. 1973년 1월, 법무부 연두순시에서 박정희는 법원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법원이 사법권 독립이라는 이름 아래 국사범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정치사범 재판을 지연시키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한 사례가 있다.”

박정희는 역설적이면서도 창조적인 해법을 내어놓는다. 법원을 골칫거리로 여긴 박정희는 법원의 권한을 빼앗는 길을 모색하지 않았다. 대신 박정희는 대법원장의 손에 법원 전체를 쥐여주었다. 법관 선발, 보직, 법원행정처장 임명 등의 권한은 대법원판사회의(지금의 대법관회의에 해당한다)가 갖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 권한을 모두 대법원장 한 명에게 옮겼다. 1972년 유신헌법은 대법원장 추천권을 가졌던 법관추천회의도 없애고,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국회 동의를 거쳐 임명하도록 바꿨다. 이제 군사정권은 수많은 판사를 일일이 장악할 필요가 없어졌다. 판사 한 명만 장악하면, 나머지 판사 전체는 그 한 명이 장악해준다.

대법원장, 심부름꾼에서 제왕으로

‘그 한 명’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 민복기 판사다. 판사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34세 때 검사로 직업을 바꿔 검찰총장까지 했다. 5·16 쿠데타 이후에는 법무부 장관도 지냈다. 1968년 박정희는 자기 내각의 일원이었던 민복기를 대법원장에 앉히고, 민복기는 법원행정처장에 법무부 차관 김병화를 임명한다.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에 갖는 권한도 대폭 세지고, 법원행정처가 법원 전체에 갖는 권한도 역시 세졌다. 유신 직후 박정희가 세운 새 대법원장도 다시 민복기였다. 박정희·민복기 체제는 한국 법원의 기본 구조를 만든 결정적 시기로 평가받는다.

ⓒ연합뉴스1974년 12월5일 법원회의실에서 민복기 대법원장(서 있는 이) 주재로 전국 지방법원장 회의가 열렸다.

이것으로 약한 고리가 사라졌다. 중앙정보부가 쓰고, 검찰이 기소하고, 법원이 판결하는 삼각 협조 체제가 완성된다. 박정희의 군인 시절 법무참모였던 신직수는 36세에 중앙정보부 차장, 같은 해에 검찰총장, 44세에 법무부 장관, 46세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민복기 대법원장도 검찰과 법무부에서 성장해 법원으로 돌아간 사례다. 권력끼리의 담장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는데, 최고 권력자가 헌법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기구를 통치기구로 간주한 결과다.

헌법의 외양 아래 ‘국가 속 국가’가 있었다. 박정희·민복기 체제는 법원을 이 ‘국가 속 국가’에 적응시켰다. 공안 사건 생산 벨트는 지나치게 잘 돌아갔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고문으로 과장·조작된 2차 인민혁명당 사건에서 여덟 명에게 사형 판결을 해 사법살인의 기록을 남겼다. 이들은 판결 18시간 후인 4월9일에 사형을 당한다. 같은 해 12월, 이제는 법원을 완전히 신뢰하게 된 유신 정권은 대법원장에게 선물을 또 하나 쥐여준다. 법원행정처 조직 구성은 원래 법원조직법으로 정했다. 새 법원조직법은 법원행정처 조직 편성도 대법원 재량으로 넘겼다. 1977년 8월, 법원행정처에 기조실이 설치된다. 기업이나 정부부처에서 흔히 보는 기획 기능이 법원에 공식 탑재된 사건이자, 사법농단 사태의 핵심부서가 탄생한 순간이다.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고 법원행정처가 손발이 되어 법원 전체를 통제하는 구조. 이것은 군사독재의 요구에 법원이 적응한 결과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독재자가 사라졌다. 행정부가 법원을 통제하도록 고안된 시스템에서 통제자가 사라졌다. 이것은 심대한 변화였지만 법원과 관련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법원이 아니라 법원을 둘러싼 환경이 변한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수동적인 변화가 가져온 파장은 엄청났다. 군사독재 시절 대법원장은 ‘제왕적 심부름꾼’이었다. 이제 대법원장은 그냥 ‘제왕’이 되었다.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의 ‘절대반지’가 되었다.

훗날 사법농단 사태가 세상에 드러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이탄희 판사(현 변호사)는, 처음에 법원행정처 발령이 나자 축하 인사 전화와 문자를 과하다 싶게 받았다. 특히 법원행정처 심의관을 거친 판사들의 연락이 많았다. 이 판사는 몇몇 인사말이 기억에 박혔다. “사법부의 중심에 들어가는 거다” “인사권자에게 보은해라” 등이었다. 독립된 헌법기관인 법관에게 ‘중심’은 뭐고 ‘보은’은 또 무슨 말일까. 이건 법원에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법원도 조직이라 누군가는 행정 기능을 해야 한다. 판사를 뽑아야 하고, 승진과 전보와 재임용 인사를 결정해야 하고, 시설물을 관리해야 하고, 예산을 타오고 쓰고 기록해야 한다. 이런 걸 사법행정이라고 부른다. 원리상 재판을 원활하게 진행하도록 지원하는 행정 기능이다. 그런데 법관 선발·재임용·승진·전보 등 인사권은 법관을 통제하는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다. 인사권을 대법원장에게 몰아주고 그 세부 집행을 법원행정처가 보좌하도록 했으니, 법원행정처는 지원 조직이라는 본질을 훌쩍 뛰어넘어 법원 내부의 권력기관으로 진화해나갔다.

“법원행정처에서 문건을 주며 전달하라고 했는데 무시하면 질책을 받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기껏 수석부장으로 보내놨더니 일을 이렇게 하느냐는 부정적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한창. 2015년 5월에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였다. 사법농단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그는, 법원행정처가 자신에게 ‘통진당 행정소송 검토보고’ 문건을 전달한 것이 맞고, 압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문건에는 서울행정법원에 올라온 통합진보당(통진당) 의원들의 행정소송에 대해, ‘각하는 부적절’ ‘판단 권한이 헌법재판소에 있다는 이유 구성은 부적절’ 등 사실상의 가이드라인이 실려 있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법원이 헌재 결정을 다시 심사하여 헌재에 대한 법원의 우위를 전례로 남기고 싶었다. 조한창 판사는 담당 재판부에 문건을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회식 자리에서 슬쩍 내용을 전달했다.

조한창 판사는 “기껏 수석부장으로 보내놨더니 일을 이렇게 하느냐”라고 법원행정처가 생각할 것이라는 부담을 느꼈다. 수석부장판사는 그 법원의 재판부를 총괄하는 역할이고, 여기서 ‘총괄’이란 이럴 때 법원행정처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수석부장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어느 법원의 수석부장으로 간다는 것은, 인사를 내준 법원행정처에 ‘보은’할 일로 간주된다. 가볍게는 재판의 진행 상황이나 예상을 알려주는 일(실제로는 가벼운 일이 아니지만 가볍게 이루어졌다)부터, 심각하게는 통진당 사건처럼 재판 자체에 개입하는 일까지 있었다.

수석부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리는 어디일까? 서울중앙지방법원(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 자리다. 이곳은 정권이 관심을 갖는 권력형 사건이나 국회의원 선거법 사건이 몰리는 곳이다. 영장 전담 판사, 선거법 전담 재판부 등 정치권에 민감한 판단을 하는 기능이 집중돼 있다. 판사 사회에서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은 청와대가 직접 인사를 챙긴다고 알려져 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관련 사건이 서울중앙지법으로 대거 몰린 적이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관심 갖던 사건이다. 여기서 무더기로 유죄가 나와야 집회의 정당성이 훼손되고 정권의 정당성은 보존될 것이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 허만 판사는 촛불집회 관련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몰아줬다. 재판부 성향에 따라 배당을 몰아주면 사실상 재판 개입 효과가 난다. 이 사실은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훗날 대법관이 된다)의 재판 개입 이메일 사태와 맞물려 ‘신영철 사태’로 비화됐다.

“저는 당시 사법행정 업무를 담당한 형사수석부장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합니다.” 신광렬. 사법농단 사태의 여러 피의자 중 한 명이다. 2016년에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이었다. 이른바 ‘정운호 게이트’(검찰과 법원 출신 전관 변호사가 거액의 수임료를 받고, 이 돈이 브로커를 통해 현직 판사와 검사 로비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의혹)가 터지자, 법원행정처는 법원 보호를 위해서라며 검찰 수사 상황을 확인하려 한다. 신광렬 형사수석부장은 영장 담당인 조의연·성창호 판사한테 ‘정운호 게이트’ 사건 정보를 받아 법원행정처에 넘겼다. 보고서 9건을 작성했고, 153쪽 검찰 수사보고서도 통째로 넘겼다. 신광렬 판사도 법원행정처 근무 이력이 길다. 보직과 역할이 달라도 이들은 ‘사법부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는 의식을 공유한다.

ⓒ연합뉴스2015년 1월7일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결정 후 옛 통합진보당 광주·전남 지방의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법원 내 요직 차지한 ‘민판연’

이제 법원행정처는 공식 조직도의 기능과 역할을 뛰어넘어 확장된다. 양형위원회, 대법원 재판연구관실, 서울중앙지법 형사부 등과 공고한 협조 체제를 구축한다. 조한창 판사에게 재판 가이드라인 문건을 전달한 사람은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었다. 양형위원회는 법원행정처 소속이 아니지만, 이규진 상임위원은 문건을 전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맡았다. 조 판사는 그를 보고 또 자연스럽게 이규진 개인이 아니라 법원행정처의 뜻이라고 짐작했다. 그 외에도 전국 각지의 각급 법원장, 수석부장, 기획법관 등이 실핏줄을 이룬다. 누구는 조한창 판사처럼 마지못해, 또 누구는 신광렬 판사처럼 확신을 갖고 협조한다. 결과는 같다. 행정이 재판에 침투한다.

이것은 박정희 정부가 정보기관·수사기관·사법기관의 기능과 역할을 뛰어넘어 삼각 협조 체제를 구축한 것과 닮았다. 그때 ‘국가 속 국가’의 작동 원리는 헌법과 상관이 없었다. 중앙정보부와 검찰과 법원이 하나의 권력기관처럼 작동했고, 경계를 무시하고 넘나드는 힘은 독재자에게서 나왔다. 민주화 이후 ‘법원 속 법원’이 작동한 원리도 재판 독립 원칙과 상관이 없었다.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법원 속 법원’이 구축되어 한 몸으로 작동했고, 경계를 무시하고 넘나드는 힘은 제왕적 대법원장에게서 나왔다. 박정희의 유산이 법원을 ‘박정희화’했다. 우리는 이 ‘법원 속 법원’을, 정치학이 쓰는 ‘딥스테이트(Deep State·국가 속 국가)’ 개념을 빌려와서 ‘딥코트(Deep Court)’라고 부를 것이다.

딥코트의 일원이 충원되는 과정을 보자. 김민수 판사는 올해로 14년 차다. 200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2001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고, 2006년 서울중앙지법에서 법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법원 연구회 중에서는 민사판례연구회와 우리법연구회에서 활동했다. 건조하게 이력을 나열하는 이 문장 하나로도 법원 사정에 밝은 이들은 빠르게 정보를 뽑아낸다. 성골이다. 법원 내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성골의 기준은 이렇다. 서울대 법대 출신에,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그래서 군대를 법무관으로 다녀오고), 초임을 서울에서 시작한다. 특히 서울중앙지법이면 사법연수원 성적이 최상위권이라는 의미다. 이러면 높은 확률로 민사판례연구회(민판연)에서 가입 제안을 받는다.

민판연은 공개모집을 하지 않고, 기준에 맞는 성골만 골라 받는 식으로 운영된 역사가 길다. 민판연은 법원 내 요직을 대부분 차지해온 데다가 이런 폐쇄적 운영방식으로 ‘법원의 하나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010년이 되어서야 공개모집 방식으로 바꿨지만 여전히 문턱은 높다. 2015년 김민수 판사는 성골 판사의 전형적 코스를 따라 법원행정처 기획2심의관으로 간다. 기획2심의관은 1년간 일한 후에 기획1심의관으로 한 계단 올라서는 게 관례였다. 법원행정처에서도 핵심이라는 기조실에서 사법행정 이력을 시작하는 경로다.

김민수 판사의 이력 중에 성골과 거리가 먼 것은 우리법연구회 경력이다. 민판연이 성골의 상징이라면, 우리법연구회는 반골의 상징이다. 김 판사는 개혁 성향의 소장 판사들과 친했고 본인도 개혁 성향을 보였다. 법원행정처는 개의치 않았다. 개혁 성향 판사들이 오히려 조직논리에 따라 더 치열하게 일하는 전례가 많았다. 김민수 판사는 사적으로 친한 판사들의 정보를 보고서에 담아 올려서 자신의 개혁 성향을 ‘업무 성과’로 연결시켰다. 김 판사와 친분이 있는 차성안 판사는 당시 양승태 대법원의 주력사업인 상고법원 추진을 비판하고, 판사들과 이메일 토론을 해나가고 있었다. 김민수 판사는 주변 판사들을 통해 이메일을 입수하고, 이걸 대외비 보고서로 만든다. 젊은 시절의 개혁 성향 정도는 법원행정처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단 데려오면, 딥코트의 일원을 어렵지 않게 만들어냈다.

젊은 판사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딥코트의 업무를 수행할 능력과 충성심을 검증받는다. 출발부터 좁은 문을 뚫고 선택된 이들이라,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반기를 들고 탈락하는 걸 두려워한다. 살면서 낙오자가 되어본 경험이 없을 성골 판사일수록 더 두려워한다. 첫 단계에서 능력을 입증하면 ‘형사재판을 맡길 수 있는 판사’로 암묵적으로 분류된다. ‘민감한 사건’(권력이 관심을 가질 사건)을 법원이 곤란하지 않게 처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2009년에 허만 판사가 촛불집회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몰아주는 판단을 한 것은 정상적인 법원의 작동 방식이 아니다. 이럴 때 ‘믿을 만한 판사’가 누구인지를 미리 아는 딥코트의 작동 방식이다.

이 단계도 통과하면 다시 법원행정처도 한 직급 올려서 가고 재판연구관실도 부장연구관으로 가고 그러다가 수석부장도 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이면 이미 몇 단계를 거치며 딥코트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멤버이니, 신광렬 판사의 증언은 놀랍다고 보기 어렵다. 이쯤이면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당연히 받을 자리가 되고, 잘 풀리면 대법관도 노릴 수 있다. 좋은 판결이 아니라 좋은 멤버십이 법관의 커리어를 결정한다. 한국 사회가 명판결로 판사를 기억하는 사례가 드문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사법농단 사태로 공개된 법원행정처 문건 중에는, 딥코트의 작동 원리를 얼떨결에 드러내는 문건이 하나 있다. 2015년 9월17일자 보고서이고, 기조실이 썼다. 제목은 ‘민판연 관련 대응방안 검토’. 통신사인 〈뉴시스〉가 민판연을 비판하는 연속 기사를 쓰고, 대한변협이 민판연 비판 성명을 낼 때다. 여러 연구회 중 하나일 뿐인 민판연이 고민할 대응방안을 법원행정처가 이리저리 모색했다. 민판연이 곧 법원이라는 인식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반응인데, 물론 민판연은 법원이 아니다. 민판연은 딥코트였다. 보고서 작성 시점에서 민판연 소속 판사는 법원행정처에만 8명이 있었고 대법관 중에도 4명이 있었다.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이 되면서 탈퇴한 민판연 출신이다.

이 민판연 보고서를,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놓고 쓴 일련의 보고서와 비교해보자. 민판연 보고서는 위기대응 컨설팅 문건에 가깝다. 반면 국제인권법연구회 보고서는 일종의 공작 문건이다. 어떻게 연구회를 와해시키거나 위축시킬지를 놓고 모든 방안을 검토한다. 어떤 판사는 법원에는 속하지만 딥코트 소속은 아니다. 국제인권법연구회의 개혁 성향 판사들이 전형적으로 그랬다. 반대 사례도 있다. 어떤 법률가들은 판사가 아니지만 딥코트 소속이다.

“존경하고 친하게 지냈던 분이기 때문에 사적인 자리를 갖게 됐고 별생각 없이 그런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한상호. 강제징용 사건에서 일본 기업 측 대리를 맡은 김앤장 소속 변호사다. 판사 출신으로, 법원에 있을 때는 법원행정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도 법원행정처 근무와 민판연 활동을 같이 했다. 사법농단 사태에서도 최악의 사례인 강제징용 재판개입 의혹의 중요 등장인물이다. 그가 법정에서 증언한 말이다.

2015년 5월, 양승태 대법원장은 집무실에서 한상호 변호사를 직접 만난다. 당시는 강제징용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보내는 모의가 진행 중이었고, 그 경우 대법원장이 재판장이다. 소송의 한쪽 이해당사자가 대법원장을 직접 만나 “사적인 자리에서 별생각 없이” 정보를 나누었다. 한상호 변호사는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강제징용 사건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뒤집는 판결이다. 한일 관계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라는 취지의 말도 들었다. 전원합의체 재판장이 앞선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정보를 소송의 한쪽 당사자에게만 말했다. 이렇게 전관 변호사는 확장된 딥코트의 식구가 된다.

딥코트는 임종헌 전 차장과 같은 인물형에 최적의 토양을 제공한다. 조직에 충성하고, 상사의 지시를 열정적으로 수행하고, 무리수도 날리고, 부하직원을 상명하복에 묶어두고, 그렇게 해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인물형이 높은 곳까지 올라가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은 상하관계로 작동하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 조직이 무리수를 시도할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조직이 큰 출세를 선물로 안겨줄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해 보이지만, 셋 다 법원과는 잘 맞지 않는 조건이다. 법관은 개개인이 헌법기관으로 독립되어 있고, 법과 원칙에 구속되므로 무리수를 시도하기 어려우며, 출세를 포기하고도 존경받으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직업을 유지할 수 있다.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하는 딥코트의 작동방식을 얹어야만 ‘임종헌 스타일’이 번성 가능한 토양으로 바뀐다. 딥코트는 ‘임종헌 스타일’의 거의 모든 요소, 심지어 ‘KKSS’마저도 더 큰 출세로 돌려주는 경향이 있다. 임종헌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법원을 수렁으로 빠트린 게 아니다. 딥코트라는 독특한 구조가 임종헌 전 차장을 거기까지 끌어올렸고, 거의 대법관을 만들 뻔했다.

이제 우리는 딥코트가 무엇인지 총체적 그림을 얻었다. 딥코트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성골 판사 선발 시스템, 로열티를 증명하면 커리어를 끌어올려 주는 충성과 보상의 맞교환 체제, 조직도의 체계와 역할을 수시로 넘나드는 내부자 게임의 논리, 법원 판사 대부분을 배제하면서도 딥코트 출신 전관은 여전히 식구로 대접하는 부족주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에너지원인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을 핵심 특징으로 한다. 이 조합이 낳은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행정이 재판의 보조를 벗어나 재판에 침투하는 주객전도였다. 이제 사법농단 사태는 ‘임종헌 사태’라고 부를 수 없다. ‘딥코트 사태’가 더 나은 이름이다.

한국 법원의 근본 문제는 ‘사법부의 관료화’라고 규정되어왔다. 법관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이 근본 가치인 법원에, 법원행정처는 상명하복과 일사불란 원리를 들여왔다. 관료화는 이 문제를 잘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포착한 법원의 실상은 관료화의 문제를 넘어선다. 관료 조직은 조직도상 기능과 역할을 잘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자기 일만 해서 문제가 될 때가 많다. 딥코트는 그렇지 않다. 관료 조직 특유의 높은 칸막이가 없고, 경계선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작동한다. 그렇게 해서 딥코트는 법원을, 관료제의 부작용은 그대로 있으면서, 관료제보다 더 예측 불가능하고 더 침투에 취약한 그 무엇으로 만든다.

이 체제는 법원 내부를 가로지르고 외부까지 포괄하면서 단단하게 버티고 선 철옹성처럼 보였다. ‘박정희화’한 법원은, 독재정부가 만나는 역설과 같은 역설에 부딪힌다. 독재정부는 민주정부보다 여론의 눈치를 덜 보고 마음대로 통치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독재정부는 소수 반대파의 공격에 훨씬 더 취약하고 신경도 많이 쓴다. 이런 원리다. 민주주의는 반대파들이 제도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고층건물은 약간 흔들리도록 지어야 지진에 잘 버티듯, 민주정부는 약간씩 흔들리도록 설계된 체제라 잘 안 무너진다. 독재정부는 이게 안 된다.

독재자는 반대파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소수의 반대의견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어떤 소수의견이 거대한 반대의 물결을 촉발시킬지 알 수 없다. 독재정부가 사소해 보이는 공안 사건에도 온 역량을 기울이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독재정부는 이런 지나치게 민감한 탄압 때문에 작은 위기를 오히려 키우고 수습 불가능한 민심 이반으로 빠져들곤 한다.

양승태 대법원은 이 경로를 따라갔다. 이 시절은 “판사들이 숨도 못 쉬고 산다”는 말이 나올 만큼 반대의견이 강하게 제압된 시기였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의 1심 판결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정당성과 직결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무죄가 났다. 김동진 판사는 이를 “지록위마”라고 비판했다. 법원행정처 김연학 인사총괄심의관은 평소 알고 지내던 정신과 의사에게 본인 모르게 김 판사의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이 때 의사에게 김 판사가 조울증 치료제를 복용한 적 있다는 거짓 정보를 주었고, “정신과적 문제가 있어 보인다”라는 소견을 받았다. 이후 법원행정처가 김동진 판사를 물의 야기 법관 명단에 올릴 때도 조울증이 사유로 올라갔다. 여러 사법농단 사건 중에서도 특히 선을 넘었다고 손꼽히는 사례다.

ⓒ연합뉴스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5월20일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반대의견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 후에도, 양승태 대법원은 미약한 반대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법농단 문건 중에 이른바 ‘승포판’ ‘출포판’ 문건이 있었다. ‘승진(출세)을 포기한 판사’의 준말이다. ‘문제법관 시그널링 및 감독 방안’은 “승포판은 직무윤리의 문제”라면서 사법행정권을 발동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승진을 포기하는 게 왜 직무윤리 문제가 될까?

이탄희 판사와 임종헌 차장의 통화

“압박을 느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법관 평정은 깨진 것이겠지요.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인사에서 삼수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만 크게 고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소신을 지켜보자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박길성. 광주지법 행정1부 판사였다. 그는 통진당 지방의회 의원 사건을 맡고 있었다.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조한창 판사 외에도 박길성 판사와 접촉해 비슷하게 법원행정처 의견을 전달했다. 박 판사는 승진을 포기하니 소신을 지킬 수 있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승진과 출세야말로 딥코트를 작동시키는 핵심 원료다. ‘승포판’은 이렇게 딥코트를 고장 낸다.

좀 더 직접적인 저항은 ‘인사모’에서 나왔다. 인사모는 국제인권법학회에 속한 소모임으로,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의 준말이다. 2015년 7월21일에 판사 14명이 첫 모임을 꾸렸는데, 법원행정처는 8월19일에 첫 보고서를 쓰면서 민감하게 반응한다. 2017년 들어 인사모는 연세대에서 학술대회를 열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주제가 의미심장했다. 대법원 구성의 문제점, 법관 인사 이원화의 방향, 법관의 전보 및 사무분담 등이었다. 모두 법관 인사권 문제와 직결되는 주제였고, 딥코트의 뿌리를 건드리는 문제였다.

법원행정처는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인사모 회원 중 법원행정처 영향력이 닿는 판사를 움직여 학술대회를 취소시키려다 실패했다. 2017년 1월24일자 ‘인사모 관련 검토’ 문건은 정보기관의 공작 문건처럼 읽힌다. “주류 중의 주류” 법관들을 대거 탈퇴하도록 하여, “무언가 문제 있고 논란 있는 연구회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 “우리법연구회의 후신이라거나 정치적 편향이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부각될 경우 더 큰 동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썼다. 더 의미심장한 방안으로는, 기술적인 조치로 위장하여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를 실시하고 더 늦게 가입한 연구회를 탈퇴시킬 경우, 뒤늦게 생긴 인권법연구회는 “회원 수 50%가 급감하여 다른 커뮤니티에 비하여 현저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썼다. 판사 10여 명이 모인 소모임 하나를 잡자고 딥코트는 모든 시나리오를 총동원했다.

탄압 수위가 높아지면서 결국 사고가 터졌다. 양승태 대법원은 작은 위기를 키우는 독재정부의 역설을 고스란히 따라갔다. 2017년 2월, 이탄희 판사가 법원행정처 기획2심의관 발령을 받았다. 이 판사는 법원행정처에 출근했다가,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기조실 컴퓨터를 켜면 판사들 뒷조사한 파일이 나올 텐데, 좋은 취지에서 한 거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충격을 받은 이탄희 판사는 상황을 더 알아본 후, 자신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공작과 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그는 김민수 판사가 갔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그는 국제인권법연구회 멤버로, 선후배의 신망을 두루 받고 있었다. 그러면 딥코트는 특유의 동화시키는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평온하게 제 갈 길을 갔을지 모른다.

ⓒ시사IN 조남진사법농단 사태를 세상에 알린 이탄희 전 판사.

이탄희 판사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깨달은 순간, 그는 사표를 썼다. 법원행정처가 발칵 뒤집어졌고 그의 전화는 불이 났다. 임종헌 차장과 통화를 했다. 이 판사는 이렇게 물었다. “저를 데려올 때부터 연구회 관련 부수적 목적이 있지 않았나? 일석이조?” 임종헌 차장이 답했다. “그래!” 공고해 보이던 딥코트의 철옹성에 균열이 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 판사는 사직 의사를 밀어붙였다. 이후 수습책으로 사표와 법원행정처 발령이 동시에 철회되었지만, 이 기묘한 인사발령이 법원과 언론의 관심을 끌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판사 뒷조사 파일’이라는 소문이 법원 내에 퍼져 나갔다. 이후 1000일동안 예상보다 더 충격적인 사법농단 사태가 드러나서, 전직 대법원장이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는 등 헌정사에 기록될 수렁으로 굴러떨어진다.

딥코트는 ‘벌거벗은 임금님’이었다. 승진과 출세를 대가로 행정이 재판에 침투하는 거래를 다들 받아들일 때만 딥코트는 작동할 수 있었다. 딥코트는 그것을 꽤 오래 해냈다. 딥코트에 새로 초대받은 젊은 판사 한 명이 어쩌다 보니 원칙주의자였고, 재판 독립의 원칙을 진심으로 믿었고, 그걸 거래에 베팅하느니 일을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원칙과 현실은 반대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때로는 원칙이 현실을 바꾼다.

기자명 천관율·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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