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1971년 〈뉴욕 타임스〉는 미국이 베트남전 개입을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국방부 비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특종 보도했다. 당시 23세였던 로버트 로젠탈 CIR 이사(사진)는 이 특종 기사의 편집 보조였다. 이후 일생을 언론사 기자로 보냈다. 〈보스턴 글로브〉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을 거쳤다. ‘카피 보이’부터 탐사보도 기자, 아프리카 특파원, 편집국장과 이사까지 신문사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했다.

2008년 1월 그는 비영리 언론사인 CIR 대표를 맡았다. 당시 직원은 6명이었다. 세계 금융위기가 최악으로 치닫던 때였다. “우리는 잃을 것도 없다. 무엇이든지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협업과 멀티플랫폼 전략을 기반으로 하는 CIR만의 모델을 만들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에서는 해고됐다고 들었다.

1998년 처음 편집국장이었을 때, 연간 수익금이 2억5000만 달러였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비즈니스 모델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경영인들은 계속 같은 수준의 수익을 내길 원한다는 점이다. 유일한 방법은 감축이었다. 1년 사이에 기자 650명이 500명으로 줄었다. 그해 연말에 경영진에게 말했다. “더 이상은 안 된다”라고.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영진과 크게 싸웠다.

왜 비영리 언론사를 선택했는가?

상업 언론에 지쳐 있었다. 기존 비즈니스 모델은 붕괴하고 있는데,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늘 돈이 문제였다. 수익은 어떻게 낼 건지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전통적인 상업 언론사는 ‘병렬적 구조’로 되어 있다. 편집과 경영이 분절돼 있다. 편집은 경영에 동의하지 못하고, 경영은 저널리즘을 이해하지 못했다. 항상 서로를 싫어했다. CIR에서 대표직을 제안했을 때, 여기라면 공공 저널리즘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널리즘과 경영의 관점이 분리되지 않기를 바랐다. 수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익을 내서 저널리즘에 재투자하고 싶었다. 물론 CIR도 재원 마련은 끊임없는 숙제다. 그러나 적어도, 수익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는 자유롭다. 여기서는 저널리즘에만 집중할 수 있다.

CIR은 협업이 기본이다. 기억에 남는 협업 프로젝트가 있나?

 2007년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천시 베일리라는 기자가 출근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기자였다. 누가 그를 죽였고, 왜 죽였는지 모두가 궁금해했다. 신문사, 방송사, 라디오 매체에서 언론인 20여 명이 모였다. 단독 경쟁만 하던 기자들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첫 번째 회의에서 기자들은 취재와 보도 방식을 두고 논쟁했다. 누가 이 보도를 먼저 할 것인지를 두고도 내내 협상해야 했다. 그때 내가 “각자의 매체에 동시에 올리자”라고 말했다. 보도 당일 일간지,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이 동시에 누가 천시 베일리를 죽였나 보도했다. 갱 조직원이었던 살인자들을 붙잡았다. 범인 체포 이상으로 협업 성과에 모두 주목했다. 받지 못한 상은 퓰리처상뿐이었다. 당시에는 협업 프로젝트에 수상 자격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티플랫폼 전략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왔나?

소말리아 내전 때 미군 특수부대 이야기를 다룬 〈블랙호크다운〉이라는 영화를 봤나? 그 스토리가 처음 나온 곳이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였다. 1998년 당시 편집국장으로 있었다. 우리는 28일 동안 지면에 내전과 군인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했다. 동시에 웹사이트를 통해 실제 전쟁을 기록한 영상과 사진, 음성을 공개했다. 최초의 멀티플랫폼 전략이었다. 이후 책으로 발간되고, 영화로 제작되었다. 소셜미디어, 팟캐스트 등 기술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뉴스도 거기에 맞춰 달라져야 한다.

혐오나 차별 문제를 다루는 콘텐츠가 많다.

성별·인종·민족 등 다양한 구성원을 고용하려고 노력했다. 오랜 언론사 생활로 보건대, 다양한 시각과 관점이 조직에 중요한 가치다. 미국은 굉장히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된 나라지만, 언론계는 그렇지 않다. 사실 기자로서 많은 폭력 피해자와 이민자를 만난다. 나 같은 백인 남성보다는, 여성이나 생김새가 비슷한 기자에게 말을 꺼내놓기가 더 쉬울 것이다. 그래서 ‘펠로십’ 프로그램을 통해 유색인종 기자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백인 남성만 하는 보도가 아닌, 좀 더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싶었다.

기자명 에머리빌/글 김영화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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