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오늘은 승리했지만 내일이 불안하다
  • 홍콩/글 관춘호이(關鎭海·전 <빈과일보> <명보주간> 기자)·사진 장진영(사진가)
  • 호수 638
  • 승인 2019.12.0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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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구의회선거에서 범민주파는 친중파를 압도적으로 눌렀다. 친중 세력은 ‘대륙의 홍콩인 전자투표’와 ‘재외 홍콩인 투표’를 실시하려 한다. 이 방안이 실현되면 유권자가 1000만명 는다.
ⓒ장진영11월25일 경찰이 포위한 홍콩 이공대학 인근에서 시위를 하는 시민들.

홍콩 유권자들이 투표로 베이징 당국의 뺨을 때렸다. 11월24일 홍콩은 지난 38년간 진행된 역대 선거 가운데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홍콩 지방선거는 식민지 정부 시절인 1981년 처음 실시됐다). 이번 구의회선거 등록 유권자는 413만명으로 사실상 홍콩 내 모든 성인이 등록했으며, 투표율은 71.2%(총투표자 수 294만명)였다.

단순히 투표율만 높은 건 아니었다. 정치 지형을 바꾸었다. 각 구의회 총 479석 중 ‘범민주파’가 389석을 차지했고, 친중 세력으로 홍콩 지역정치를 주도해온 ‘건제파’는 308석에서 86석으로 쪼그라들며 소수파가 되어버렸다(무소속 4석). 범민주파는 홍콩 구의회 18개 중 17개를 장악해 의석수 81%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난 6월부터 이어져온 범죄인 인도법안(逃犯條例·송환법) 반대 시위 결과였다.

중국공산당 세력의 거점이자 건제파 정당인 공련회가 의회 주도권을 쥐고 있는 웡타이신에서도 건제파는 민주파에 25개 의석을 모두 빼앗겼다. 경찰 기숙사가 밀집한 웡타이신은 건제파의 텃밭이다. 공무원 중에서도 정부에 가장 충성하는 경찰이 많이 거주한다. “여기는 경찰 유권자가 너무 많아서 건제파를 이길 가능성이 없다”라던 지역이 민주파로 넘어가는 이변이 벌어졌다. ‘웡타이신의 기적’이다. 건제파는 또 다른 텃밭으로 분류되는 야우찜웡에서도 16석 중 13석을 잃었다. 상업지역으로 분류되는 야우찜웡은 상업 건물의 주소지를 이용해 ‘유령 신분’을 추가 등록하는 등 건제파 지지 세력의 꼼수가 벌어지는 대표 지역이었다.

거물급 건제파 정치인 대부분이 낙선했다. 윤롱(위안랑) 백색테러 의혹 핵심 인물인 무소속 허쥔야오(何君堯), 26년간 ‘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던 공련회 당주석 앨리스 막(麥美娟), 민건련 부당주석인 홀든 차우(周浩鼎) 의원이 낙선했다.

민건련은 송환법 개정을 주도한 세력으로 ‘악례(惡例)를 창시한 정당’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스태리 리(李慧琼) 민건련 당주석은 “이번 선거 결과가 송환법과 관련 있다고 보느냐”라는 기자 질문에 “패배에 대해선 아무런 핑계도 대고 싶지 않다”라고 답했다.

‘중국 정부 응원을 토대로 함께 홍콩을 건설하자’고 선거운동을 해온 건제파는 이번 선거를 통해 사실상 장악력을 잃었다. 홍콩의 각 상회나 동향회, 그리고 직업별 연합회 등은 건제파의 강력한 지지층이다. 건제파 후보가 그동안 이들에게 전화 한 통만 하면 지지와 동원이 가능했다. 이런 ‘단체 표’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첫 선거였다.

2020년 9월 입법회 선거와 2021년 행정장관 선거인단 구성까지 범민주파가 승리를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민주파의 선전은 1년 전만 해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2018년부터 있었던 몇 번의 구의회 재·보궐 선거는 모두 건제파 후보가 승리해왔다. 민주파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승리를 바란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송환법 반대 시위는 판을 바꿔버렸다. 71.2%라는 높은 투표율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동안 투표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정치 무관심층이 나섰기 때문이다.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단 한 번도 투표를 해본 적 없다는 한 중년 유권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타이완 이민 절차를 마무리했다. 지금의 홍콩은 내가 알던 홍콩이 아니다. 최근 반년 동안은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표를 던지고 싶었다.”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송환법 반대 시위는 중문대학과 홍콩 이공대학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선거 자체를 실시할 수 있을지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정치권 일각에서 들리는 소리는 달랐다. “건제파가 베이징 당국에 선거 결과를 예측해 보고했다고 들었다. ‘건제파와 민주파가 50대 50이 될 것 같다’고 했다더라. 중국이 선거를 예정대로 실시하고 싶다고 한 것으로 안다.”

이런 ‘소문’이 사실이었을까. 실제 선거운동 기간에 목격한 장면은 소문을 뒷받침했다. 야우마테이, 침사추이, 몽콕 등 건제파 정당 경민련(經民聯) 강세 지역에서 후보자들은 매우 자신만만했다. 이 지역 투표율은 70%를 넘지 못해 건제파는 개표 직전만 해도 이미 이긴 것처럼 들떠 있었다. 막상 투표함을 열어보니 승부는 민주파로 기울어 있었다.

ⓒ장진영구의회선거일인 11월24일 홍콩 시민들이 줄지어 서서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친중파의 해외 홍콩인 투표 방안

범민주파가 비교적 유리한 지역으로 분류된 지역구에서 건제파 후보들은 신중했다. 이들은 가가호호 방문해 지지를 호소했다. 건제파를 지지하는 지역 조직은 메신저 위챗을 통해 지지자 리스트를 공유하며 표심을 관리했다. “범민주파 후보들은 폭동에 참여했으며, 젊은이들을 선동해 폭력 행위를 한다”라는 흑색선전도 시도했다. 경찰과 학생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충돌을 벌이는 동안 대학을 중심으로 한 도심 역시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시위로 인해 크로스하버 터널도 한동안 폐쇄되면서 건제파는 ‘시민 불편’을 선거운동의 주요 이슈로 앞세웠다.

송환법 반대 시위로 인한 홍콩 시민의 분노는 이미 임계치를 넘어섰다. 젊은이들이 송환법 반대 시위 과정에서 사망했고, 경찰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경찰 폭력에 많은 시민들이 무력감을 느꼈다. 경찰은 이름이나 번호 등 인식표가 없는 옷을 입고 마스크를 착용한 채 시민들을 무차별 체포하거나 구타했지만, 이를 법적으로 규제할 방법이 없었다. 경찰 폭력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설립은 송환법 반대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주요 요구 사항 중 하나였다.

2015년 구의회선거 투표율은 47%였다. 당시 건제파는 76만 표를, 범민주파는 70만 표를 얻었다. 이번 선거에서 건제파 득표수는 120만 표로 지난 선거에 비해 57%를 더 얻었다. 다른 후보보다 한 표라도 더 받으면 당선되는 단순 다수대표제 제도상 의석수로는 범민주파가 앞섰다. 득표수만 놓고 보면 건제파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표를 얻었다. 시위가 확산되면서 건제파 유권자들도 결집한 것으로 해석된다. 앞으로 정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건제파가 다시 주도권을 쥘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범민주파는 167만 표로 지난 선거에 비해 무려 138% 많은 표를 얻었다. 건제파와 베이징 당국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번에 범민주파가 지난 선거보다 더 받은 약 90만 표는 정치적으로 각성한 중도층이 움직인 결과일 수도 있다. 동시에 상황에 따라 마음을 바꾸는 ‘스윙보터’일 수도 있다.

이번 선거에서 패배한 친중 진영은 미래의 표심을 어떻게 잡을까? 건제파가 지난해 입법회에 제출한 ‘대륙에 거주 중인 홍콩 유권자 전자투표 추진’ 건의안이 그 답이 될 수도 있다. 또 한 가지는 재외 홍콩인에게 투표할 수 있도록 한 해외 투표장 설치방안이다. 이 방안이 실시되면 투표 자격을 가질 수 있는 유권자 수가 1000만명 가까이 늘어난다. 이번 선거 결과가 2021년으로 예정된 행정장관 선거인단 구성까지 위협하는 상황에서 해외 홍콩인이 투표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장진영11월18일 홍콩 이공대학에 갇힌 시위대를 구출하려던 시민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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