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지난해 5월29일 대법원에 진입해 농성을 벌이던 KTX 해고 여승무원이 로비에 걸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초상화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정말 이런 법원이어도 괜찮습니까.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하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가 불거지고 1000일이 흘렀습니다. 2017년 3월6일 〈경향신문〉은 이탄희 판사(현 변호사)가 법원행정처로 발령을 받았다가 부당한 지시를 받고 사표를 썼다는 기사를 냈습니다. 이후 법원행정처에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양승태 대법원이 박근혜 청와대와 거래하기 위해 재판에 개입한 정황도 여럿 드러났습니다. 소송 동료 세 명을 먼저 보내고 혼자 결과를 기다리던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 대법원 판결 여파로 동료의 죽음을 겪어야 했던 KTX 여승무원 등, 당사자들에게는 온 삶이 걸린 재판입니다. 그런 재판이 양승태 대법원의 좌판에 흥정거리로 쭉 깔렸던 겁니다.

1000일 동안 한국 사회는, 법원이 스스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지켜봤습니다. 결과는 다들 확인한 대로입니다. 해법은 고사하고 진단부터 후퇴를 거듭한 1000일이었지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농단 사태의 핵심 인물들은 재판에서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법원 내부 기류도 많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경력이 긴 법관들은 “법원행정처가 늘 해오던 일을 하던 와중에, 임종헌 등 몇몇이 ‘오버’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버한 몇몇’만 내보내고 ‘선’만 넘지 않도록 하면 이대로도 큰 문제는 없다는 얘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법농단 사태의 본질이 ‘유난히 권위적인 양승태’와 ‘과잉 충성하는 임종헌’ 둘로 설명될까요. 일련의 사태에서 우리는 까다롭고 근본적인 질문의 꾸러미를 받아들었습니다. 판사들이 재판을 거래 대상으로 쓰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판사도 감시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판사를 감시하는 외부(청와대든 국회든)의 힘이 지나치게 세면, 이들의 입맛대로 재판이 휘둘릴 수 있습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재판 독립은 헌법정신입니다. 동시에, 재판은 사람 목숨까지 거둘 수 있는 권력입니다. 모든 권력은 견제와 균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 역시 헌법정신입니다. ‘재판 독립의 원리’와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본질상 충돌합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사법농단의 주역은 법원행정처였습니다. 법원행정처는 이 딜레마를 그럭저럭 다뤄내는 조직처럼 보였습니다. 국회나 청와대가 재판에 침투하려는 시도를 들어주는 척 흘려내면서, 한편으로 입법이나 예산 등 법원이 필요한 자원을 따내오는 기구로 보였습니다. “법원행정처 구조가 이상적이라고는 못해도 필요악은 된다”라는 정서가 법원 내에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가 큽니다. 그런데 이 법원행정처가 사법농단의 엔진이었습니다. 이제 이 모델은 폐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요?

그러니까 사법농단이란 사법부가 가진 구조적 딜레마가 극적으로 뒤틀려 분출한 사건이었습니다. “나쁜 놈들이 나쁜 짓을 했으니까 나쁜 놈들을 몰아내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으로는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정말 이런 법원이어도 괜찮습니까. 우리의 답이 ‘아니다’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이런 법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작업입니다.

헌법은 권력을 다루는 계약서입니다. 헌법의 세계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권력은 위험한 물건이니까, 그 누구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는 서로 다른 권력을 가짐으로써,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헌법의 세계는 기대합니다. 입법·행정·사법의 핵심 인물들이 서로 결탁하고 거래하면서 각자 원하는 것을 가져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이것은 ‘내부자들’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거래와 흥정의 원리로 작동합니다. 각자가 가진 권력은 서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데 쓰입니다. 이런 것을 정치학에서는 ‘딥스테이트(Deep State)’라고 부릅니다. 헌법의 세계보다 깊숙한 곳에 내부자들의 세계가 있고, 그게 실제로 나라를 움직입니다.

사법농단은 헌법의 세계가 내부자들의 세계로 미끄러진 사건입니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거래와 흥정의 원리로 대체된 사건입니다. 〈시사IN〉은 3회에 걸쳐 이 미끄러짐을 다룹니다. 1부는 여러 권력기관을 넘나드는 내부자들의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법원이 인권과 법치를 보호하는 사법기구가 아니라, 조직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자원을 베팅하는 관료기구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을 베팅하고 행정안전부가 티오(TO·공무원 정원)를 베팅하듯 법원은 재판을 베팅합니다.

2부는 관료적 내부 정치의 한 플레이어인 법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룹니다. 블랙박스라고 할 수 있는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법원의 내부자들’이 작동하는 방식이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이들은 법원 안의 법원이었습니다. 딥스테이트의 부속이었으니 ‘딥코트(Deep Court)’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효율적이고 강고해 보이던 이 딥코트가 실제로 얼마나 취약하고 허망한지도 2부에서 드러납니다. 딥코트는 몇 명 되지도 않는 법원 내 소모임에 과민 반응하다가 판사 사찰에 손을 댔고, 그에 항의하는 젊은 판사 한 명의 문제 제기로 속살을 다 드러내야 했습니다.

3부는 내부자들의 세계를 다시 헌법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다룹니다. 그러려면 ‘재판독립의 원리’와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충돌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부자들의 세계는 이것을 얼버무릴 수 있었지만, 그래서 내부자들의 세계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법관도 많았지만, 헌법의 세계로 가려면 이 딜레마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어렵고 답 없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룰 준비가 될 때, 우리는 사법농단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자명 천관율·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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