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프랑스 번역자의 바람
  • 파리·피에르 비슈 (출판사 마탱캄(Matin Calme) 대표)
  • 호수 637
  • 승인 2019.12.03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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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그림

〈82년생 김지영〉은 현재까지 미국·영국·프랑스·독일·중국·타이 등 17개국 수출을 확정지었다. 한국에서는 책이든, 영화든 마치 ‘젠더 갈등’의 대명사처럼 논의되고 있지만 〈시사IN〉은 이 책이 한국을 넘어 동아시아, 그보다 넓은 세계 각국 여성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다분히 한국적 상황으로 읽을 수도 있는 〈82년생 김지영〉이 가진 보편성과 힘은 무엇일까. 번역자들은 어떤 계기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됐을까. 또 번역자 이전에 독자로서 어떤 점이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내년 초 출간을 앞둔 영문판과 프랑스어판 번역가 두 명이 글을 보내왔다.
‘김지영’과 동갑내기인 영문 번역자 제이미 챙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강사는 김지영을 이해하는 순간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남성인 프랑스어 번역자 피에르 비슈는 〈82년생 김지영〉이 한국 사회를 비추지만 동시에 프랑스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나는 여자가 아니다. 나는 한국인도 아니다. ‘그런데 왜?’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왜 나는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심지어 프랑스 독자들을 위해 번역했을까.

옛날이야기부터 해야겠다. 기원전 180년쯤, 리비아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로마에 노예로 팔렸다. 몇 년 뒤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방된다. 이후 그리스 극장을 바탕으로 희극을 쓰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테렌티우스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에 관계되는 것 가운데 나와 관계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 나는 이 말을 나를 포함한 우리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어야 할 이유 중 첫 번째로 꼽고 싶다.

소설은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낯선 존재를 우리 앞에 드러낸다. 김지영은 우리 가운데 어디에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불충분한 이해 탓에 거의 ‘신화’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잊힌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일부 과학자와 작가들은 여성에 관해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난다. 이제 당신은 여성의 삶, 여성의 장소, 여성의 권리에 대해 조금만 노력하면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이런 목소리 중 하나로, 대표적인 책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소설을 처음 들은 건 2016년이었다. 번역가인 내 친구 최경란이 조남주 작가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당시만 해도 이 책은 아직 ‘문학적 사건’을 일으킨 건 아니었다. 눈 밝은 최경란은 내게 프랑스에서 출판하자고 제안했고, 나 역시 판권을 사려고 노력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에이전트를 만났을 때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한국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독일까지 오는 동안 책은 수십만 권이 팔렸고, 판권 가격도 올라 있었다. 아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 ‘닐’에서 판권을 샀다는 소식을 들었다. 닐은 1941년 세워진 프랑스 대표 출판사 ‘로베르 라퐁’의 임프린트로 문학과 인문 분야의 책을 주로 낸다.

몇 주일 뒤 나는 놀라운 제안을 받았다. 닐에서 나와 최경란에게 〈82년생 김지영〉을 번역할 수 있는지 물어왔다. 당연히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드디어 〈82년생 김지영〉의 글자와 단어 하나하나를, 한 문장 한 문장을 완벽하고도 완전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여성에 관한 글, 특히 그 책을 여성이 썼다고 하면 남성 독자가 보여주는 첫 반응은 대개 거부감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좋아, 한국 여성들의 삶은 끔찍하군. 프랑스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 그런가? 나는 차라리 ‘환상’과 ‘거짓말’을 선택하고 싶었던 것 같다. 프랑스 상황 역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로는 더 낫겠지만 때로는 더 나쁠 가능성이 높다. ‘동등하게’ 나쁘다고 할 수 있다.

〈82년생 김지영〉이 묘사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수많은 디테일 중에서도 김지영의 학교생활 부분을 읽는 동안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다. 조남주 작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김지영씨의 주민등록번호를 묘사한다. 한국 남성의 주민등록번호는 ‘1’로 시작한다. 김지영의 엄마, 아내, 여자친구, 자매는 어떤가. 우리는 쉽게 ‘레이디 퍼스트’를 말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여성은 언제나 두 번째다. 나는 이 부분이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조남주 작가는 김지영이 여성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항상 ‘2순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김지영의 어린 시절, 혹은 그의 가족 안에서 모든 것은 남동생 위주로 돌아가며 두 자매는 남동생을 쫓아갈 뿐이다. 학교에서도, 대학에서도, 취업을 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우리는 솔직하게 ‘맨 퍼스트’라고 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현재까지 미국·영국·프랑스·독일·중국·타이 등 17개국 수출을 확정지었다.

나는 사회학자가 아니며 성평등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독자로서, 번역가로서, 남성으로서 내 감정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82년생 김지영〉은 단지 여성의 삶을 묘사하는 소설일 뿐이다. 조남주 작가는 혁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어떻게 ‘반노예’ 상태로 고통받고 있는지 지적한다. 고통으로 인해 ‘미친’ 김지영을 통해 이미 죽은 할머니, 그리고 엄마 같은 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낸다. 그렇게 김지영은 그 자체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되었다. 남성들은 김지영을 미쳤다고 판단하지만, 김지영은 미친 게 아니라 괴로워하고 있다.

‘프랑스 가족·학교·기업에서도 마찬가지’

책을 읽는 동안 조남주 작가의 메시지가 매우 간단하고 보편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늘날 우리는 이 불평등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도전은 때로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조남주 작가의 글은 그런 점에서 선명하다. 극적일 필요도,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 필요도 없으며, 그저 모든 것이 김지영의 일상 속에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에 번역하는 동안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보여주는 통계 부분은 좀 더 엄밀하게 확인했다.

책 속의 몇몇 문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프랑스 대중을 당황하게 할 것이다. 이는 저자의 의지이며 우리는 프랑스어로도 같은 방식으로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저자의 명료한 메시지를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역자 각주도 최소화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메시지가 단어보다 중요함을 이해할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페미니즘은 뉴스의 핵심이다. 성평등, 미투 물결, 페미사이드(남성 배우자 등에 의한 여성 살해)는 물론이고 가사노동 불균형과 관련해서도 단순히 물리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정신적 가사노동(Charge mentale ménagère)까지 논의되고 있다.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이 모든 질문은 정치, 문화, 소셜미디어는 물론 레거시 미디어에도 매일 등장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오늘날 프랑스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논의하는 주제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이 같은 논쟁에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소설은 우리가 몰랐던 여성들 삶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 그동안 드리워 있었던 검은 커튼을 살짝 열어보기만 하면 된다. 이 소설은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번역가로서 이 소설이 프랑스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확인했고, 이 거울을 통해 프랑스 독자를 긴장시키고 싶다. ‘보세요, 이것은 한국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프랑스의 가족, 학교, 기업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제 페미니즘 문제를 피해갈 수 없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한국 여성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일하는 편집자이며 프랑스어 번역가이다. 내게는 아홉 살짜리 딸이 있다. 나는 내 딸 줄리 비슈가 새로운 이야기, 그만의 이야기, 그 자신의 버전인 〈2010년생 줄리 비슈〉를 썼으면 한다. 내 딸은 분명 평등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우리는 아직 평등에 이르지 못했다. 조남주 작가의 책을 어디에서든 읽고 지금 당장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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