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이유가 없다고 장담했다. 마감 날마다 성을 내서 감정도 메말랐다. 삭막한 40대 남자가 영화 보며 울겠느냐고, 그럴 턱이 없다고 후배에게 큰소리쳤다. 후배는 자신했다. “엄마가 지영아, 지영아, 지영아라고 부르는 대목에서 분명 울 겁니다.” 문제의 그 장면, 혼자 보기를 잘했다. 정확히 눈물이 터졌다. 할머니와 엄마, 딸로 이어지는 스산한 삶이 응축된 장면이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책으로 읽을 때와 또 달랐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다시 읽으며 ‘40대 남자로서 가진 특권’을 재발견했다. 김지혜 교수(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는 〈선량한 차별주의자〉(2019)에서 특권을 ‘가진 자로서의 여유’로 정의한다. 특권을 누리는 이들은 특권이라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책에는 미국 웨슬리 대학의 페기 매킨토시 교수가 경험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는 페미니즘 세미나에 참가한 남성 동료 교수들이 자신들이 가진 특권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을 목격한다. 여기서 착안해 매킨토시는 ‘백인 특권’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이후 많은 이들이 계층·문화·이성애자 체크리스트 등을 업데이트한다. 나도 한국 남성 특권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보았다.

□나는 화장실 갈 때 몰카를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운전을 잘 못해도 다른 운전자한테 ‘김 여사’라는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밤에 공공장소를 걸어도 무섭지 않다.
□내가 승진이 안 되는 건 성별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아이와 카페에서 떠들면 ‘맘충’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다. 대신 자상한 아빠라는 말을 듣는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내가 알게 모르게 누리는 특권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임지영 기자가 이번 호 커버스토리에서 김지영 현상을 분석했다. 임 기자가 명명한 대로 〈82년 김지영〉은 ‘페미니즘 감별 도구’가 되었다. 소설은 이제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를 넘어 세계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82년 김지영〉이 일본에서 일으킨 한국문학의 인기, 그리고 영어판과 프랑스어판 번역가의 글도 담았다.

공부하기 위해 잠시 떠났던 신호철 전 기자가 이번 호에 편집위원으로 복귀했다. 신 편집위원은 2003년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윤 아무개씨를 옥중 인터뷰해 기사를 썼다. 윤씨의 억울함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 16년 만에 신 편집위원이 윤씨를 다시 인터뷰했다. 윤씨가 쓴 육필 소감문 사진을 크게 실었다. 그의 글은 어머니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신호철 위원은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이 어떻게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었는지 계속 추적할 계획이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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