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일 그림

용서는 하되 잘못은 잊지 말자고 말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상에서 용서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내가 속한 집단 전체를 향한 범죄이거나 살육일 때 더 그렇다. 개인적으로 내가 용서하고 싶다고 해도 내가 무슨 자격으로 용서를 하고, 그는 무슨 자격으로 용서를 받을 것인가.

유대인 수용소의 생존자이자 나치 전범 1100여 명을 추적해 심판대에 세운, ‘나치 헌터’로 유명한 시몬 비젠탈이 세계에 던진 질문이다. 그는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시 유럽의 여느 유대인들처럼 강제수용소에 갇혀 노역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어느 날 수용소 바깥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에 노역을 나갔다가 죽어가는 나치 장교 카를을 만난다.

죽음을 앞둔 나치 장교는 간절히 ‘유대인 한 명’을 만나기 원했다. 카를은 자기가 저지른 죄를 속죄하고 ‘유대인’한테 용서받고 싶어 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시몬은 침묵으로 그의 요청을 거절한다. 시몬은 이 이야기를 담은 〈해바라기〉라는 글을 통해 세계에 질문한다. 당신이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의 질문에 세계의 석학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답변을 모은 책이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이다.

시몬 비젠탈은 강제노역을 하러 수용소 바깥으로 나갔다가 군인들의 무덤가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를 본다. 무덤가마다 해바라기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시몬은 자신의 죽음에는 해바라기 한 그루마저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깨닫는다. 나치의 군인들은 죽어서도 해바라기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지만 자신과 같은 수용소의 유대인은 구덩이에 던져질 뿐이다.

해바라기가 상징하는 것은 존재의 개별성이다. 우리 모두는 개별자로 존재한다. 유대인이든, 여성이든, 성소수자이든, 장애인이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름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다. 비록 아무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무덤마다 놓인 꽃 한 송이는 세상이 나를 개별자로 대해준다는 의미다. 개별자로서의 존재에 대한 존엄이다. 존재의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성을 인정하는 게 존엄이다. 그러하기에 세상에 둘도 없는 우리는 바로 그 이유로 눈부시게 아름답고 빛난다. 이게 존엄이며 존엄의 아름다움이다.

유대인들은 나치에게 존재의 개별성을 박탈당했다. ‘유대인 1’ ‘유대인 2’ ‘유대인 3’ 등 그저 유대인일 뿐이다. 죽이고 죽여도 끝없이 나타나고 발견되는 유대인일 뿐이다. 유대인들은 그저 ‘덩어리’로만 존재할 뿐이다. 세상과 개별자로서 연결되지 않고 세계로부터 덩어리로 격리되었고 격리되어야 했다. 수용소에서부터 게토에 이르기까지 이 존재들은 존엄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없었다.

해바라기를 보고 난 다음 시몬의 내부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해바라기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죽음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죽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언제, 어떻게 죽느냐는 전적으로 나치에 달려 있었다.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해바라기를 보고 난 이후 그는 다시 한번 더 그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덩어리가 아닌 개별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의지, 즉 삶에 대한 의지가 생긴 것이다.

나치 장교가 용서를 청하는 데 실패한 까닭

개별성이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용서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고,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가? 시몬에게 용서를 청한 나치 장교는 유대인들의 학살 현장에 많이 참여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안다. 그는 유대인에게 사과하고 용서받기를 원한다. 간호사를 통해 시몬을 불러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용서받기를 원한다. 이 경우 유대인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나치 장교는 누구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가? 나치들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유대인 시몬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가?

‘누가 누구에게’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용서를 청하는 행위는 또 다른 잘못이 된다. 그냥 잘못도 아니고 나치와 유대인 사이의 착취적 관계를 다시 한번 생산하는 범죄가 된다. 나치는 개별자로 존재하며 용서를 청할 때조차 자기 이름을 가진 해바라기를 갖게 되지만, 유대인은 ‘덩어리’로 여겨진다. 시몬의 질문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응답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나치 장교인 카를은 용서를 청하기 위해 유대인 ‘한 명’을 필요로 한다. 그 ‘한 명’은 시몬일 수도 있고, 유다일 수도 있고, 예수일 수도 있다. 아무라도 상관없다. 그가 유대인을 누구로서 죽인 게 아니라 그저 유대인이라서 죽인 것처럼 그가 용서를 청하는 존재 역시 그저 유대인이면 된다. 죽는 순간까지 나치 장교는 자기 무덤가에 해바라기 한 그루를 바랐다.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존재인 시몬을 통해서 말이다.

나치 장교 카를이 용서를 청해야 하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 그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그가 죽인 사람들, 그로 인해 죽음의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었거나, 설혹 살아 있어도 그들이 누군지 카를이 알 방법은 없다.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카를은 움직일 수 없기에 그들을 안다고 해도 만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몇몇 세계 석학의 답처럼 그가 용서를 청할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신’뿐이다. 그는 대답 없는 신과의 대면에서 용서받기를 청하며 침묵해야 한다.

그가 시몬을 불러(사실 이조차 어불성설이지만) 굳이 용서를 청한다면, 시몬이 당한 고통에 대해 나치 장교로서, 독일인으로서 용서를 청해야 했다. 시몬 앞에서 나치 장교인 카를로서 저지른 죄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아니라 유대인 시몬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시몬의 이야기를 들어야지 나치 장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유대인이 겪었지만 시몬이 겪은 고통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고 독일인으로서 그 고통에 대해 용서를 청해야 한다. 유대인에게 저지른 죄가 아닌 시몬이 겪은 고통에 대해 그 고통의 공범인 독일인 혹은 나치 장교로서 말이다. 세계와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카를의 고통이 아닌 시몬의 고통이다.

용서받기 바라는 나치 장교 카를은 카를로서도, 나치 장교로서도 용서를 청하는 데 실패했다. 용서는 간절함과 진정성의 문제가 아니다. 나와 그가 어떤 관계이며,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 무엇으로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다. 관계를 보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자는 또 한 번 상대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꼴이다.

그는 시몬을 오로지 듣는 존재, 듣기만 하고 용서를 하는 존재, 즉 ‘신’으로 만들었다. 이 신이야말로 얼마나 전능하며 동시에 무력한 존재인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나치 장교와 그 죄를 용서받으려고 청하는 카를은 데칼코마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단절이 아니라 연속인 셈이다.

시몬이 바란 것은 해바라기다. 무덤 형태가 다 똑같고 비슷해도 각자 무덤이 있어야 해바라기를 심을 수 있다. 용서 이전에 구덩이에서 유대인들을 건져내어 그 각각의 사람에게 무덤을 돌려주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해바라기 한 그루씩 심어야 한다. 과거사의 진실·화해에서 유골을 발굴하고 고향으로, 즉 각자의 무덤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카를의 일이 시몬의 일보다 앞설 수 없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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