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대자보 찢는 ‘중국산 민주주의’
  • 이상원 기자
  • 호수 637
  • 승인 2019.12.03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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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들이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붙이면 중국 유학생이 이를 훼손하는 등 양국 학생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댓글 토론’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타협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시사IN 이명익한양대 학생들의 ‘홍콩 시위 지지’ 대자보에 중국 학생들이 반대 의견을 쓴 포스트잇을 붙였다.

홍콩 시위의 여파가 국내 대학가로 번졌다. 계기는 대부분 대자보다. 한국 학생들이 ‘홍콩 민중과 연대하겠다’는 대자보를 붙이면 중국인 유학생들이 이를 훼손하려 한다. 양국 학생들이 대자보를 놓고 대치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서로 욕설을 주고받고, 몸싸움도 일어난다. 학생들은 스마트폰으로 상황을 찍었다. 소셜미디어로 공유된 영상을 보고 양국 누리꾼들이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6월께부터 홍콩 출신 유학생들은 대자보를 붙이곤 했다. 홍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리고 한국 시민들의 연대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11월 들어 불거진 ‘대자보 갈등’은 주로 한국 학생들과 중국 유학생 사이에 일어났다.

어느 한 대학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빈번하게 벌어지는 사건이다. 11월11일 고려대에서 홍콩 시위 지지 대자보가 찢긴 채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다음 날 연세대에서는 중국 학생들이 ‘Free Hong Kong’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무단 철거했다. 서울대, 동국대, 숭실대, 세종대, 한국외대, 홍익대 등 많은 학교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벌어졌다. 전남대와 충남대, 부산대 등 지방 소재 대학에서 일어난 사건도 다르지 않았다. 급기야 명지대에서는 학생 간 몸싸움이 벌어져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한국외대를 비롯한 몇몇 대학은 대학본부가 먼저 시위 관련 대자보들을 철거했다. 학생들은 ‘중국 학생 눈치를 본다’며 대학 당국을 비판했다.

온라인 공간에서 사태는 더 험악하게 번졌다. 일부 중국인 유학생들이 중국 SNS에 영상과 사진을 올렸다. “한국 학생에게 맞았다” “단체로 욕을 했다”라는 주장이다. 홍콩 시위에 대한 의견보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비방으로 논점이 넘어갔다. 중국 누리꾼들은 “반으로 갈라진 작은 나라” “미국 식민지” 운운하고, 영상 속 한국인의 외모를 조롱했다. 한국 학생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각 대학 인터넷 커뮤니티에 경험담을 올렸다. 대자보를 떼려는 중국 학생들이 단체로 욕을 하며 밀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착짱죽짱(착한 짱깨는 죽은 짱깨뿐이다)”과 같은 부류의 댓글이 달리곤 한다.

여론이 ‘혐중’으로 흐르자 대자보 작성을 주도했던 그룹에서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홍콩의 진실을 알리는 학생모임’과 ‘노동자 연대 학생그룹’ 등 학생 단체들은 11월19일 주한 중국 대사관 앞에서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최근 대자보를 쓴 각 학교 학생들 중에는 이들 단체 소속이 많다. 이날 기자회견은 중국 정부와 홍콩 경찰의 시위 탄압을 규탄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고려대 대자보를 썼다고 밝힌 한 학생은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비판하는 것은 중국 정부이지 모든 중국인이 아니다. 일부 중국 유학생이 대자보를 훼손하고 욕설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된 근본적 원인은 중국 정부에 있다. 그런 행동을 애국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1월18일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유학생들의 한국 내 대자보 훼손에 대한 질문을 받고 “국가를 분열시키고 중국 이미지를 흐리는 언행에 분노와 반대를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해외 중국 국민들이 이성적으로 애국 열정을 표현하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데 주의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대학 내에서 만난 중국 유학생들은 대부분 날이 서 있었다. 한 유학생은 “중국 안의 일인데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에서 이상한 뉴스가 나온다. 홍콩 시위는 폭력 사태다”라고 말했다. 중국 언론의 보도사진을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한국 언론의 취재를 불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양대에서 만난 한 중국인 대학원생에게 조금 더 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양대는 여러 학교 가운데 특히 갈등이 격화된 곳이다. 11월11일 이 학교 인문과학관 건물 입구에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가 붙자 이틀 뒤 저녁 중국인 유학생 50~60명이 몰려와 대자보를 떼어내려 했다. 교내 경비가 이들을 제지하자 이들은 해산했다. 다만 대자보 주위에 누런 테이프로 ‘홍콩 독립 절대 반대’ ‘One China’ 따위 문구가 적힌 종이를 붙였다.

기자가 만난, 한양대에 다니는 중국인 대학원생은 상대적으로 타협적인 축에 속했다. 그를 비롯한 일부 중국인 유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의 대자보를 훼손하는 대신 새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홍콩 독립’이고, 홍콩 시위대가 요구하는 ‘5대 요구사항’에는 독립이 없으며, 오히려 ‘일국양제’에 부합한다는 내용이다. 대자보 훼손 행위에 반대한다고도 적었다. 이 대학원생은 대자보를 찢거나 떼는 것뿐만 아니라 포스트잇에 “심각한 말(욕설)을 써서 붙이는 것도 불법적이고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토론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만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이 대자보를 쓴 뒤 중국 유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이자 여기에 쪽지를 붙이는 형태의 ‘댓글 토론’이 벌어졌다. 이어 홍콩 학생들이 새 대자보를 붙이고, 다시 중국 학생들이 반박 대자보를 붙였다. 한양대 한 교수는 일련의 과정이 “일종의 민주주의 학습”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대자보를 붙인 중국인 유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 학생들과는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어 보였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홍콩 시위는 민주화 투쟁이 아니라 폭력 사태이다. “시위대가 사람을 때리고, 불태우고, 물건을 파괴”한다. 한국 뉴스가 실제 홍콩 상황을 보여주지 않아서, 홍콩 사람들의 주장만 듣고 시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가짜 뉴스가 대자보를 매개로 대학가에 유통된다는 주장이다. 홍콩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중국 유학생들은 어떻게 ‘진실’을 아는지 물었다. “웨이보(新浪微博, 중국판 트위터)에 중국 언론 뉴스가 많이 나와서 안 가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라고 답이 돌아왔다. ‘톈안먼 사건’과 같은 민감한 검색어를 검열해 악명 높은 웨이보를 정론의 표상으로 삼는다.

“홍콩 시위에 찬성하는 한양대 학생의 사진이 웨이보에서 떠돈다”라고 말하자 한 중국인 유학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중국) 학생들이 (시위 지지 학생들과) 직접 싸우지는 못해서 그냥 그 사람 얼굴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것이다.”

정부 기능에 대한 생각도 눈여겨볼 만하다. 대학가의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지 않은 게 이상하다며 국가가 학교를 특수한 공간으로 여겨 자율을 보장했다고 중국 유학생들은 생각했다. 이들은 ‘배후세력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사람들 뒤에는 각국 정치인이 있다고 했다.

서로를 두려워하는 학생들

‘홍콩 시위의 진실’만 갈등의 원인이 아니다. 사실 자체를 넘어, 세계관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중국 언론만 진실을 보도한다’ ‘개인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도 문제가 없다’ 따위다. 특히 중국인 유학생들 대부분은 “폭력을 쓰는 시위가 어떻게 민주주의인가?”라는 말이 매우 강력한 논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대자보에서는 ‘폭력≠민주주의’라고 적힌 쪽지를 다수 볼 수 있었다. 11월12일 ‘고려대 중국 유학생모임’ 명의로 고려대와 한양대, 숭실대 등에 붙은 홍콩 시위 반대 대자보 역시 제목이 ‘민주인가 폭행인가?’이다. 대자보 앞에 선 중국인이 태블릿 PC로 홍콩 시위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영상도 웨이보에서 인기를 끌었다.

상대방을 각각 “세뇌됐다” “아무것도 모른다”며 비웃는 한국과 중국 학생들은 다른 한편으로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국 학생들은 특히 중국의 SNS 신상털이가 께름칙한 듯 보였다. 중국 학생들은 이유야 어쨌든 자신들이 전 세계에서 고립되고 있다고 인지하는 듯했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주장을 확신했지만 “싸움이 나면 유학생은 바로 중국으로 가야 하니까” “(갈등이 벌어져도) 한국인이 중국인보다 더 많아서” 같은 이유로 불안해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대자보 대화가 정말 토론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형광색 포스트잇이 만발한 교정은 스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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