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권순갑씨(사진)는 “김경숙씨는 노조 대의원으로서 책임감이 강했다”라고 말한다.

“보고 싶은 엄마! (중략)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돈 많은 회장은 미국으로 도망가서 없고 사장들은 자기들만 잘살겠다며 지금 우리 근로자들을 버렸습니다. 회사 문을 닫겠다며 폐업 공고까지 내버렸답니다. 그러나 저희 근로자들은 비록 힘은 약하나 하나같이 똘똘 뭉쳐 투쟁하고 있습니다. (중략) 준곤이는 이 누나가 대학까지 공부를 가르쳐주겠다고 엄마가 대신 말 잘 해주세요. 이 누나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회사가 정상화되면 꼭 찾아뵐게요. (중략) 1979년 8월7일 서울에서 경숙 올림.”

1979년 8월11일 새벽 2시께, 당시 국내 대표적인 섬유 가발 업체였던 YH무역 노동자 김경숙(당시 21세)은 경찰 진압 과정에서 서울 마포에 있던 신민당사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사흘 전 엄마에게 쓴 편지에서 ‘회사가 정상화되면 찾아뵙겠다’고 한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경숙을 포함한 YH무역 여성 노동자 172명은 8월9일 아침 신민당사로 찾아가 생존권을 보장해달라고 호소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이들 앞에 나서서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당사를 찾아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배후 불순분자의 사주로 몰아붙였다. 신민당사 농성 사흘째인 8월11일 새벽 노조 대의원이던 김경숙은 잠시 눈을 붙인 동료들을 위해 불침번을 맡아 옥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 순간 무장 경찰 1000여 명이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은 옥상에서 추락했다. 경찰은 당사에 난입해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하고 신민당 당직자들과 기자들도 구타했다. 이날 당사에 머물다가 경찰에 붙잡힌 김영삼 총재는 상도동 자택에 강제로 격리당했다. 진압작전은 채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경찰은 추락사한 김경숙의 사인을 ‘경찰 진압과 무관하게 스스로 동맥을 절단한 후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종말을 예고했다. 박정희 정권은 YH 사건을 빌미로 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가처분이 기각되자 김 총재의 외신기자 인터뷰를 걸고넘어졌다. 김 총재는 9월16일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하며 미국에 박정희 독재정권 지지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박 정권과 공화당은 10월4일 국회에서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처리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전원 의원직 총사퇴로 맞섰다. 10월16일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독재 타도를 요구하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다. 정부는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해 유혈 진압했다. 10·26 사건으로 18년에 걸친 박정희 철권통치는 막을 내렸다.

김경숙은 그날 이후 잊혀갔다. 경찰은 딸의 비보를 듣고 서울로 올라오던 김경숙의 어머니와 동생을 수원의 한 여관에 붙잡아놓은 뒤 친척을 종용해 서둘러 시신을 화장 처리했다. 동료가 죽은 줄도 모르고 경찰에 연행된 여성 노동자 중 지도부 4명은 구속기소되었다. 나머지는 유치장에서 구류를 산 뒤 전국 각지 고향으로 뿔뿔이 강제 격리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들의 부모에게 “딸이 북괴 간첩이 되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YH 노조 최순영 지부장(전 민주노동당 의원)과 함께 부지부장을 맡아 신민당사 농성 투쟁을 주도했던 권순갑 동방기획 대표(64)는 말했다. “우리는 그때 무서울 게 없었다. 배고파 죽겠는데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 일로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리라는 예상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어린 나이에 우리가 대단했던 것 같다.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그렇게 안 싸웠으면 지금처럼 민주화가 됐을까?”

신민당사 농성 지도부였던 권씨는 김경숙의 생전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경숙이는 매사에 똑소리가 났다. 책임감이 강해서 동생과 엄마를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김경숙은 1958년 전남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났다. 맏딸인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누에고치 공장에서 노동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에 올라와 작은 봉제공장을 전전하다가 1975년, 당시 대기업 축에 들던 YH무역 섬유공장에 취업했다. 그는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동생 학비와 가족 생활비로 송금했다.

회사가 커질수록 노동자는 배를 곯았다

YH무역이라는 회사 이름은 회장 장용호의 영문 이름 이니셜에서 유래한다. 장용호는 1966년 자본금 100만원에 종업원 10명을 고용해 수제 가발공장을 차렸다. 당시 그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친구로 두고,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와 친분을 과시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전형적인 정경유착형 기업가였던 그는 설립 2년 만에 YH무역을 종업원 4000명의 회사로 키웠다. 1970년대 초에는 대한민국 최대의 가발 수출업체라며 금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 권씨는 “굉장했다. 그때만 해도 면목동에 있는 YH무역 빌딩이 제일 컸다. 그런데 회사가 커갈수록 우리 노동자들은 배를 곯았다. 현장 노동조건은 점점 나빠졌다. 수당도 없이 야근, 휴일은 물론 주중에도 밤샘 근무를 다반사로 시키고 임금을 체불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섬유 파트에서 일하던 김경숙은 일기를 썼다. 그의 일기에는 “오늘은 오랜만에 제날짜에 월급이 나왔다. 너무 행복하다”라고 쓰여 있었다.

ⓒ김영삼민주센터1979년 8월 김영삼 신민당 총재(왼쪽)가 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YH무역 장용호 회장은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기도 했다. 권씨는 “자기 동서를 바지사장으로 앉히고 자기는 회장이 돼서 미국에 백화점과 무역회사를 차리고 수출대금 명목으로 300만 달러를 도피시켰다”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월급이 밀리기 시작하자 1975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유신정권 시절엔 노동조합을 불온시했다. 노동자가 두세 명만 모여도 바로 관할 경찰서에서 쫓아왔다. 정부와 사측의 탄압을 뚫고 YH 노조가 잘된 건 소그룹 덕분이었다.” 지부장과 부지부장, 그 아래 임원직 간부를 두는 일반적인 노조와 달리 노조 대의원 한 명에 3~4명씩 조를 짜서 당면 문제를 소그룹별로 해결했다. 이때 김경숙도 노조 대의원이었다.

장용호는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를 세워 경영 정상화와 정당한 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싸우자 공장 이전을 단행했다. 서울 면목동 가발공장을 충북 옥천의 산골로 옮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노조에서 이전 부지에 가보니 공장은 없고 돌밭이었다. 회사가 여성 노동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것이다. 대부분 시골에서 상경한 10대, 20대 여성 노동자들에게 충청도 산골로 내려가라는 것은 나가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해서 가발공장 노동자 430여 명이 사표를 쓰는 등 공장을 그만두었다.

김경숙은 노조에 가입한 뒤 일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운영하던 야학에 입학했다. “경숙이는 배움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노조 대의원을 맡아 책임감도 매우 강했다.” 김경숙은 당시 ‘똥물 투척 사건’으로 유명한 동일방직 노조 탄압에 항의하는 행사에 참석하려다 경찰 제지를 당한 일화를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야학에서 더욱 친밀해진 동료들과 인천에서 준비한 기념행사를 하기 위해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웬 경찰관과 기동대들이 줄지어서 들어가야 할 가톨릭회관을 못 들어가게 하는구나. 저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막을까. 비인간적인 사회의 모순된 점을 볼 때 정말 이가 갈린다. 연약한 여공들을 왜 못살게 하는가. 작년에 똥물까지 처먹이고 자유롭게 현실의 입장을 발표하려 하는데 왜 저렇나. 더러운 비인간화들은 꺼져라. 이 모든 일에 주인이 되신 하나님 아버지는 억눌린 자와 함께하실 줄 믿으며 겸손히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1970년대 후반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을 연결한 고리는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이었다. 김경숙도 YH 노조 간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크리스천아카데미는 유신체제 아래 위축된 민중과 지식인들 사이를 매개해 사회적 자유와 정의를 실천할 개혁운동을 벌였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크리스천아카데미 교육 사건’을 터트렸다. 1979년 3월 이 사건으로 김세균·신인령·한명숙 등이 구속되었다. YH 노조 최순영 지부장도 함께 탄압을 받았다.

1979년 4월 YH무역 장용호 회장은 경영난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김경숙을 포함한 여성 노동자 수백 명은 면목동 공장 기숙사에서 회사 정상화 촉구 농성을 벌였다. 회사는 단전 단수 조처로 맞섰다. 정부도 언론도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우린 이미 지는 싸움인 걸 알았다. 지더라도 우리가 지금 제대로 안 싸우고 깨지면 앞으로 노동자들이 당할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희생되더라도 다른 노동자를 위해서 끝까지 가자고 결의했다. 처음부터 신민당사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외 협력업무를 맡은 권순갑 부지부장은 사회 각계 인사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회사 정상화를 위해 주거래 은행도 찾아가고, 장용호 회장이 미국으로 재산을 빼돌린 점에 착안해 미국 대사관에도 찾아갔다. “미국 대사관 앞에서 문을 두드리니 총부리가 나오더라. 용감했다.” 백방으로 뛰어도 소용이 없자 YH 노조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세상에 알릴 새로운 방법을 고심하다가 신민당사 농성을 떠올렸다. “문동환 목사, 이문영 선생, 고은 선생, 인명진 목사, 서경석 목사 등을 만나 부탁했더니 그분들이 흔쾌히 김영삼 총재와 다리를 놓아줬다. 그 일 때문에 나중에 우리가 당사에서 연행된 뒤 그분들이 감옥에 가셨다.”

YH무역 노동자들의 ‘40년 트라우마’

1979년 8월9일 이른 아침, 며칠째 계속된 기숙사 농성으로 단전 단수 상태에서 세수도 못한 채 티셔츠만 입은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해 하나둘씩 마포 신민당사 앞으로 모였다. 아침 6시경 이들은 일제히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권순갑 부지부장은 농성 마지막 날 경찰 진입 직전 집행부의 결정에 따라 사후 대응팀으로 당사를 빠져나왔다. 농성이 진압되면서 그는 곧바로 수배자가 되었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뒤에도 경찰의 노동운동가 체포가 계속됐다. 나는 10·26 나흘 뒤인 10월30일 성수동에서 체포돼 경찰 유치장에서 박정희 장례식을 보았다.” 권씨는 그해 말 풀려났지만 이후 전두환 정권 아래서 YH 사건 ‘주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취업이 불가능했다. YH무역 신민당사 농성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은 평생 트라우마가 생겼다. 권순갑씨는 전두환 정권 아래서 더 이상 노동운동을 할 수 없었다. 대신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주문하는 유인물과 플래카드 등을 제작하는 기획사를 차려 새로운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유신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오랫동안 김경숙은 경찰 발표대로 ‘투신자살자’로 매도됐다. 경찰 주도로 서둘러 화장해 어딘지도 모르게 뿌려졌기에 묘지도 없었다. 1989년에야 농성 당시 YH 노조 간부들이 주축이 돼 모란공원에 김경숙 묘지를 조성했다. 생전 김경숙이 쓰던 성경책과 일기장 등 소품들을 묻었다.

‘투신자살자 김경숙’의 정확한 사인이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2008년 3월이었다. 대통령 소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경숙 사망 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벌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김경숙의 주검에 동맥 절단 흔적이 없고, 손등에 쇠파이프로 가격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다. 후두정부에서는 모서리진 물체로 가격당한 치명적인 상처가 있다. 김경숙은 경찰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경찰에 강제연행 당해 뿔뿔이 흩어진 여성 노동자들은 ‘YH 동우회’를 구성했다. 최순영 지부장이 17대 국회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입성하면서 자연스레 연락책이 되었다. 그렇게 모이는 인원은 20여 명이다. 권순갑 전 YH 노조 부지부장이 느끼는 요즘 여성 노동운동은 40여 년 전에 비해 어떨까. “그때는 노동자들이 전체적으로 어렵고 탄압받았다. 지난 40년 동안 다른 분야에 비해 여성 노동자들 삶은 그다지 좋아진 게 없다. 지금도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 등에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 여성 노동자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뭉쳐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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