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않은 편지’와 ‘부치지 못한 편지’의 차이는 뭘까. 부치고 싶지만 부치지 않은 마음이 두려움이라면, 부치고 싶어도 부치지 못하는 마음은 죄책감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체념했기에 부치지 않았고, 회한 때문에 부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영화 〈윤희에게〉를 보고 난 뒤 나는 내내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윤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시작된다. 발신지는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 편지 쓴 이는 쥰(나카무라 유코)이지만 편지를 부친 이는 쥰이 아니다. 그의 고모가 쥰 모르게 우체통에 넣었고, 한국에 사는 윤희(김희애)의 딸 새봄(김소혜)이 엄마 모르게 편지를 뜯어 보았다.

“어제 네 꿈을 꿨어. 나는 가끔 네 꿈을 꾸게 되는 날이면 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어.” 나의 엄마를 생각하며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은 누굴까. 부치지 않은, 혹은 부치지 못한 편지만 줄곧 쓰고 있을 그 사람. 새봄이는 궁금했다. 생기 잃은 얼굴로 하루하루 전투를 치러내듯 살고 있는 엄마에게도 발그레, 볼이 달아오르던 첫사랑의 시절이 있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행을 핑계 삼아 엄마와 함께 오타루를 찾는다. 딸은 엄마 몰래, 엄마는 딸 몰래, 쥰의 집 앞을 기웃거린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이 온 세상을 뒤덮은 그곳에서, 윤희의 기억이, 그리고 윤희의 감정이 조금씩 조금씩 작은 눈송이로 뭉쳐진다.

2년 전 겨울 장편 데뷔작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를 선보인 임대형 감독은 다시 겨울을 앞두고 〈윤희에게〉를 내놓았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그의 이야기는 춥지만 따뜻하다. 등장인물에게 외롭지 않은 고독을 선물한다. 작은 영화지만 커 보이고, 그리 길지 않은 영화의 여운이 무척 길다. 온통 모순 형용의 영화세계. 이 모순투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상처투성이 우리들의 안부가 궁금한, 어느 영화감독의 상냥하고 사려 깊은 화법.

길지 않은 영화의 긴 여운

영화에서 새봄이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아이다. “근데 넌 인물 사진은 안 찍니?” 사진관 하는 삼촌이 물었을 때 그의 대답. “네. 전 아름다운 것만 찍거든요.” 그랬던 아이가 언젠가부터 인물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찾아낸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마음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의 마음이 꼭 새봄이의 그것과 같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소설 〈배를 엮다〉에서 ‘편지 쓰는 행위’를 이렇게 쓴 적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하얀 종이를 메워나갔다. 마음을 형태로 만들기 위해.” 그러므로 결국, 마음을 형태로 만드는 일이다. 편지도, 사진도, 그리고 영화도. 눈송이를 뭉쳐 눈사람 형태로 만들듯, 사랑과 그리움과 후회와 용기를 뭉쳐 〈윤희에게〉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다행히, 봄이 와도 쉬 녹지 않을 터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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