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르네상스 저널리즘’이라는 비영리 기관을 설립한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존 푸나비키 교수.

명함을 받은 존 푸나비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교수(저널리즘 전공)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번 취재 통역을 맡은 장하다씨가 건넨 명함이었다. 대학원생인 장씨는 ‘게임 개발자’이기도 하다. 그의 명함에 적힌 게임 개발자를 본 푸나비키 교수는 “마침 주거 문제에 관한 탐사보도를 바탕으로 게임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었다”라고 말했다.

11월3일 ‘르네상스 저널리즘’이 참여하고 있는 베이 지역 협업 프로젝트(Bay area collaborative)에서 특종이 나왔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언론인들이 협업해 실리콘밸리 내 50만 개 부동산 데이터를 분석했다. ‘누가 실리콘밸리를 소유하고 있나’라는 12개 언론사 공동 보도에 따르면 땅을 가장 많이 소유한 곳은 스탠퍼드 대학과 구글, 애플로 나타났다. “IT 회사는 예상했는데, 스탠퍼드 대학은 정말 의외였다.” 프로젝트를 총괄한 푸나비키 교수는 기사를 바탕으로 ‘베이 지역에서 집구하기’와 같은 게임을 만들면 기사 도달률을 높일 수 있다며 장씨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푸나비키 교수는 아이디어를 내고 사람을 연결하는 일에 익숙하다. 그가 2009년 설립한 르네상스 저널리즘은 파트너십을 통해 여러 매체의 기자를 모아 워크숍을 열고, 장기 탐사보도를 지원하는 조직이다. “하는 일이 많아서 한 단어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는 르네상스 저널리즘이 탐사보도를 위한 ‘인큐베이터’ 구실을 한다고 설명했다. 기자들을 연결하고 미션을 지원하는 네트워킹 플랫폼이다. ‘다뤄져야 하지만, 다뤄지지 않는’ 불평등과 빈곤, 인종차별 같은 이슈에 주목한다. 심층적으로 이를 다루는 미디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상업 미디어는 시청률이나 클릭 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시간과 돈은 많이 드는데 광고는 붙지 않는 이슈를 다루기 힘들다.” 푸나비키 교수가 ‘르네상스’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저널리즘을 구할 아이디어가 샘솟길 바란다는 의미였다.

‘베트남 고엽제 리포트’ 18개 언론상 수상

2017년 한 해 미국 내 저널리즘 후원금은 총 2억5000만 달러(약 2900억원)를 기록했다. 2009년 이후 27배나 성장한 수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등에서도 미국 비영리 언론의 성장세에 주목하고 있다. 탐사보도 기자 출신인 빌 번바우어 모내시 대학 저널리즘 교수는 그의 저서 〈미국에서 비영리 탐사보도 저널리즘의 성장(The Rise of Nonprofit Investigative Journalism in the United States)〉(2019)에서 “미국의 비영리 언론사들은 주류 미디어가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스토리텔링, 데이터, 시각화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미국 언론계의 활발한 플레이어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비영리 언론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르네상스 저널리즘과 같은 협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푸나비키 교수는 현재의 후원금에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가 잃은 것에 비하면 결코 큰 금액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1980년대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지역 일간지 〈샌디에이고 유니온〉에서 아시아 및 국제문제를 다루는 기자로 일했다. 종이신문 하락세를 가까이서 목격했다. 건물 전체를 쓰던 〈머큐리 뉴스〉와 같은 지역 일간지들이 이제 한 층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규모가 작아졌다. 수백 명의 기자가 직업을 잃었다.

저널리즘을 구하기 위해 기자를 그만뒀다. “17년간의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더 많은 기여를 하고 싶었다.” 그는 1996년 자동차 회사 포드가 만든 자선단체 포드 재단에 들어갔다. 환경·교육·사회복지와 관련된 후원을 하는 공익 재단이다. 현재는 ‘표현의 자유’라는 범주로 문학·비주얼 아트·다큐멘터리와 탐사보도 등을 지원하지만 당시에는 미디어가 후원 대상에 없었다. 그는 프로그램 디렉터로 지역 공영 라디오방송과 언론 시민단체, 저널리즘 스쿨 등에 후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포드 재단에서 저널리즘을 지원한 첫 사례였다.

2010년 ‘베트남 고엽제 리포트’는 르네상스 저널리즘이 주도한 대표 프로젝트다.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사카타 마사코 씨한테 베트남전쟁 이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사코 씨의 남편은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으로 고엽제 후유증을 앓다 암으로 사망했다. “기자 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베트남에 고엽제를 살포한 건 미국이지만, 미국 언론은 이를 다루지 않았다.”

푸나비키 교수는 11년간 몸담았던 포드 재단 관계자를 설득했다. 취재에 필요한 항공편과 숙박비, 활동비를 후원받았다. 일간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공영 라디오방송 〈KQED〉, 베트남어 주간지 〈V타임스〉 등 분야가 다른 매체의 언론인 12명이 펠로십을 통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취재를 시작하기 전 사흘간 강도 높은 교육을 받았다. 기자들은 베트남전쟁 역사부터 고엽제가 건강과 자연환경에 끼친 영향을 교육받았다. 이후 6개월 동안 준비를 마치고 일간지 기자, 방송기자, 사진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등으로 구성된 프로젝트팀이 현장에 파견됐다.

뒤늦게 알게 된 현실은 참혹했다. 베트남인 300만명이 선천적 기형을 앓는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오렌지 에이전트(Orange Agent)’라 불리는 고엽제에는 유독성 화학물질인 다이옥신이 포함돼 있었다. 프로젝트팀은 다이옥신 위험 지역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추려 지도를 만들었다. ‘고엽제 리포트(〈V타임스〉)’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KQED〉)’ ‘상처받은 마음 치유하기(〈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 서로 다른 플랫폼에서 11개 리포트가 차례로 보도됐다. 파급력이 컸다. 미국 의회가 베트남에 지원하는 보건 서비스 지원 기금을 6배가량 늘리는 데 합의했다. 이외에도 ‘베트남 고엽제 리포트’는 다큐멘터리 영화제, 올해의 국제 사진상 등 18개 언론상을 수상했다. 준비부터 보도까지 걸린 시간은 총 2년, 비용은 4억원이 들었다.

ⓒJon Funabiki 제공‘베이 지역 협업 프로젝트’에 참여한 언론인들이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워크숍을 하는 모습.

비영리 언론사의 수익 다양화 방안 모색

베트남 고엽제 리포트는 푸나비키 교수에게 교훈을 남겼다. “경쟁이 특종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어떤 문제는 머리를 맞대야 한다.” 2017년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언론인들을 모아 협업 프로젝트(Bay area collaborative)를 시작했다. 베이 지역은 높은 집값과 홈리스 문제로 신음하고 있었다. 지역 정치인들과 활동가, 언론인들을 모아 주거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지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워크숍을 열었다. 비영리 언론사인 〈탐사보도센터(CIR)〉, 새너제이 지역 일간지 〈머큐리 뉴스〉, 공영 라디오방송 〈KQED〉, 지역방송 〈NBC〉, 스페인어 일간지인 〈텔레문도〉가 참여했다. 2년간 준비 끝에 2019년 11월 ‘누가 실리콘밸리를 소유하고 있나’라는 공동 보도도 이 네트워크에서 나온 성과였다.

르네상스 저널리즘의 협업 체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소수민족을 독자로 삼는 언론사다. 미국 전역에 2000여 개 소수민족 언론사가 존재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히스패닉, 아시아계 미국인 등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언론으로 각 나라 언어로 발행된다. 샌프란시스코의 〈엘 테콜로테(El tecolote)〉는 50년 된 비영리 언론사다. 스페인어와 영어로 발행되며 라틴아메리카계 이민자를 대변하고 있다. “발행 부수는 약 1만 부 내외로 적지만 각 이민자 커뮤니티에서 갖는 영향력은 거대하다. 이들과 협업하면 주류 미디어가 닿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기사를 노출할 수 있다.”

푸나비키 교수는 미국 내 수많은 후원 재단이 왜 비영리 언론을 지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들은 특정 이슈에 반응한다. 재단은 이기적이다.” 그가 보기에 각 재단은 기후변화, 교육, 건강 등 특정한 주제에 관심 또는 이해관계가 있다. 탐사보도를 후원하는 것도 자신들의 관심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재단이 관심을 갖지 않는 이슈는 배제될 수 있다. 비영리 언론사는 후원 의지가 있는 재단을 찾는 게 중요하다. 포드 재단의 경우 불평등 혹은 빈곤 문제에 관심이 많다. 나이트 재단은 탐사보도와 협업 프로젝트를 반긴다. “재단 관계자와의 네트워크를 유지해야 한다. 아이디어가 생길 때마다 이 보도가 얼마나 가치 있을지 끊임없이 설득했다.” 현재 르네상스 저널리즘은 포드 재단, 실리콘밸리 커뮤니티 재단 등 7개 재단에서 받는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올해로 르네상스 저널리즘이 설립된 지 10년째다. 때로는 재정난에 시달렸다. 재단 지원이 갑자기 끊기면 재정 상태가 취약해진다. 푸나비키 교수는 비영리 언론사가 재단 후원 외에 수익을 다양화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예를 들면 〈엘 테콜로테〉는 지역 내에서 빙고게임 대회를 열어 수익금을 냈다. 소수민족 언론사인 만큼 지역 이민자 커뮤니티와 긴밀하게 연결된 이점을 활용했다. “비영리 언론사는 규모는 작지만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사례다.”

기자명 샌프란시스코·김영화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