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앞에서 한풀 꺾인 세계 최대의 ‘약한 FTA’
  • 이종태 기자
  • 호수 636
  • 승인 2019.11.2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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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억 인구를 가진 인도가 난색을 표하면서 RCEP의 글로벌 영향력이 매우 쪼그라들었다. 약한 FTA를 표방한 RCEP 성격상 보호주의 흐름에 큰 타격을 가하기 어려웠다는 시각도 있다.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11월4일 방콕에서 열린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1월4일 타이 방콕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16개국 정상이 모였다. 정상들 중 15명은 이날까지 준비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RCEP: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협정문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RCEP가 타결되었다’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각국별로 ‘여러 품목의 관세를 어느 정도의 시기 동안 어떤 수준까지 인하하느냐’ 같은 구체적 사안은 아직 협의 중이기 때문이다. RCEP 같은 국제조약 체결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 중 하나인 국가수반들의 서명이 내년 상반기로 밀렸다. 무엇보다 시장 규모에서 장차 중국 다음이 될 인도가 협정문을 거부했다.

협상국은 당초 올해 내로 16개국 차원의 타결을 이끌어내려 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보호주의로 회귀 조짐이 보이는 국제무역 시스템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RCEP는 아세안(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인도네시아, 타이,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10개국과 한국, 일본,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등 6개국, 모두 16개국이 추진해온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거대 자유무역협정 지대다. 인도가 참여하는 경우 RCEP는 글로벌 GDP의 30%(27조3000억 달러), 세계 인구의 절반(35억명)을 아우르는 글로벌 최대 자유무역 블록으로 부상했을 터이다.

인도의 RCEP 거부는 특히 중국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는 이미 한국, 일본, 아세안 등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다. 중국과는 체결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인데도, 인도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믹 타임스〉에 따르면, 2018년 인도는 중국에 대해 520억 달러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총 무역적자(1300억 달러) 가운데 40% 정도가 중국에서 비롯되고 있다. 더욱이 인도는 중국에 원자재(연료, 기초식품 등)를 주로 수출하지만,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은 전자제품, 의약품 등 고부가가치 공산품이다. 이런 상황에서 RCEP로 묶였다간 중국의 공산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 나라 제조업을 뿌리째 뒤흔들게 될지도 모른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로부터 수입하게 될 농산물 역시 경쟁력 낮은 인도 농업 부문 종사자들(특히 소농)의 생계에 치명적 타격을 가할 것이다. 인도는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한국, 뉴질랜드, 타이 등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무역적자를 내고 있다.

이 같은 우려로 인해 인도 국내의 다수 여론은 RCEP에 결코 친화적이지 않았다. 특히 제조업 부문의 중소기업과 농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야당인 국민회의당의 라훌 간디(인도의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의 증손자)는 11월4일 트위터에 “RCEP는 저렴한 외국 제품의 대량 수입으로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없애는 등 인도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다”라고 썼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 등 인도의 집권층 역시 ‘글로벌리스트’라기보다는 ‘자립경제’적 성향이 강하다. 국내 자본을 투입해 만든 국산품을 인도 내의 넓은 시장에 흡수시키는 방식으로 성장해서 향후 국가경제를 기획(design)과 제조 부문의 글로벌 허브로 발전시키고 싶어 한다. 모디 총리는 RCEP 협정문을 거부한 이유를 밝히면서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를 언급했다. 간디는 생전에 ‘자립’ ‘자존’을 강조했다.

타이 일간지 〈방콕 포스트〉(11월11일)에 따르면, 당초 인도는 협정문에 대체로 동의했다. 막판에 튀어나온 ‘투자자 권리 보호’ 문제에서 탈이 났다. 인도 측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인도의 공공정책이나 장기적 경제발전을 해칠 가능성을 우려해 투자자의 권리를 제한하려 했으나 다른 국가들이 강력히 반대했다고 한다.

인도와 중국의 외교관계도 순탄하지 않다. 양국 간에는 크고 작은 국경분쟁이 이어져 왔다. 무력충돌 경험도 있다. 인도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 주도의 신실크로드 전략 구상)가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 인근 국가로 확산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해왔다. 미국의 중국 견제 구상인 ‘인도·태평양 전략’에도 인도가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주도하는(적어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은 분명한) RCEP에 인도가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중국 정부로서는 미·중 무역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도 자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대외로 넓히는 데 성공한 국가적 승리로 간주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코노미스트〉(11월6일)는 인도의 RCEP 거부를 “중국과의 외교·경제 관계를 ‘쿨’하게 유지하겠다는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회원국 국내 제도는 애초부터 논의 제외

이렇게 13억 인구의 인도가 난색을 표명하면서 RCEP의 글로벌 영향력이 매우 쪼그라들게 되었다. RCEP 자체가 ‘강한 FTA’를 겨냥하지 않았기에, 설사 인도가 가입했더라도 글로벌 보호주의의 흐름에 큰 타격을 가하기는 당초부터 어려웠다는 시각도 있다.

2000년대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강한 무역협정’에서는 체결국에 대해 각종 물리적 재화에 대한 관세 인하는 물론 노동·환경 규제의 개정과 국유기업 민영화까지 압박했다. 예컨대 환경 규제가 엄격한 국가의 기업은 추가 비용을 지출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다른 나라 업체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로 몰릴 수 있다. 국가 지원을 받는 국유기업은 다른 나라의 민간업체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국제시장에 상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오바마 정권이 환태평양 지역의 11개국과 기나긴 협상 끝에 타결했으나 트럼프 행정부가 탈퇴해버린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Trans-Pacific Partnership)은 전형적인 ‘강한 FTA’에 속한다.

RCEP는 ‘약한 FTA’다. 환경과 노동, 국유기업 등 회원국들의 국내 제도는 당초부터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회원국 사이의 무역에서 관세를 인하 및 표준화하고 ‘원산지 기준(교역 상품이 조약 체결국의 상품이 맞는지 판별하는 기준)’을 통합해서, 문자 그대로 순조로운 교역을 가능하게 하는 조치들에 초점을 맞췄다. 회원국 간의 경제발전 정도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의식해서(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얀마의 50배), 개도국의 경우에는 관세를 긴 기간 단계적으로 인하하도록 특혜를 제공했다. 특히 인도에겐 상당수 품목에 대해 단계적 관세 인하 기간을 25년까지 연장해준 것으로 전해진다. 인도의 수입이 급증하는 경우에는 해당 품목에 대한 관세 인상, 수입 제한 등을 시행할 수 있는 세이프가드제도 허용했다고 한다. 〈이코노미스트〉(11월7일)에 따르면, RCEP 협정문은 체결국의 의무를 규정한 표현에도 ‘해야 한다(shall)’보다 ‘하도록 노력한다(shall endeavor to)’를 사용하는 등 모호하기 짝이 없다. 미국 윌버 로스 상무장관이 RCEP에 대해 “대단한 협정은 아니다”라고 평가 절하한 이유다.

11월4일 15개국 정상들의 선언에 따르면, RCEP는 인도의 참여를 계속 기다릴 것이다. 국가수반들의 서명이 내년 초(가장 유력하게는 2월)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수개월 동안 인도 정부를 회유하면서 협정문의 구성이 다소 변경될 가능성이 크다. 그다음 절차는 각국 의회의 승인인데 이에도 상당한 기간과 정치적 마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 최대의 ‘약한 자유무역지대’는 성립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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