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구하러 온 어느 ‘급진 좌파’의 공약
  • 이종태 기자
  • 호수 635
  • 승인 2019.11.22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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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워런 상원의원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정작 그녀는 “나는 뼛속까지 자본주의자”라고 말한다. 주요 공약을 살펴봤다.
ⓒAFP PHOTO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10월22일 시카고에서 파업 중인 교원노조 및 국제서비스노조와 피켓 시위를 함께하며 연설하고 있다.

내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흔히 ‘급진 좌파’로 불린다. 대기업 및 부유층에 대한 대규모 증세, 독점기업 해체, 전 국민에 대한 건강보험 등 ‘좌파적’ 정책 공약을 잇달아 발표해왔기 때문이다. 이미 수백억 달러를 운용 중인 거대 금융기업이나 페이스북 같은 ‘테크 자이언트’들은 ‘워런 반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민주당 경선에 영향을 미치려 시도 중이다.

워런 의원은 자신을 좌파나 사회주의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해 7월 보스턴의 한 비즈니스 커뮤니티에서 “나는 뼛속까지 자본주의자(a capitalist to my bones)”라고 연설했다. 비슷한 시기, CNBC와 인터뷰하면서 그는 “자본가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믿느냐”란 질문에 이렇게 답변한다. “내가 자본주의자다. 나는 시장을 믿는다. 시장이 할 수 있는 일을 사랑한다. 시장은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고 기회를 창출한다.”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 워런 의원의 최대 라이벌인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나는 지배 계급(ruling class)의 탐욕과 부패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며 지지를 호소한다. “워런은 아주 훌륭한 정치인이지만” 자본주의자라는 한계를 결코 넘어설 수 없기 때문에 ‘대안은 샌더스’라는 의미다.

이토록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워런 의원이 미국의 기존 시스템을 뿌리째 뒤흔들 과격한 변혁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장경제가 모든 시민들을 위해 부(富)와 기회를 창출하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들 때문이다. 바로 ‘공정’과 ‘규칙’. 그가 보기에, 초부유층과 거대 기업에 포획된 지금의 미국 경제에는 공정과 규칙이 없다. 이에 따라 빈부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환경까지 훼손되면서 결국 시장경제 시스템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자본주의를 망치는 자본가들로부터 자본주의를 구해내야’ 한다. 올해 초부터 워런 의원이 쏟아낸 정책 공약의 기본 취지다. 〈이코노미스트〉(6월22일)에 따르면, 지난 6월 그가 내놓은 경제개혁 정책은 주요 경쟁 상대들의 공약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워런 의원의 주요 공약을 6개 열쇳말로 살펴보았다.

■ 독점 규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동력은 경쟁이다. 기업은 다른 기업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더 좋은 상품을 더 싼 가격으로 시장에 내놓으려 한다. 우수한 노동자를 다른 기업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임금 등 노동조건을 개선한다. 워런 의원이 볼 때 미국 경제에서는 경쟁이 사라지고 있다. 누구나 아는 극소수 기업이 산업 전체를 지배한다. 심지어 잠재적 경쟁 기업을 인수합병해서 경쟁을 차단해버린다.

페이스북은 2012년 이미지 중심의 소셜 네트워크인 인스타그램을, 2014년에는 메신저 업체인 와츠앱을 인수했다. 검색 업체 구글은 인터넷 광고 서비스 업체인 더블클릭을 합병했다. 온라인 유통업체인 아마존은 유기농 체인점인 홀푸드를 매입하면서 사업 영역을 오프라인으로 확장했다. 더욱이 테크 자이언트들은 시장에서 ‘경기 주최자’인 동시에 ‘선수’다. 대표적 사례로 애플의 앱스토어는 앱을 거래하는 온라인 시장이다. 애플은 자사가 운영하는 이 온라인 시장에 애플이 만든 앱을 내놓는다. 아마존이 운영하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시장에서는 아마존 상표가 붙은 상품들이 판매된다. 주최자가 선수로 뛴다면, 그 경기(시장경쟁)가 공정하게 치러질 수 있을까?

워런 의원은 독점기업들을 분할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페이스북으로부터 인스타그램과 와츠앱을, 구글로부터 더블클릭을 떼어내겠다는 것이다. 그가 집권하면, 거대 생명과학 기업인 바이엘 역시 2018년 인수한 글로벌 농업기업 몬산토를 외부로 매각해야 할 것이다. 또한 워런 의원은 글로벌 수익이 250억 달러 이상인 온라인 시장 업체를 ‘플랫폼 설비(platform utilities) 기업’으로 지정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런 기업들은 자사가 운영하는 플랫폼 시장에 자사 브랜드 상품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

ⓒEPA워런 의원은 제프 베이조스(위)가 운영하는 아마존 같은 대기업은 ‘면허증’을 받아야 영업할 수 있는 정책을 공약했다.

■ 기업지배구조 개혁

미국 대기업들의 경영 원칙은 ‘주주 이익 극대화’다. 경영자들은 단기간에 주가를 끌어올리고 배당을 많이 지급해야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 이런 경영 원칙 때문에 주주 이외 다른 이해관계자들, 즉 노동자, 납품업체, 소비자, 지역공동체 등에 피해를 강요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주가를 높이려면 수익성 관련 지표를 개선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정리해고(노동비용 절감), 납품업체에 대한 ‘갑질’ 등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주에게 높은 수익을 배분하다 보니 연구개발(R&D)에 쓸 돈이 줄어들어 해당 기업의 장기적 발전을 해치기도 한다.

기업에 대한 주주의 압박은, 그 주주가 사모펀드일 때 훨씬 격화된다. 기업에 투자하는 사모펀드는, 확보한 주식가치가 오르거나 혹은 경영자가 알아서 챙겨주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경영자를 압박할 만한 지분을 사들이거나 혹은 아예 경영권을 인수해 적극적으로 정리해고, 기업매각 등을 감행해서 해당 기업의 가치를 올린 뒤 다시 팔아 큰 수익을 올린다. 이런 과정에서 주주 이외의 이해관계자들과 해당 기업, 나아가 국가경제 전체가 큰 손실을 볼 수 있다.

지난 8월19일, 미국 대기업들의 이익단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 “기업은 주주 이익 극대화를 넘어 직원, 고객 등 모든 이해관계자를 고려하는 쪽으로 경영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낸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반성이다. 경영 목적을 주주 이익 극대화에서 이해관계자 모두의 이익을 고려하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애플의 팀 쿡,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브라이언 모이니핸, 보잉의 데니스 뮬런버그, GM의 메리 배라 등 유수한 기업의 CEO 181명이 성명서에 서명했다.

워런 의원은 CEO들의 이런 선언을 아예 제도화하자고 주장한다. 정책 공약에 따르면, 글로벌 차원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얻는 대기업들은 미국 연방정부로부터 면허증(federal charter)을 받아야 영업할 수 있다. 이런 기업의 경영자는 자신의 의사결정이 직원, 납품업체, 지역공동체, 환경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항상 주시해야 한다. 만약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해치는 행태가 반복되면 영업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

워런 의원이 약속한 사모펀드 규제는 이 업종을 끝낼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사모펀드들은 특정 기업의 주식을 매집해서 경영권을 얻는다 해도 일개 주주에 불과했다. 주주는 보유 기업이 지고 있는 부채(은행 대출금, 노동자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연금 등)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워런 의원은 사모펀드가 피투자 기업의 부채에 대해서 일정 정도 책임을 지도록 관련 법안들을 개정할 작정이다. 사모펀드 처지에서는 어떻게든 해당 기업을 구조조정해 주가를 올린 뒤 ‘먹튀’하면 그만이었는데, 워런 의원이 당선하면 그런 장사를 못하는 처지로 몰리게 되었다.

ⓒ연합뉴스프래킹 공법이 금지되면 셰일오일 생산이 중단된다. 아래는 미국 오클라호마의 네마하 생산광구.

■ 에너지

워런 의원은 미국의 일부 산업에 대해 10년 내로 ‘100% 청정에너지화’를 완료하겠다고 선언했다. 2030년까지 각종 차량의 동력원을 청정에너지로 대체하고, 2035년까지는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국가경제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겠다고 한다. 원전은 단계적으로 폐기한다. 또한 지하 3~4㎞의 셰일층을 헤집어 석유를 시추하는 프래킹(fracking) 공법을 금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셰일오일 및 가스 시추의 핵심 기술인 프래킹은 미국을 글로벌 최대 산유국으로 부상시킨 일등 공신이다. 동시에 환경을 훼손하고 지진을 유발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노동과 복지

워런 의원은 연방 최저임금을 현행 7.25달러에서 15달러로 인상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쉽게 결성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하는 한편 직업훈련에 대한 정부 투자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또한 회사 내 분쟁에서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어온 법률들을 폐지할 계획이다. 노동자가 다른 회사로 전직하지 못하게 막는 경쟁금지 조항(non -compete clause)의 폐지 공약이 대표적 사례다. 또한 아마존의 배송원 등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독립 계약자’가 아니라 피고용인의 지위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피고용인 지위를 가지면 고용 안정과 복지 혜택 등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대체로 노사관계에서 노동자의 힘을 보강해서 공정한 ‘노사 간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워런 의원은 복지 부문에서는 ‘유급 육아휴직제’를 도입하고, 보편적 보육 시스템의 구축으로 저소득층에겐 무료, 다른 계층에겐 소득 중 7% 이내의 비용으로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공립대학의 수업료를 면제하고 학자금 대출 역시 소득계층에 따라 최고 5만 달러까지 탕감하겠다는 공약도 인기를 끌었다. 또한 시민들의 대표인 국가가 의료 부문의 자본과 협상해서 진료비, 약값 등을 결정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 체계를 국가로 단일화하는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 세금제도

워런 의원은 초부유층과 대기업에 대한 대규모 증세를 추진할 계획이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500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가진 초부유층은 그 초과분에 대해 2~6%의 부유세(wealth tax)를 내야 한다. 자산이 7000만 달러라면 5000만 달러를 초과한 2000만 달러에 대해 세금을 내는 방식이다. 워런 의원은 부유세에 대해, 누구나 내는 주택세를 “(초부유층의) 다이아몬드, 주식 포트폴리오, 요트, 렘브란트 그림까지 포함하게 확장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업에 대해서는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내는 경우 그 초과분에 대해 7%를 추가 징수한다.

이렇게 모은 재원은 학자금 대출 탕감, 공립대 수업료 면제, 보육복지, 제조업의 청정에너지화 등에 사용할 예정이다.

■ 무역 및 산업정책

산업정책과 보호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워런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그는 미국 행정부에 ‘경제개발부(Department of Economic Development)’를 신설해서 산업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게 할 생각이다. 민간기업의 연구개발에 세금으로 조성된 공공자금을 대규모로 투자할 계획도 세웠다. 경제 시스템에서 민간의 주도성을 원칙으로 삼는 미국에선 매우 낯선 풍경이다.

워런 의원이 공공연하게 ‘환율 조작’을 공약으로 올린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중국 등 다른 나라의 환율 조작을 막겠다는 게 아니라 “수출 및 국내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달러 가치를 조정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무역협정에서는 미국 시민들의 의사를 적극 반영하기로 했다. 소비자, 농촌, 지방을 대표하는 새로운 위원회를 만들어 그들에게 불리한 무역협정에 반대할 권리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무역협정이 일부 계층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워런의 미국’은 자유무역에 맞서는 나라가 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워런 의원의 공약은 미국 자본주의를 사실상 재창조하는 수준이다. 이런 야망에 특유의 꼼꼼함이 얽히면서 세세한 개혁 프로그램을 짜내 유권자들에게 투하했다. 언론은 그를 “계획을 가진 여성(a woman with a plan)”이라고 부른다.

글로벌 유력 경제 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10월24일)는 ‘경쟁촉진’ 원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입법화되면) 미국의 자유분방한 경제 시스템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다”라고 우려한다. 예컨대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가 시행되면 미국 금융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민간 보험사들이 도산할 수밖에 없다. 프래킹 공법의 금지로 셰일오일 생산이 중단되면, 미국은 최대 산유국 지위에서 물러나야 하며 에너지 비용 역시 급등할 것이다. 인수합병의 억제는 혁신 지체로 이어질 수 있으며, ‘대기업 면허제’는 자칫 정부가 민간 기업에게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6월10일)에서 워런 의원의 의제 설정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워런은 현존하는 가장 큰 문제들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예컨대, ‘자유시장을 어떻게 작동하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가 극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워런 의원이나 샌더스 의원처럼 ‘큰 규모의 변화’를 상징하는 후보들의 높은 지지율은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미국인들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지난 6월 워런 의원은 아이오와주에서 열린 민주당 연설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엔 크고 구조적인 변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변혁을 위한 세부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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