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나라를 다니는 게 직업이다 보니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다들 끝내주는 풍경이 있는 멋진 은신처를 기대하지만, 나는 희한하게도 고도(古都)에 끌린다. 망한 나라의 도읍들은 특유의 쓸쓸함이 있다. 식민지가 독립하기도 했지만, 여태 식민지로 남은 경우도 있다. 살아남은 이들이 과거의 왕국을 잊고 잘 산다면 다행이겠으나 대부분 언어, 인종 혹은 극심한 내부 차별로 인해 끝끝내 동화되지 못하는 예도 있다.
일본인이냐고 물으면 손사래를 치는 오키나와는, 아직 일본에 동화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망국’의 느낌이 절절한 곳이라고나 할까. 우리는 오키나와의 현청 소재지를 ‘나하’로 알고 있지만, 오키나와의 노인들은 아직도 그곳을 ‘슈리(首里)’라고 발음한다. 류큐 왕국은 1872년에 망했지만, 지금 오키나와에 사는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도시의 새로운 지명인 나하라는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잔인하게 지워진 오키나와 왕가의 흔적
일본 제국은 자신들이 침략해 망해버린 왕가의 흔적을 잔인하게 지워나갔다. 조선왕조 시절 대비들의 거처였던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어버린 처사도 그랬지만, 오키나와는 한술 더 떠 아예 군대가 주둔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은 어쨌건 퇴위 후 자신이 살던 궁전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지만, 류큐 왕국의 마지막 왕인 쇼타이는 합병을 ‘고시’받고 이틀 만에 궁전을 비워줘야 했다. 고작 군인 500명한테 말이다.
아마도 메이지 시대의 건축가 이토 주타나 가마쿠라 요시다로의 노력이 없었다면, 슈리성의 정전은 진작 허물어져 신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슈리성은 보수공사를 거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됐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당시 오키나와를 수비했던 일본군 32군은 국보로 지정된 지 10년밖에 안 된 슈리성 아래에 참호를 파고 그곳을 사령부로 삼았다. 문화유산은 좀처럼 폭격하지 않는 미군의 빈틈을 노린 행위였지만 소용없었다. 오키나와전 당시 미군이 슈리 지역에 쏟아부은 포탄은 약 20만 발, 비행기에서 투하한 폭탄은 약 1000t이었다. 슈리 지역은 지반의 구조가 바뀔 정도로 파괴되고 말았다.
현대사회에서 그깟 망해버린 왕궁 자리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현재까지도 식민지의 처지라면 다르다. 그건 그저 그들과 내가 다르다는 정체성의 가느다란 상징 같은 것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슈리성을 복원하고 싶어 했다. 메이지 시대 때 찍은 흑백사진만으로는 슈리성이 가진 화려한 색감을 살릴 수 없어서 동네 노인들에게 탐문을 거듭하며 색감을 가늠할 즈음 1768년에 만들어진 슈리성 설계도가 발견되었다. 정말이지 하늘이 도왔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대사건이었다. 오키나와의 역사만큼이나 기구한 슈리성이 복원되던 1992년 오키나와는 전 지역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재건한 오키나와의 상징과도 같은 ‘언덕 위의 붉은 성’은 10월31일 화재로 이제는 사라져버렸다. 공교롭게도 입장권을 내야 볼 수 있는 정전 구역만 불에 탔는데, 가능하다면 이번 화마로부터 비켜난 구역의 개방은 유지하길 바란다. 불탄 언덕을 바라보는 건 슬픈 일이지만, 마물(魔物)이 지나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직선으로 된 길 하나 내지 않은 슈리성과 그 주변의 구불구불한 길을 걷는 행복까지 빼앗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슈리성이 복원될 때는, 오키나와의 사정도 조금은 더 나아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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