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백정’을 무죄로 풀어준 군 검찰관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35
  • 승인 2019.11.2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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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좌익 소탕’을 빌미로 76명을 살해한 이협우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 검찰관 윤홍렬은 ‘이협우에게 학살된 유족회의 대표’를 빨갱이로 몰아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검찰 권력의 흑역사를 재조명한다.
ⓒ연합뉴스1961년 7월12일 군사쿠데타 이후 창설된 혁명검찰부 및 혁명재판소 시무식 모습.

지난 두 달 남짓 대한민국이 반으로 갈리다시피 했던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신임 법무부 장관을 겨냥한 검찰 수사는 대한민국을 논쟁과 시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으니까. 이 문제에 대한 찬반 입장을 넘어서 사람들은 검찰이라는 조직에 대해 다시금 주목하게 되었단다. 법무부 산하의 한 외청이지만 그 장(長)은 유일하게 장관급이며, 차관급인 검사장들이 40여 명이나 버티고 있는 강력한 조직.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틀어쥔 무서운 권부(權府), 그게 검찰청이거든.

귀밑머리 새파란 20대 청년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사법연수원을 거쳐 검사에 임용되면 바로 ‘영감님’으로 불린 것은 까마득한 옛날부터야. “충남 서산에서 한밤중 여자들을 싣고 밤거리를 달리던 검사가 불심검문하는 지서 주임의 뺨을 때리고 검사를 몰라본다고 호통을 쳤다. 몇 년 전 서울의 어느 검사는 집에서 술을 마시다 안주가 떨어지자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통닭 사오라’ 했으나 사람이 없어 나갈 수가 없다고 하자 곧 달려가 호통을 쳤다(〈동아일보〉 1977년 5월9일)”는 정도의 해프닝은 무시로 일어났지.

이후 권력을 휘두르던 정보기관이 물러서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검찰은 더욱 영향력을 지니게 돼. 그 결과 검찰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며 오늘날 절대 강자가 돼버렸어. 오늘부터 몇 주간은 우리 현대사 속에서 발견되는 검사 ‘영감님’들, 그리고 군 법무관 등 검사 역할을 수행했던 이들, 나아가 검찰 권력이 창조했던 흑역사를 들려주려 해.

해방 이후 38선 이남은 그야말로 ‘정치 과잉’으로 들끓었다. 좌우익 대결은 더욱 극심해졌고 양쪽은 증오를 넘어 잔인한 폭력으로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어. 해방 직후 경북의 좌익 세력은 꽤 드셌고 우익들도 그악스럽게 굴었지. 그 가운데 경북 경주에는 이협우라는 사람이 있었어.

이협우는 좌익들에게 저승사자와도 같았어. 좌익 혐의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여버린 건 이야깃거리에도 들지 못했지. 마을의 처녀에게 눈독을 들였다가 거절당하자 그 집을 몰살시키기도 했고, 좌익 혐의자뿐 아니라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그 가족 전부를 죽여버리는 일을 예사로 했어. 두 살짜리 아이까지도 쏘아 죽였다니 사이코패스였다고나 할까. 실로 어이없는 사실은 이런 ‘인간 백정’이 대한민국 3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는 사실이야. 권총을 들고 다니며 상대 후보를 겁박하고 부정선거까지 동원해 얻은 결과였지.

피바다 위에 세워진 ‘이협우의 왕국’에 위기가 찾아왔어. 4·19 혁명 때문에.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뒤 한 맺힌 피해 유족들은 검찰에 이협우를 고소했고, 대구지검 최찬식 검사는 “경주경찰서 내남지서 전·현직 경찰관을 모두 소환하는 등 적극적으로 수사에 임했다. 학살 사건 가운데 입증 가능한 것을 정리해 내남면민 76명을 살해한 혐의(〈경남도민일보〉 2005년 6월14일)”로 이협우를 기소했지. 마침내 정의가 실현되는가 싶었어. 나아가 1961년 3월 이협우는 사형을 선고받아. 두 달 뒤에 뜻밖의 사태가 벌어져. 5·16 군사쿠데타.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한”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는 그 자신도 남로당 군사 총책을 맡았다가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과거를 박박 씻어내려는 듯 ‘빨갱이 사냥’에 적극 나선다. 이협우의 손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박정희의 ‘혁명정부’의 눈에는 여지없는 ‘빨갱이’로 보였지. “쿠데타 이틀 뒤 18개 혁신 정당과 사회단체 간부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위험인물을 예비검속하여 불순 음모 책동을 미연에 방지하고 혁명과업을 완수’한다는 이유에서였다(〈한겨레21〉 제861호).” 체포된 사람 가운데에는 경주 지역 피학살자 유족회 대표 김하종 형제가 있었어.

‘인간 백정’ 이협우는 무죄로 풀려나

“대한민국 군경의 작전 수행상 부득이 희생된 남로당원 등 공산분자들을 위령함에 있어… 단체를 조직해 당시의 실정을 필요 이상으로 침소봉대해 마치 우리 군경이 하등의 이유 없이 양민을 학살한 것처럼 왜곡 선전했다”는 혐의였어. 김하종 형제를 기소한 이는 ‘혁명재판부’의 검찰관, 즉 군인이자 검사 노릇을 했던 윤홍렬이야.

ⓒNARA1951년 4월 대구 근교에서 헌병이 부역 혐의자들을 사살한 뒤 구덩이에 묻고 있다.

서슬 퍼런 검찰관 윤홍렬에게 김하종 형제는 목이 터져라 호소했어. “이협우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죕니까.” 허파를 까뒤집게 억울한 일이었지만 윤홍렬 검찰관의 구형은 황당할 만큼 잔인했단다. 무기징역. 그러면서 윤홍렬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지만 청춘이 아까워서 무기징역을 준다.” 윤홍렬 검찰관의 논고 중 일부야. “공산분자들을 마치 애국자인 양 허위 선전하고 위령탑 건립과 형사보상금 지불, 처형 군경 색출을 주장함으로써 북한 괴뢰의 목적 사항을 찬양 고무했다(〈경향신문〉 1962년 1월30일).” 권력의 향배에 따라서 사형수가 180°로 바뀌는 이 어이없는 상황극의 연출자는 군 검찰관이었어. 바로 두 달 전 다른 검사가 기소하고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은 무죄로 풀려났고 그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이 피를 토하며 부르짖은 외침은 빨갱이 찬양으로 몰려서 죽을 죄목이 되었단다.

우리는 위대한 인물들이 내뿜는 빛을 기억함과 동시에 그 반대편에 섰던 어둠 속 사람들의 이름도 기억해야 해. 역사는 그런 명예형(名譽刑)을 근근이 실현하는 재판정이기도 하니까. 위에서 유족 형제에게 무기징역으로 ‘선심’을 쓴 검찰관 윤홍렬은 그 논고를 한 두어 해 뒤, 독직(瀆職) 혐의로 쇠고랑을 찬다. 어떤 혐의로 잡아 가둔 사람들의 돈을 압수했다가 사면령이 내려 돈을 돌려줘야 할 상황이 되자, 법무관들 몇 명이 절반 정도를 가로채고 돌려줬다가 덜미가 잡힌 거야. 윤홍렬 검찰관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어(〈경향신문〉 1964년 9월18일).

어떤 직종이든 자신의 직을 이용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대개 그 직군에서 추방당하게 마련이야. 의사가 의료 관련 범죄를 저지르면 의사 면허를 박탈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검사를 비롯한 법조인들은 그런 불문율로부터도 자유로웠어. 윤홍렬 역시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1978년 또 다른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신문에 보도되었어. “변호사 사무장 등이 윤홍렬 변호사를 월 30만원에 고용, 형사사건의 의뢰인 25명으로부터 불법 수임한 사건을 윤 변호사로 하여금 대리행위토록 한 사건(〈경향신문〉 1978년 4월19일)”이었지.

검찰청 소속 검사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군 검찰관 윤홍렬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검찰이 그렸던 흑역사를 체현하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해. 권력의 의지에 따라 사형수를 바꿔버릴 수도 있는 오만함과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떡고물을 챙기는 지점에서 보여주는 민첩함, 그리고 무슨 죄를 짓든 말든 기득권을 인정받아 잘 먹고 잘 살며 ‘불멸의 신성가족’으로서 대한민국 상류층을 형성했던 생명력까지. 검찰이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야. 경주의 살인마 이협우가 편안하게 늙어 죽은 나라, 도리어 피학살자 유족들이 징역살이를 하고 평생 연좌제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던 나라에 과연 무슨 정의가 남아 있었을까. 오늘날 검찰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돌아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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