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pedia포르투갈 전성기를 이끈 엔히크.

왕자는 바다에 대한 이야기라면 누구보다 좋아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도 어린 시절부터 동경을 키워오고 있었다. 1415년, 지금의 지브롤터와 마주 보고 있는 세우타 항구가 포르투갈 차지가 되었을 때, 꿈은 많지만 직접 몸을 쓰는 일은 싫어하는 왕자는 세우타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바로 ‘항해 왕자’로 알려진 엔히크 왕자(1394~1460)다.

젊은 시절부터 즐겨 먹던 마니게트(후추 맛이 나는 서아프리카 원산의 향신료)의 향기는 그를 미지의 세계로 이끌었다. 어디에서 자라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서유럽까지 오는지 알 길이 없었던 이 향신료에 붙은 별명은 ‘낙원의 씨앗’이었다. 북아프리카 튀니지나 지금의 리비아에 가면 이를 취급하는 대상들이 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었다. 엔히크 왕자는 대체 어디에 가면 이 향기로운 씨앗이 자라는 곳을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에 닿는, 직항로 개척은 이런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항해도서관 짓고, 조선·항해 인재들 불러 모아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700여 년간 남부 유럽을 지배해왔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전투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무어인이라고 불린 북아프리카 출신의 무슬림 세력은, 활발한 무역 활동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특산물을 유럽에 공급해주는 일을 담당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치를 인정받는 두 가지는 황금과 향신료였다. 그중에서도 아시아에서 생산되어 복잡한 유통과정을 거쳐 유럽에 도달하는 향신료는, 산지 가격의 40배가 넘게 거래되기 일쑤였다. 운송되는 동안 사건·사고로 극히 일부만 도달한다 해도, 투자한 금액의 몇 배 이상을 회수할 수 있는 ‘하이리스크·하이리턴’ 비즈니스였다. 15세기까지 이 산업을 독점하고 있었던 국가는 지중해에 강력한 함대를 가진 베네치아였다. 레반트 지역에서 그리스 앞바다를 돌아 아드리아해, 그리고 베네치아로 이어지는 지중해의 해양 운송로에는 키프로스섬, 로도스섬, 크레타섬 등 베네치아의 식민지가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여기에 주둔하는 함대는 언제든 자국의 상선을 보호하고 적국 상선을 약탈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막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국내 정치의 안정을 이루기 시작한 포르투갈 같은 나라가 지중해 무역에 뛰어들었다.

엔히크는 포르투갈의 남쪽 끝에 해당하는 사그레스에 해양연구소 역할을 겸하는 항해도서관을 지었다. 항만과 해군 조선소를 정비했다.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모든 항해 관련 서적과 지도를 수집하고, 국적을 불문하고 조선과 항해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전까지 존재 자체가 미미했던 포르투갈의 해군이, 지금으로 치면 우주 개척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을 해내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세상의 끝’은 지금의 모로코 영토에 속하는 보자도르곶이었다. 그 너머로는 바다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괴물들이 입을 벌린 채 기다린다는 전설 말고는 알려진 게 없었다. 엔히크 왕자의 격려(그가 내건 엄청난 보상)에 힘입은 포르투갈 뱃사람들은, 제대로 된 코치를 만난 멀리뛰기 선수처럼 점점 더 도약의 거리를 늘려갔다. 이들이 15세기 내내 수집한 지리와 해류에 대한 지식, 각 지역의 자원 샘플, 그리고 현지 부족에 대한 정보는 사그레스 해양연구소의 학자들에 의해 하나의 해도로 집대성되어 다음 세대의 선원들에게 전달되었다.

엔히크는 1460년, 그가 키워낸 함대가 인도에 도달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둔다. 그는 지금도, 리스본의 테주강 (스페인어로 타호) 강가에 우뚝 선, 발견기념비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짧지만 강렬했던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이끈 것은 대양 너머를 보는 눈을 가진 자신이었음을, 그 눈이야말로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임을 말없이 웅변한다.

기자명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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