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앞줄 가운데)이 10월24일 ‘군산형 일자리 상생협약식’에서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군산형 일자리’가 첫발을 내디뎠다. GM 군산공장이 있던 자리에 현대차 1차 협력업체 엠에스오토텍의 자회사 명신이 들어섰다. 새만금단지에 에디슨모터스 등 중소기업 4곳이, 군산국가산단 내 유휴 공장에 부품업체 11곳이 입주한다. 이 프로젝트의 현재 목표는,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공장을 가동해 2022년까지 4122억원(KDB산업은행 융자 포함)을 투자해서 일자리 1900여 개를 만드는 것이다. 같은 기간에 전기차 17만 대를 생산할 계획이다.

군산형 일자리는 문재인 정부의 여섯 번째 ‘상생형 지역 일자리’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란 지역의 경제주체들이 양보와 타협을 통해 만드는 일자리라고 할 수 있다. ‘광주형 일자리’가 대표 모델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한국 노동시장이 대기업·정규직으로 대표되는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2차 노동시장으로 나뉘어 있고, 그 격차가 극심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2차 노동시장에는 노조가 희귀하다. 반면 1차 노동시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런 상황이라도, 어떤 기업 소속이든 상관없이 크고 작은 회사의 노동자와 사용자 측이 한꺼번에 만나 공동으로 노동조건을 논의하는 ‘산업별 교섭’이 이뤄진다면, 같은 산업 내 노동자들은 비슷한 임금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같은 산업의 다른 회사와 상관없이 한 업체만의 사용자와 노동조합이 노동조건을 논의하는 ‘기업별 교섭’이 일반적이다. 비슷한 일을 하는 노동자라도 원청 대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면 많은 임금을 받고, 하청 중소기업 직원이거나 비정규직이면 저임금을 받는다. 결국 기업별 임금격차가 커진다. 대기업들이 더 이상 국내에 공장을 새로 짓지 않는 것은, 이런 노사관계에 드는 인건비와 갈등 비용 때문이기도 하다고 광주형 일자리의 입안자들은 본다.

그래서 광주형 일자리는 ‘적정임금’에서 해법을 찾으려 한다. 현재의 대기업만큼 높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낮지도 않은, 직무와 성과를 반영한 ‘괜찮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라면, 기업이 고용에 투자할 유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신 기업은 지나친 장시간 노동을 시키지 않고, 노동자를 경영에 주체적으로 참여시키며, 원·하청 노사가 공동으로 임금 등 노동조건을 교섭한다. 잘만 굴러간다면, 한국 노동시장 질서를 바꿀 혁신이다.

광주형 일자리에 내재한 딜레마는 현대차가 투자자로 나서면서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 ‘적정임금’이 얼마인지 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지속 가능하다는 보장도 없다는 점이다. 광주형 일자리로 설립되는 기업에 노조가 조직되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 기존 노사관계와 다를 바 없어진다고 현대차는 우려했다.

광주형 일자리 협약서에 이런 우려가 담겼다. 광주형 일자리를 위해 새로 설립되는 기업에서는, 노사와 지역의 여러 주체들이 참여해서 기업 운영 사안의 일부를 논의하는 ‘상생노사발전협의회’가 임금 등 노동조건을 정하기로 되어 있다. 이 노동조건이 ‘누적 생산 차량이 35만 대가 될 때까지 유효하다’란 단서를 붙였다. 연간 7만 대 생산이 목표인 만큼, 5년 동안 노동자들이 임금 및 단체협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결국 ‘새로 생긴 노조가 임금 및 단체협상을 요구할 법적 권리는 막을 수 없지만, 지역의 주체들이 애초의 협약을 지키도록 노조를 설득할 수는 있다’는 선에서 정리되었다.

ⓒ시사IN 전혜원옛 GM 군산공장 자리에 새로 들어선 명신 공장.

군산형 일자리에만 있는 것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는 광주형 일자리 협약에 참여했다. 민주노총, 특히 현대차 노조가 속한 금속노조는 강하게 반대했다. ‘적정임금’을 내세워 기업 투자를 유치하는 방식이라면 지역별 저임금 경쟁이 일어나 임금이 하향 평준화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가뜩이나 자동차 산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 대기업 공장들의 물량을 광주형 일자리 쪽으로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런 이유로 민주노총은 그동안 광주형 일자리는 물론 제2, 제3의 광주형 일자리로 불리는 상생형 지역 일자리들에 신중한 태도를 취해왔다.

군산형 일자리는 다르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 협약 중 유일하게 민주노총 지역 단위가 참여했다. 군산의 특수한 상황이 압박으로 작용했다. 2017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가동이 중단되고 2018년에는 GM 군산공장이 폐쇄되었다. 두 기업은 군산 지역내총생산(GRDP)의 23.4%를 차지하는 핵심 기업이었다. 군산은 지난해 4월 고용위기 지역으로 지정된 상태다. 최재춘 민주노총 전북본부 군산시지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군산은 뭐든 다 떠나버리고 공동화되고 있다. 다 죽게 된 상황에서 그나마 새로운 일자리가 온다는데, 민주노총이 노동조건이 안 좋다고 반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안 그래도 ‘민주노총 때문에 GM이 떠났다’는 잘못된 소문까지 도는 와중에 이걸 반대하면 지역에서 고립된다. 차라리 민주노총이 들어가서, 100%만큼은 아니더라도 70%, 80%까지는 (새 일자리의 질을) 끌어올리자고 생각했다.”

군산형 일자리에는 기존 상생형 지역 일자리들에 없는 조항이 있다. 군산과 새만금 단지에 들어설 전기차 클러스터(산업 집적지)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공동교섭’을 벌인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방식은 이렇다. 클러스터 내 각 기업의 노사가 모두 참여하는 사용자협의회와 노동자협의회가 공동으로 임금 등 노동조건에 대해 교섭을 벌인다. 이때 원·하청 노사와 지역의 각 주체가 참여하는 ‘상생협의회’ 산하 임금관리위원회가 기업 규모별·직종별 적정임금 구간과 매년 임금상승률을 결정해 공동교섭 위원에게 제시한다. 기업들은 임금관리위원회가 제시한 적정임금 구간과 임금상승률 내에서 노동자들과 공동교섭을 벌인다. 공동교섭을 통해 결정된 임금을 참고해서, 기업별 노사가 임금교섭을 진행한다.

또한 군산형 일자리 참여 주체들은 상장 시 우리사주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거나, 상장 전까지 노동자 대표가 이사회를 참관할 수 있게 한다는 데에도 합의했다. 광주형 일자리에 참여했던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광주형 일자리의 경우 투자자로 참여하는 현대차가 미온적이어서 노사관계나 경영방식의 구체적 변화는 담아내지 못했다. 원·하청 공동교섭은 ‘동반성장’, 노사 책임경영은 ‘소통·투명 경영’으로 막연하게만 규정되었다. 이와 달리 군산형 일자리는 광주형 일자리의 문제의식을 흡수해 일정 부분 관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민주노총의 지역 단위가 처음으로 주체로서 참여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라고 평가했다.

ⓒ연합뉴스1월31일 민주노총 광주본부 노조원들이 광주형 일자리 사업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민주노총 전북본부 군산시지부가 이 협약에 참여했지만,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군산형 일자리에 반대 성명을 냈다. 이들은 상생협의회 산하 임금관리위원회가 적정임금 구간과 임금상승률을 결정한다는 대목을 비판했다. “사실상 지방자치체가 주도하는 임금관리기구가 결정하고, (이를) 통보받은 노사는 자율 결정했다는 그림만 연출하는 것이다(금속노조 성명서).” 특히 협약서 중 참여 기업 노사가 의견이 다를 경우, 상생협의회 산하 ‘갈등조정중재특별위원회’의 조정안을 생산 개시 후 5년 동안 수용한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금속노조가 보기에, 이는 “5년간 무파업 사업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장치”다. “광주에 이어 군산에서도 양보와 희생은 노동자의 몫이고, 정부와 지자체는 자본 유치를 위한 카드로 ‘노동기본권’을 뽑아 써버렸다(민주노총 성명서).” 참여 기업이 협약을 어기고 이를 시정하지 않을 경우, 공공 측이 내놓았던 지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는 조항도 ‘상생’보다는 ‘협박’에 가깝다고 민주노총은 비판했다.

“무노조 기업, 노조 조직 계기 될 수도”

이런 우려에 대해 최재춘 민주노총 전북본부 군산시지부장은 “논의 과정에서 ‘5년 무분규’ 조항을 넣자는 요구도 들어왔는데,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차피 노조가 만들어지면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노조법과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어떻게 협약으로 막을 수 있나. 설득만 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중견기업인 명신 한 곳을 제외한 중소기업들에는 노조가 조직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군산형 일자리에 참여하는 중소기업들의 임금수준을 높이고, 노동자들을 노조로 조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옛 GM 군산공장 자리에는 군산형 일자리 참여 기업인 ‘명신’ 간판이 붙었다. 군산형 일자리를 환영하는 플래카드 3개가 휑하니 바람에 출렁이고 있었다. 경비원 2명이 아직 가동되지 않고 있는 공장을 지키고 있다. 얼마 전 군대에서 전역해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는 고명근씨(22)는 ‘군산형 일자리’ 뉴스를 보고 채용 문의를 하러 왔다가, “아직 채용하지 않는다”라는 경비원의 말에 발길을 돌렸다. 고씨는 “전기차를 생산한다기에 눈에 띄고, 전망도 있어 보여 찾아왔다. 내년 봄에 구인 공고가 뜬다는데 지원해볼 생각이다. 친구들은 (다른 지역) 조선소에 일하러 가는데, 집이 가까운 군산에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군산에 일자리가 많이 없다”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노동자 중 상당수가 살던 오식도동에는 원룸 촌이 있다. 이들을 겨냥한 상가도 한때 활황을 누렸다. 그러나 지금은 세 가게에 한 가게꼴로 ‘임대’ 표지판이 붙어 있다. 편의점, 프랜차이즈 빵집, 막걸리집, 미용실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공실이다. 이곳에서 순대집을 운영하는 성백열씨(57)는 “매출이 반토막 났다가 최근에는 70% 정도로 올라왔다. 인원이 많아져야 하는데 군산형 일자리가 온다니 대단히 환영하고 잘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반면 한 공인중개사는 “중공업이 들어와야 사람이 많이 들어오지 그렇지 않으면 큰 영향은 없다고 본다”라며 냉소했다.

군산시에 따르면 GM 군산공장 폐쇄로 GM 직원 2044명, 협력업체 164개사 직원 1만28명 등 총 1만2072명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가동 중단으로 직영 760명, 협력업체 4099명 등 일자리 4859개가 줄었다.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 ‘물량팀’(조선소 물량이 있을 때마다 팀장 개인 밑에서 단기간 일을 하는 임시 노동자)까지 합치면 숫자가 훨씬 많아진다. 2016년 27만7551명이던 군산시 인구는 2018년이 되자 27만2645명으로 5000명 가까이 줄었고, 실업률은 1.6%에서 3.2%로 솟았다. 온승조 군산상공회의소 기획관리부장은 “GM 군산공장 폐쇄와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가동 중단으로, 식당 등 파생되는 동네 일자리까지 합해서 일자리 2만여 개가 붕괴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당장 군산형 일자리를 통해서 군산이 커진다거나 일자리가 수천 개 생기지는 않겠지만, 이것에라도 희망을 걸어보려는 바람이 있다.”

현재 지역에 따라 각자의 여건에 맞는 상생형 지역 일자리들이 준비되고 있다. 밀양형 일자리는 창원, 김해, 부산 등지에 흩어져 있는 주물공장 등 28개 기업을 하남일반산업단지로 옮겨 ‘스마트 공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구미형 일자리는 LG화학이 구미국가산업단지에 배터리 소재 공장을 건설하는 내용이다. 강원형(횡성형) 일자리에서는 중소기업들이 중심이 되어 초소형 전기차를 만들게 되어 있다. 대구형 일자리는 위기에 처한 지역의 중견 자동차 부품업체 ‘이래AMS’에 금융 지원을 하는 대신 노동자들이 상여금과 복리후생비를 양보한 사례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주력 산업이 크게 보면 자동차와 전자인데, 전자는 해외로 다 빠졌다. 국내에서 공장을 운영하더라도 거의 자동화되어 고용창출 효과가 크지 않다. 남은 게 자동차이다 보니 상생형 지역 일자리 후보 11개 중 8개가 자동차에 쏠린 면이 있다. 수용력이 있을지 걱정되기도 하는데, 산업통상자원부와 일자리위원회가 컨설팅을 추진해 정리를 하려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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