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 찬란하게
  • 김형민(SBS CNBC PD)
  • 호수 634
  • 승인 2019.11.1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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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 세상을 등진 정창교는 겸손하면서도 유능한 사람이었다. 정당 선거에서 전자투표를 도입하고 국민참여경선을 성사시켰다. 스스로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빛났던 사람이다.
ⓒ연합뉴스1990년 11월2일 서울대 도서관에서 투신한 김태훈씨 추모비 건립식이 열렸다.

1981년 5월. 전두환이 제5공화국을 선포하고 12대 대통령이 된 지 석 달. 온 나라가 군홧발에 짓밟히고, 사람들 입에는 투명한 재갈 하나씩 물려 있었다. 빙산 같은 폭압에 깔려서도 맨주먹으로 얼음을 깨고 숨을 쉬고자 하는 몸부림은 새어나왔어. 학생들은 단 몇 분, 아니 몇 초 동안 ‘살인마 전두환,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부르짖는 데 자신의 인생을 걸었어.

1981년 5월27일 서울대학교 도서관 앞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단다. 도서관에 앉아 있던 학생 하나가 벌떡 일어나 쩌렁쩌렁 고함을 지른 거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경제학과 78학번 김태훈이었어. 그는 광주 출신이지만 이른바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다. ‘남을 도울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을 하든 불이익을 받든 전혀 개의치 않는 성격(고교 동창 이홍철 변호사)’의 모범생이었지. 그런 그가 도서관의 조용한 공기를 뒤집은 거야. 일종의 폭발이었다. 고향 사람들을 도륙한 살인자가 대통령이랍시고 천지를 휘젓는 상황에서 눈을 돌리고 귀를 막고 책만 파기에는 김태훈의 양심이 너무나 예민했던 거야. 쥐어짜는 구호를 세 번 외친 김태훈은 그대로 창문으로 돌진해 도서관 6층에서 몸을 내던져버렸어.

사람이 떨어졌지만 경찰은 숨을 거두지 않은 몸뚱이 위로 최루탄을 쏘아댔어. 한 학생이 이를 악물고 김태훈이 떨어진 자리에 다가섰어. 경찰이 뿌려놓은 모래를 헤집자 곧 김태훈의 핏자국이 드러났지. 학생은 그 붉고 노랗고 검은 흙을 봉투에 쓸어 담았다. 국사학과 1학년 정창교였어.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을 재수 생활로 보내느라 광주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김태훈만큼 광주의 이름을 뼈아파 했던 신입생이었지. 정창교는 그 흙을 자신의 기숙사 책상 서랍에 담고서 밤새 엉엉 울었다. 먼 훗날 딸과 함께 찍은 동영상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 그런 게 아빠 인생의 전환점이 됐지.”

“중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 초임이셨는데 그만 짝사랑에 빠져서 (···) 역사 공부는 올백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했고 꿈이 역사학 교수였던(2018년 4월20일, ‘ㅍㅍㅅㅅ’ 인터뷰)” 순진한 역사학도는 그날 이후 자신의 역사를 새로이 쓰기 시작한단다. 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군대에 끌려가고 말았지. 당시에는 ‘강제징집’이라는 게 있었어. 시위하다 체포된 학생들은 ‘특수학적변동자’라는 딱지가 붙여져 본인의 동의는커녕 제대로 된 입영 절차도 없이 군대에 끌려가야 했지. 전방 소총수로 근무하면 그나마 다행이었어. 전두환 정권은 이 특수학적변동자들을 협박해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만행까지 저질렀으니까. 이걸 ‘녹화사업’이라고 불렀어. 정창교는 전두환의 의도대로 ‘녹화’는커녕 더욱 단단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당시 수많은 동료들처럼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내던져버리고 인천의 공장지대로 스며들었지.

ⓒ정창교 Facebook고 정창교씨는 서울시 정책자문특별보좌관, 관악구청 정책연구실장 등을 지냈다.

1987년 6월 그는 노동 야학으로 유명한 부평의 백마교회 야학 교사였어.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구술 아카이브에 동료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회고담을 남겼는데, 그 내용이 좀 재미있어. “(경찰에 쫓겨서 도망가고 있는데) 그냥 도망가기가 뭐해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고 (야학) 학생들 기본 스무 명이 따라 하니까 수백 명이 저를 따라오는 거예요. 그냥 도망가기는 쪽팔리니까. (···) 근데 한순간에 천 명이 된 거예요. 다들 저를 쳐다보는 거야. 원래 이건 아닌데.”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는 주인공이 트럭에서 떨어진 깃발을 전해주려고 뛰어가다가 그 뒤로 시위대가 몰려드는 바람에 별안간 주동자가 되는 코미디가 등장해. 시위대 수천 명을 이끌었던 벅찬 기억을 두고 정창교는 ‘쪽팔리니까 외친 구호 때문에 어쩌다 그렇게 된’ 채플린의 해프닝처럼 이야기하고 있어.

자신의 활동을 훈장처럼 과시하던 투사들의 별의별 무용담이 지천인 가운데 자신을 ‘어쩌다 주동자’로 만들 줄 알았던 정창교의 겸손함은 유난스레 빛난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는 정창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지. “감옥에 갔다 왔다기에 처음에는 민주화운동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나쁜 범죄를 저지른 줄 알았다. 그렇게 티를 안 냈다. (···) 대화 중에 남의 말을 끊는 걸 본 적이 없다. 경험도 많고 지식도 풍부했지만 누구에게도 ‘네 말이 틀렸다’고 한 적이 없다. ‘많이 안다고 정답은 아니다.’ 이게 그의 지론이었다(박희선 관악청년네트워크 딴청 대표).”

그는 그렇게 겸손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만큼 유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노동운동을 할 때뿐만 아니라 정치에 입문해서도 그랬다. 2000년에 이미 정당의 전당대회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한다는 아이디어를 실현시켰고, 요즘 일상화된 전자투표를 도입했지.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의 기적을 낳은 ‘국민참여경선’을 입안한 사람도 그였어.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허다하게 쏟아내 ‘스티브 창교(잡스)’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으니 더 설명할 것이 없겠지. 그 능력을 다 쓰지 못하고 올해 8월 백혈병으로 세상을 등진 것이 아쉬울 뿐이야.

아이디어 충만한 ‘스티브 창교’

1980년대를 뜨겁게 거친 사람들이 숱한 오류를 범했고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창교처럼 빛나는 사람들 역시 그 시대를 거쳐 우리 역사 한쪽을 밝혔음을 아빠는 네게 들려주고 싶었어. 딸과 함께 찍은 동영상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꿨던 김태훈의 이야기를 딸에게 열심히 들려준 것처럼 말이야. 동영상에는 정창교의 딸이 인터뷰한 내용이 나와. “그때 아빠가 제 친구라면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을 것 같아요. (그렇게 싸워준 것이) 고마운 면도 있고 쉬운 선택은 아니었겠지만 조금은 자신을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아빠는 이 인터뷰를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한 딸의 말을 들었을 때 정창교의 심경은 어땠을지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야. 그렇게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 빛을 보지도 못했으나 누구보다 빛났던 사람들의 역사가 떠올랐기 때문이야.

어차피 모든 세대는 ‘꼰대’가 되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자들은 대개 남루해진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푸르름을 찬양하려는 게 아니라 이를 되짚어 오늘을 푸르게 물들이기 위함이고, 초라해지기 이전의 가치를 오늘에 이어보기 위해서란다. 요즘 욕을 먹는 86 세대의 역사도 그래서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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