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사 제공고 범능 스님은 모든 공연과 음반 수익금을 지역의 소외된 곳에 회향했다.

1972년부터 1979년까지의 유신 정권 7년은 가히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가매장 기간이라고 해도 무방할 거야. 대통령을 비판하기만 해도 사형을 당할 수 있었던 가공할 유신 정권을 끝장내는 계기는 40년 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거대한 민중봉기였어. 부산민주항쟁(부마항쟁)이지. 그 시작은 1979년 10월16일 부산대학교에서 폭발한 유신 반대 시위였다. 분노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구호도 외쳤는데 노래가 아쉬웠어. 당시에는 시위할 때 부르는 노래가 따로 없었고 함께 부를 노래도 마땅치 않았거든. 애국가나 가곡 ‘선구자’가 그나마 분위기를 잡았는데 그것도 지겨우니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하는 ‘기다리는 마음’까지 불렀다고 해.

1980년대는 달랐어. 골리앗 같은 전두환 정권에 맞섰던 다윗 같은 사람들은 그 의지와 용기를 다지며 함께 부를 노래를 만들어냈지. 그 노래들은 역사가 되고 바람이 되어 사람들 사이를 흘러 전국 방방곡곡으로 날아갔단다. 언젠가 네게 ‘임을 위한 행진곡’의 사연을 들려준 적이 있지만 광주항쟁 당시의 비장하고 급박했던 분위기를 잘 드러낸 노래로 ‘광주 출전가’를 빼놓을 수 없어.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 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 무엇이 두려우랴 출전하여라/ 영원한 민주화 행진을 위해/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출전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 언젠가 광주 5·18 행사 때 거대한 인파가 이 노래를 합창하는 풍경에 그야말로 압도된 기억이 난다. 전두환 군부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영상이 안 되면 오디오 다큐멘터리라도 만들어보자고 몇몇 예술인과 방송 PD 등등이 모여 작당을 했지. 방송국에서 몰래 가져온 장비로 만든 오디오 다큐멘터리 〈광주여 오월이여〉에 ‘광주 출전가’가 처음으로 실리게 된다. 이 노래의 작곡가는 문성인이라는 사람이었어.

그는 1961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한국전쟁 상이용사의 아들로 태어났어. 나라가 변변치 않던 시절, 상이용사에 대한 대접은 형편없었고 문성인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성장기를 보냈다.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고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해 기술을 배웠지. 그는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어. 일단 목청이 기가 막혔다고 해. 광주 기독교청년회연합에서 일하던 전용호는 이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고 주변 문화패에 소개하게 돼. “아따, 진짜 물건이라니께.”

문성인은 광주의 여러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다가 뜻밖의 난관에 맞닥뜨렸어. 당시 그는 방위, 즉 집에서 출퇴근하는 단기사병으로 군복무 중이었는데 기독교청년연합회는 경찰이나 정보 당국의 요시찰 대상이었거든. 그들은 냉큼 문성인을 잡아들여 으르렁거렸어. “너 그런 데 가서 이상한 노래 부르면 죽여버린다.” 이미 광주의 기억을 가슴에 담은 청년 문성인은 그런 협박에 굴하지 않고 제대 후 본격적인 음악 운동에 뛰어들었지.

문성인, 정세현, 그리고 범능 스님

1985년 문성인은 피리 특기로 전남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한다. 선배로부터 ‘정세현’이라는 가명을 얻어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어. 지금도 문성인보다는 정세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 그가 광주 노래패 ‘친구’ 활동을 하면서 작곡한 노래 중 ‘어머니의 손’이라는 곡을 아빠는 무척 좋아한다. “어머니 그 두 손에 바람이 불어와 두 손을 가를 때/ 어머님의 맺힌 그 한이 가슴속에 사무친다/ 살아오신 그 땅에 물기 마른 그 자리에 가뭄 들고/ 무서리 지는 시린 그 바람을 어머님 아시네.”

광주는 철 지난 벚꽃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린 희생자들의 도시였고, 동시에 그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도시였지.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 시민들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손톱으로 가슴을 긁어내야 했지. 전두환이 방문하면 혹여 시위라도 할세라 경찰들이 유족들을 끌고 저 멀리 장흥이나 해남 골짜기에 실어다 버리는 바람에 울며 울며 걸어서 차를 얻어 타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어. 민중음악가 정세현은 광주의 한복판에서 그들을 끌어안고 북돋우는 노래를 만들었던 거야.

그의 친구 고규태 시인에 따르면 정세현은 운동가라기보다 천생 예술가였어. 특히 우리 전통 가락과 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주도한 노래패 ‘친구’의 창립선언문에도 “외세 문화(팝송이나 디스코 등)가만연되어 민족의 주체성을 상실해가는 우리 문화 현실을 반성”한다고 나와 있지. 노래패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우리 소리에 깊이 빠지게 된 정세현은 인간문화재 조공례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진도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소리를 배우기에 이른다.

“하루는 정세현이 미쳤다고 전화가 왔다. 술을 거의 안 먹는 사람인데 인사불성이 돼 거리에서 소리소리 지르고 있다는 거였다. 달려가서 대충 수습하고 다음 날 물어보니 너무 소리가 안 나와서 미치도록 속상해서 그랬다는 거였다(선배 전용호의 회고).” 지구레코드사에서 당시 돈 3000만원을 안기며 계약하자고 덤볐다고도 하고, KBS 국악 프로그램에 잠깐 출연해서 명창 박동진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는 정세현은 1993년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다. 한때의 기독교 청년 문성인이었던 그가 불교에 귀의해서 승려가 된 거야. 법명은 범능이었다.

머리 깎고 승려가 됐지만 그는 노래를 버리지 않았어. 아니 오히려 더 많은 노래를 만들었지. 투사들을 위한 투쟁가와 피맺힌 한을 담은 노래를 넘어 힘겨운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거야. 2002년 가을 해남 미황사에서 열린 산사음악회에서 그는 기타를 잡고 무대에 섰다. 인구 감소로 학교 문을 닫을 형편에 놓인 분교생들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는 자리였지. 공연 말미에 분교의 개구쟁이 다섯 명은 범능 스님의 노래를 합창해. 그들을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범능이 들려주고 싶었던 노래. “절망하지 말자/ 멀지만 가야 할 길/ 오늘 비록 눈물일지라도/ 절망은 하지 말자/ 이 세상 모든 것 내게서 멀어져도/ 앞만 보고 가다 보면/ 기쁜 날 오잖겠소/ 절망하지 말자.”

전국 각지에서, 노래하는 스님, 범능을 찾았어. 그는 분교의 아이들처럼 사연 있는 곳, 각종 시설의 아이들이나 외국인 노동자, 어려운 이들이 모인 곳을 그야말로 초인적으로 다녔다. 그에게 노래는 예불(禮佛)이자 설법이었으며, 또한 1980년대 내내 그가 익힌 ‘운동’이었던 거야. 자신의 몸을 던져 누군가를 돕고 자신의 노력으로 세상의 길을 내고자 했던 범능만의 투쟁이었지.

먼 지방에서 노래하고 돌아오던 길에 그는 친구 고규태에게 전화를 걸어. “눈앞이 캄캄해서 중앙선이 안 보일 지경이네. 고속도로에서 시속 20㎞로 가고 있어.” 친구는 그러다 죽는다고 몸 먼저 돌보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범능 스님은 결코 노래를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 2013년 초여름,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공연 준비에 몰두하던 범능 스님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만다. “모든 공연과 음반 수익금을 지역의 소외된 곳에 회향했기에 정작 자신을 위한 병원비는 한 푼도 없었던(〈법보신문〉 2013년 6월20일)” 범능 스님은 이후 12일간 그가 사랑했던 사바세계에 머물다 서방정토로 떠났다.

교회를 다니면서 기타를 배우고, 광주에 분노해 사람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노래를 짓고, 후배들을 무섭게 다그치며 ‘노래’와 ‘소리’를 찾아 나섰던, 또 홀연히 출가한 뒤에는 스님으로서 그늘진 곳에 햇빛 한 줌 같은 노래를 뿌렸던 문성인, 정세현, 그리고 범능 스님.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조만간 그가 만들었던 노래를 가르쳐줄 테니 함께 불러보자꾸나. ‘광주 출전가’와 ‘어머니의 손’ 모두.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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