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은 죽지 않는다, 다만 이름으로 남는다
  • 위민복 (외교관)
  • 호수 633
  • 승인 2019.11.08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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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되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줄여서 ‘UvdL’로도 불리는 독일 국방장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은 여러 방면에서 ‘최초’를 달성한 인물이다. 먼저 그는 폰데어라이엔 가문 최고 지위에 올랐다. 지난 7월16일 유럽연합 의회에서 임명 동의를 얻어 11월1일부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이 된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를 이끄는 첫 여성이다.

그는 2005년 앙겔라 메르켈 내각에서 여성부·노동부 장관을 지냈으며 2013년부터는 국방부 장관을 맡아왔다. 여성 및 민간인 출신으로는 역시 최초였다.

그의 결혼 전 성은 알브레히트였다. 폰데어라이엔은 남편 성으로, 이 성에는 ‘귀족’을 의미하는 전치사(von)가 포함돼 있다(이 밖에도 zu 역시 귀족을 의미하는 전치사다). 이처럼 독일에서는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물론 현대 독일은 법적으로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바이마르 제국헌법’ 제119조를 통해 귀족이라는 계층 자체를 없애버렸다. 다만 이름 사용은 계속 허용해줬다. 조건이 하나 부가됐을 뿐이다. 그 조건이 무엇이었을까?

가상의 인물로 설명하면 예전에 헤르베르트 폰카라얀 백작이 있었다고 하자.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까지 그의 법적인 이름은 백작이라는 의미의 그라프(Graf)가 맨 앞에 붙는 그라프 헤르베르트 폰카라얀(Graf Herbert von Karajan)이었다. 귀족 신분을 없앤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 그의 정식 이름은 Herbert Graf von Karajan이 된다. 즉, 이름 전체에 작위(이 경우 백작)를 붙이지 않고 성에만 작위 및 von을 붙여도 되도록 허용됐다. 이를테면 1984~1994년 독일 대통령이었던 리하르트 폰바이체커(Richard von Weizsäcker)도 유서 깊은 가문의 귀족 출신이다. 폰바이체커 대통령은 법안에 서명할 때 ‘폰(von)’을 빼고 ‘바이체커’라는 이름만 썼다고 한다. 그 자신이 귀족 출신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명에 법적 이름 ‘폰바이체커’를 적지 않았기에 문제가 될 소지도 있었다.

가상 인물인 헤르베르트 폰카라얀 백작에게 백작 부인(Grafen)도 있다고 해보자. 부인의 이름은 어떻게 유지됐을까? 부인의 경우도 성씨만 따르는 Grafen von Karajan이라는 이름을 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기사의 배우자는 기사의 권리를 갖는다”라는 중세 때부터의 규범을 따르는 조치이기도 하다.

귀족과 평민 결혼해 아이 낳아도 남녀 차별하던 과거

귀족 수를 늘리지 않으려다 보니 남녀 차별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귀족 남자와 평민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의 성, 그러니까 von이나 zu가 붙는 이름을 그대로 따를 수 있었다. 물론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여야 한다. 사실혼 관계는 귀족식 이름을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귀족 여자와 평민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머니의 귀족식 성을 따를 수 없었다.

현대 독일 가족법에서는 어머니나 아버지 성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귀족이든 평민이든 한쪽 이름을 택하면 된다. 현재는 귀족 여자와 평민 남자 사이 태어난 아이들도 원하는 경우 어머니 성에 따라 귀족 이름을 가질 수는 있다.

오스트리아도 1919년 공화국이 되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독일과는 달리 귀족을 뜻하는 칭호와 이름까지 없애도록 했다. 스스로 뭐라 부르든 상관없지만 법적으로는 귀족을 뜻하는 칭호와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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