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1989년 5월28일 경찰의 봉쇄를 뚫고 연세대에서 모인 교사들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식을 열고 있다.

아빠가 대학 2학년이던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줄여서 전교조가 창립되었어.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던 교사 노동조합이 1989년 한국에서는 엄금되어 있었지.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말하던 이들이 “교사가 어떻게 노동자일 수 있느냐”라며 반대했고, 정부는 그저 노동조합일 뿐인 전교조가 무슨 반국가단체라도 되는 양 ‘발본색원’하려 들었지. 천신만고 끝에 전교조가 출범했지만 참여 교사들은 온갖 협박과 회유에 시달렸단다. 교사 1500여 명이 그 직을 박탈당하는 비극이 벌어졌어. 전국 곳곳의 학교에서 선생님을 지키겠다며 아우성치는 학생들 시위가 터져 나왔고 선생님들은 피눈물을 뿌리며 교문을 나서야 했지. 그렇게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이제 교육동지 뜻 모아 참교육 외치(‘참교육의 함성으로’ 노래)”다가 교직을 떠난 이들 가운데에는 배주영이라는 이가 있었어.

교사 배주영은 1963년 경북 달성에서 태어났어. 1981년 경북대 사범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멋을 내고 꾸미는 여학생이 못 되었다고 해. 좋게 말하면 소녀 같고 좀 고쳐 말하면 선머슴 같았던 거지. 간편한 복장을 즐기고 화장을 아예 안 했으며 친구가 억지로 얼굴에 뭘 발라주면 이내 와푸와푸 세수를 해서 지워버리곤 했다는구나. 졸업 후 경북 봉화여고에 발령받아 교사가 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을 치장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해. 그 언니의 회고를 들어보자.

“임지로 갈 때 주영이 모습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그마한 체구에 화장기라고는 전연 볼 수 없고 긴 머리는 그냥 질끈 동여매고 청바지 차림에 흰 운동화를 신고 커다란 책가방 비슷한 백을 하나 멨을 뿐 아무리 보아도 고등학생, 그것도 한 2학년 정도 모습이었다.”

이 멋모르는 국어 선생님은 세상 물정도 몰랐어. 보충수업을 맡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보충수업비라고 봉투에 몇만원을 넣어주자 “지는 보충수업 안 했는데예. 아이들 돈 걷은 거니까 아이들한테 나눠주이소”라고 돈 다시 내미는 요령 없는 선생님이 당시 학교에서 어떤 존재였을지는 뻔하지 않겠니. “열심히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사”가 문제 교사 리스트에 올라가던 시절이었단 말이야. 그는 그런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 했고 또 받고 싶어 했다.

“나는 그대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이쁜 아이들. 이쁘진 않지만 좋은 녀석들. 못난 놈들. 내 그대들에게 줄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줘야 하는 건 또 무언가. 그대들이 받고 싶은 것들은 무어요?(1985년 11월5일 일기)” 그리고 아이들에게 상처받을 때마다 교사로서의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어. “가능성 있는 아이들. 단순한 아이들. 순간적인 너희들 반응에 좌절하지 않는 선생이 되도록 노력하마. 너희는 내 그림자다. 내 그림자. 내 사랑은 너희가 모두 차지하는 거다.”

아이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고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배주영은 주저 없이 지역 교사모임에 가담했어. 스물여섯 살 교사의 결의는 야무지고 당찼다. 전교조 결성을 앞두고 계속되는 압박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도대체 (정부가 말하는) 진정한 교육인의 양식이란 무엇이며, 저들이 바라는 ‘밝은 미래’는 어떤 것일까? 그래, 이제 때가 온 듯하구나. 한바탕 온몸과 온 마음으로 부딪쳐야 할 때가(1989년 5월10일 일기).”

두 번째 직장인 청송 진보종고에서 그는 해직됐다. 기 싸움도 벌이고 징그럽게 속 썩이고 말썽도 부리던, 그의 일기장에 등장하던 학생들은 선생님을 위해 수업 거부를 결행했어. “선생님, 우리의 이런 행동이 선생님께 도움이 된다면 끝까지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물겨운 호소와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수천이든 수만이든 목을 치겠다는 당국의 방침은 바뀌지 않았고 그는 학교를 떠나야 했어. 해직 교사 배주영은 이렇게 적으며 아이들과의 이별을 고해. “내 비록 지금 떠난다만 반드시 돌아온다. 언제나 너희를 위해 기도 올린다. 사람을 사랑하며 나보다 약자인 그들을 위해 사는 진정 인간다운 사람이 되어라.”

ⓒ민주노총열사추모 페이지 갈무리고 배주영 선생님.

학생들에게 ‘엄마’라고 불린 배주영 교사

해직 교사로서 전교조 지회 상근자가 된 그가 회색 배낭을 메고 두메산골이라 불린 청송과 영양 일대를 헤집고 다녔다. 운동신경이 유달리 뛰어나고 건강했던 그는 전교조 신문과 각종 기념품 등을 배낭에 넣고 다니며 전교조 동료들과 막판에 전교조를 탈퇴해야 했던 사람들의 늘어진 어깨에 힘을 불어넣었지. 그렇듯 유쾌하고 당찼던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 것은 헤어진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이었어. 1990년 2월3일의 일기다.

“감정이 예민해지고 어려지는 요즘이다. 무슨 일에든 조그마한 자극만 받아도 눈물을 흘린다. 서럽고, 애틋하고, 그립고, 막막하고.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이며,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 철현이, 명수, 병화, 정보, 명호, 종석, 경보, 원섭이, 희식이, 정길이, 용신이, 종철이···.” 이렇게 그는 수십명의 이름을 적어두었어.

1990년 2월19일은 그가 그렇게 꾹꾹 눌러쓴 이름의 학생들이 졸업하는 날이었어. 배주영은 해직 교사 동료들과 함께 졸업식에 가기로 약속했지. 그 졸업식 날, 배주영은 나타나지 않았어. 연락도 없었지. 동료들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며 자취방으로 달려갔다. 안으로 잠긴 방문.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간 동료들은 연탄가스에 중독된 채 먼 길을 떠난 배주영을 발견했지. 나이 스물일곱,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많은 학생들에게 ‘엄마’라고 불리던 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단다.

교사 배주영은 언젠가 자신의 학생이 술에 취한 채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이렇게 일기에 썼어. “대체 나는 네게 따뜻이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고 무얼 했는지. 무엇이 너를 술에 절어 있게 했니? (···) 상연아, 네가 무진장 보고 싶다. 꽃을 파는 수레 앞에서 하얀 국화를 보며 비어 있는 네 자리를 생각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할 너를.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만들지 못한 내가 부끄럽구나.”

비록 그 이후를 이어가지 못한 허물로 86 세대가 욕을 먹고 전교조조차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1980년대를 뜨겁게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사람에 대한 애정, 약자에 대한 연대감, 자신이 지닐 수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생각해. 그런 마음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알게 되고 만지지 않아도 닿으며 말하지 않아도 가슴에 남는단다. 교사 배주영의 장례식에서 그녀가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 했던 제자가 이 악물고 읽은 추모사를 보면 알 수 있지.

“선생님은 언제나 많은 사람을 사랑하였고, 커다란 세상을 사랑하려 하셨습니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래요. 그리고 울지도 않을래요. 왜냐하면, 언제나 저와 선생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 곁에 존재하시고 지켜봐주시니까요. 열심히 살 거예요. 제게 심어주신 사랑으로 저 아닌 타인을 먼저 사랑하며 잔잔한 바람에도 쉽사리 흔들리는 한철의 가냘픈 코스모스가 아닌 사시사철 변함없이 굳건한 소나무처럼 굳세게 살래요.” 아빠는 이 제자가 무슨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 위인은 못 되었더라도,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사랑하며 더운 날 그늘이 되고 힘든 날 걸터앉을 그루터기가 되어주었으리라 믿어. 그래서 또 다른 배주영이 되었으리라 생각해. 역사는 그렇게 시나브로 세상을 뒤덮어가는 거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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