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내가 ‘고시생 시계’를 처음 접한 것은 로스쿨에 다닐 때였다. 나보다 성실하게 학습하던 동료들이 사용하던 그것은 항상 책상 위에 놓여 있었는데, 사용법은 매우 단순했다. 일종의 시계 겸용 스톱워치인데,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면서 버튼을 누르고 자리를 벗어날 때면 다시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침에 출근해 밤에 퇴근할 때까지 하루의 순공부량이 계산된다.

고시생 시계를 사용해 ‘하루 8시간’ 공부량을 매일같이 채운다면 떨어질 시험이 없다는 속설이 있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해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휴게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저녁 즈음에는 8시간을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게으른 신체와 정신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쯤은, 이 시계를 단 하루만 써봐도 깨닫게 된다. 밤 11시, 12시까지 도서관에 앉아 있던 시절에도 하루 8시간의 스톱워치 기록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임회사 경영자들의 강박증

주 52시간제 시행 후 직원 관리를 위해 게임회사들이 새로운 근무시간 차감 제도를 도입했다는 뉴스를 보고 곧바로 고시생 시계가 떠올랐다. 넥슨은 업무와 관계없이 15분 이상 자리를 비우면 본인이 ‘자리 비움’ 스위치를 눌러 비는 시간을 체크하게 하고, 엔씨소프트의 경우에는 흡연실이나 사내 카페처럼 업무와는 관련 없는 공간에 5분 이상 머물면 해당 시간을 근무시간에서 제외하기로 했다(2019년 9월24일 〈게임메카(gamemeca.com)〉). 결국, 게임회사들은 노동자들의 책상에 스톱워치를 하나씩 두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제도의 도입을 바라보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52시간제 도입에 따른 조치로(노동자 역시 그만큼 ‘얻는 것’이 있으니) 회사의 정책을 수긍할 만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생각해보자. 고시생 시계를 두고 억지로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은 하기 싫은 공부를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 그들의 현실을 반영한다. 내가 그 시계를 책상에 놓아두고 단박에 느꼈던 것은, 버튼을 누르는 ‘순간’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시계는 내가 얼마나 커피를 자주 마시는지, 공부하다 말고 동료와 얼마나 잡담을 오래 하게 되는지, 얼마나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지, 그 모든 시간을 계산하고 측정한다. 나는 그러한 동작, 즉 공부를 벗어나는 행위를 할 때마다 다시 책상에 돌아와야 하는 시간을 의식하고, 심지어 버튼을 자주 누르는 것(자주 책상을 벗어나는 것)에 자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고시생 시계의 순기능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 시계를 사용하고부터는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공부가 오로지 하루 8시간의 스톱워치를 채우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하루 동안 얼마나 배우고 익혔는지보다, 8시간만 확보하면 색다른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게임회사들이 고객의 시간을 빼앗아 돈을 버는 것에 강박을 갖고 있어서, 내부 고객인 노동자에게도 같은 대우를 하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회사에서는 15분 이상 자리를 비웠을 때 버튼을 눌러놓지 않고 나가는 게 발각되면 관리자와 개인 면담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 정책이 실로 강박증의 발로는 아닐까. 책상 위 시계에 더해 ‘B사감(새로운 빅브라더)’이 사무실마다 앉아 있는 셈이니 말이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노동자가 얼마나 창의적이고 자발적으로 자기 생산물과 생산 과정에 열의를 쏟을지도 알 수 없다.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책상에만 8시간 앉아 있으면 합격할 거라 착각하는 고시생은 멀리 있지 않다. 강한 관리 아래 강한 합리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인간이라는 생산수단은 단순히 시계로 통제되지 않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존재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기자명 양지훈 (변호사·〈회사 그만두는 법〉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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