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지난 4월12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에 참석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이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10월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북·미 실무회담’ 직후 북·미 양측은 각자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북측 협상 대표인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가 회담장에서 나온 시각은 저녁 6시15분이었다. 그는 전날 예비회담에 이어 이날도 오전 2시간과 오후 4시간의 마라톤회담을 강행했다. 회담장에서 나온 지 10분 뒤인 6시25분, 김 순회대사는 취재진에게 입장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오후 6시30분, 그는 ‘출력된 종이’를 들고 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미국이) 한동안 유연한 접근과 새로운 방법, 창발적 해결책을 시사해 기대감을 부풀렸으나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그는 결렬 원인을 “미국이 구태의연한 입장과 태도를 버리지 못”한 데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미국 측은 국무부 성명을 통해 김 대표의 발표가 “회담의 내용이나 정신을 반영하지 않았다”라고 반박했다. “미국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져갔고 북한 카운터 파트들과 좋은 대화를 했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4개 핵심 사안 각각에 대해 진전을 이루게 할 많은 새로운 계획에 관해 미리 소개했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 나름대로 새롭고 창의적인 안을 제시했지만 북한이 볼 땐 구태의연한 것이 아니었겠냐고 추정할 수도 있다. 북측의 결렬 선언에는 조짐이 있었다. 김명길 순회대사가 오전 회담을 마친 뒤 인근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가 2시간 정도 머물렀다. 회담장 주변에서 뭔가 잘못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떠돌았다. 오후에 김 순회대사가 회담장으로 복귀하면서 우려가 가시는 듯했지만 그 결과는 결렬이었다.

ⓒAP Photo10월5일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가 “북·미 실무협상은 결렬됐다”라고 밝히고 있다.

북한은 왜 종전의 주장을 반복했나

발표문만 놓고 보면 북한이 오히려 구태의연한 느낌을 준다. “교착 상태를 깨고 돌파구를 열 수 있는 현실적 방도를 제시했다”라며 북한이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핵 시험과 대륙간 탄도 로켓 시험발사 중지, 미군 유골 송환같이 (북측의) 선제적 조치에 대해 미국이 화답하면 다음 단계의 비핵화 조치에 대한 본격 논의에 들어갈 수 있다.” 북한이 지난해 6·12 싱가포르 회담 직후부터 줄곧 반복해온 내용이다. 미국 측은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일련의 아이디어들(a set of ideas)을 가지고 왔다”라고 말할 정도로 나름 성의를 보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도 북측이 싸늘하게 종전의 주장을 반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명길 순회대사는 회담 도중에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가 2시간이나 머물렀다. 결렬을 선언한 기자회견문은 회담 직후 불과 15분 만에 마련되었다. 북한이 회담의 경과와 무관하게 이런 시나리오를 사전에 준비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북한이 애착을 갖는 협상이었다면 다음 회담을 위해서라도 결렬 이유를 좀 더 성의 있게 밝힐 필요가 있었다. 처음부터 협상보다 미국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다는 선에서 회담에 임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번 회담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7개월 만의 접촉이었다. 어렵게 성사되었으나 결말은 너무 싱거웠다. 어떻게 된 것일까?

북·미 간 현안을 어떤 형식과 틀로 풀 것인가에 대한 양측의 시각차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다. 하노이 회담 같은 실패가 반복되어서는 곤란하다. 미국 측은 실무회담을 통해 비핵화 성과를 가늠하고 싶다. 북한은 생각이 다르다. 회담 성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국과의 협상 과정을 통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업적을 부각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역경을 헤치고 북·미 관계 개선이라는 업적을 쌓는 경과를 보여줌으로써 북한 주민들에게 ‘희대의 위인’으로 떠올라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른바 ‘사회주의 강국 조선이 조·미 대결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위업을 쌓았다고 선전할 수 있어야 한다.

2017년의 험악했던 정세를 이해하려면 북측의 ‘핵무력 완성을 통한 북·미 대결전론’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북한 입장에서 당시 정세는 ‘북·미 대결전’을 위한 5대 핵 타격 수단(이동식 대륙간 탄도미사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수소탄, 핵어뢰, 핵배낭)을 2017년 말까지 완료하기 위한 강행군에서 불가피한 마찰이었다. 2017년 말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측의 시나리오에서, 2018년 이후는 문자 그대로 ‘북·미 대결전’의 시대인 셈이다. 그들에게 2018년 6·12 싱가포르 회담과 지난 2월 하노이 회담은 ‘북·미 대결전 담판’이라고 할 수 있다.

ⓒReuter지난 6월2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오른쪽)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중국 시진핑 주석을 맞이하고 있다.

북한은 이른바 북·미 대결전을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밀어붙일까? 미국 대선이 있는 내년 2020년을 하이라이트로 설정하고 있다. 대선 직전인 2020년 9월이나 10월,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김정은 위원장이 참석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연설한다. 그런 다음, 뉴욕 또는 워싱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고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맞교환하는 북·미 공동선언을 채택한다. 이 같은 ‘북한 핵무력의 완성을 통한 북·미 대결전→미국 대통령과 담판을 통한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라는 위업은 북한 주민들에게 ‘사회주의 강국 조선의 최후 승리’로 선전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그 위업을 이끌어낸 위인으로 우뚝 서는 시나리오다.

다른 나라의 눈으로 볼 때, 이번 북·미 실무회담 결렬 선언을 한 뒤 또다시 핵 시험과 이동식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가능성을 내비치며 위협하는 북측의 태도가 황당할 수 있다. 북한은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를 의도적으로 밀고 나가는 중이다. 지난 8월29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2차 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참조할 수 있다.

그날 최고인민회의 결정의 요지는, 국무위원장(김정은의 직위)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국무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법령과 국무위원회의 주요 정령 및 결정을 공포하고 다른 나라 주재 외교 대표 임명 또는 소환 등의 권한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하는 국무위원장으로서 갖는 법적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수 있도록 ‘보통국가’의 대통령 지위를 부여한 셈이다.

헌법 개정 전에는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이 북한을 대외적으로 대표했다. 유엔총회 연설도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나 리용호 외무상 정도가 맡을 수 있었다. 지난 8월29일 이후에는 김정은 위원장 역시 유엔에서 연설할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북측이 나름의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구태여 이런 절차를 거칠 이유가 없다. “김정일 위원장이 은둔형 지도자였다면 김정은 위원장은 다르다. 그는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처럼 대외 행보를 하고 싶어 한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대북 소식통의 전언이다. 유엔총회 연설과 워싱턴 북·미 공동선언이야말로 김 위원장이 국제적으로 뜰 수 있는 최상의 기회다.

안전보장에 집착하는 ‘주체파’ 건재

‘김정은 위인 만들기’라는 북한 정권 최대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하노이 회담 결렬 후 북한 내부 상황을 짚어보자. 하노이 회담 실패 후 김영철 통전부장이 주도한 통일전선부(통전부)가 협상 일선에서 물러났다.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주도하는 외무성이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통전부에서 외무성으로의 주도권 변화에서 제일 두드러진 건 한국의 위상 변화다. 국정원의 파트너인 통전부가 일선에서 후퇴하면서 남북 관계가 애매해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북·미 관계보다 북·중 관계나 북·러 관계 등 ‘새로운 길’에 주력할 것이라는 일부의 관측은 오산이다. 통전부에서 외무성으로의 주도권 변화는 협상을 통해 핵문제를 해결하고 국제무대로 나가야 한다는 협상 노선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변화가 없다. 오히려 외무성은 전통적으로 북·미 관계를 외교의 제1 목표로 삼아왔다. 이런 측면에서 북측의 대미 관계 비중이 커지면 커지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북측 외무성은 일단 원칙을 세우면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벼랑끝 전술로 위기를 조장하는 사업방식을 갖고 있다. 더욱 과격한 기조를 띠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외무성 사업의 궁극적 목표는 북·미 관계 개선에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도 북한이 대·미 관계보다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중시하는 것 같은 징후가 간혹 돌출되기도 한다. 이유가 있다. 북한 권력 내에서 이른바 ‘주체파’가 건재하기 때문이다. 주체파란 미국과의 협상에서 확실한 안전보장 담보 없는 핵 포기를 극력 반대하는 일군의 세력을 말한다. 북한 권력 속성상 이들이 무리를 지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로 군부나 당에 이런 주장을 하는 인사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핵을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되고, 설사 포기하더라도 안전보장 방안이 확실하게 마련된 최후의 순간에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존재는 지난 4월경에 알려졌다고 한다. 당시 통전부의 협상 노선을 반대하는 일군의 세력이 있다는 식이었다. 김일성 주

ⓒAP Photo9월24일 백악관 부근에 있는 라파예트 광장공원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석 시대 이래 내려온 북한 정통 노선을 대변한다는 뜻에서 이들을 ‘정통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체파의 존재감이 알려진 시기에 안전보장에 대한 북한의 요구가 부쩍 커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노이 회담까지만 해도 북측의 주요 요구사항은 유엔 제재의 해제였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갑자기 안전보장에 대한 요구가 강화되었다.

이번 북·미 실무회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측은 이번 실무회담에서 하노이 회담 당시 제안했던 경제적 보상책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 무역·금융 엠바고 해제 및 국제금융기구 진출이라는 기존 패키지에 섬유·석탄 등 북한의 주요 수출품에 대해 3년간 수출 통제를 유예하는 방안 등이다.

북측은 이번 실무회담에서 안전보장 방안을 집중적으로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으로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과 한국에 대한 미국 최첨단 전략무기 판매 중단 등이다. 김정은 위원장도 주체파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북·미 회담에서 안전보장에 대한 요구가 핵심적인 지위를 계속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만 통전부와 외무성 중 어느 쪽이 북·미 협상을 담당하든, 이들의 목표는 동일하다. 협상의 모든 과실이 김정은 위원장 띄우기에 맞춰져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 2월 하노이 회담의 실패는 아직 젊은 지도자인 김정은 위원장의 평판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북·미 협상을 ‘북·미 대결전’으로 인식하는 북한 처지에서는 젊은 지도자가 노회한 미국 대통령한테 한 방 얻어맞은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실무회담은 북한이 하노이에서 당한 수모를 큰 부담 없이 되갚아주기에 적절한 무대였다고 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스캔들 때문에 민주당(하원을 장악하고 있다)의 탄핵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시점이다. 그로서는 이번 실무회담에 기대가 컸지만 북측의 예기치 않은 ‘복수극’에 한 방 얻어맞은 셈이다.

실무회담이라는 방식은 처음부터 역할이 한정되어 있다. 상대방의 입장을 탐색할 수 있지만 실무회담 정도의 협상에서 과감한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다. 북한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김정은 위원장밖에 없다. 어차피 실무회담 수준에서 의미 있는 합의가 나오기는 애당초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이 나서서 해결하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다. 북측으로서는, 늦어도 오는 12월 중에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깜짝 회동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어야 내년 1월 신년사부터 10월 사이의 북·미 대결전 관련 계획을 짤 수 있다.

그렇다면 북·미 정상회담이 올해 내로 열릴 수 있을까? 대북 소식통들에 따르면 북한의 셈법에 변수가 생겼다고 한다. 미국 내 사정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 국면에 봉착하고 있는데, 탄핵까지는 안 가더라도 재선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내년 9~10월 김정은 위원장의 유엔총회 연설과 워싱턴 북·미 공동선언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전제로 한 시나리오다. 그런데 지금 미국 내 상황이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북측으로서도 판단할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 측은 2주 안에 다시 실무회담을 갖자고 요구했다. 2주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북측은 11월 말까지 미국 내 상황을 지켜볼 가능성이 높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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