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스무 살은 없다〉 하이메 마르틴 지음, 배유선 옮김, 직선과곡선 펴냄

세상의 작은 별들. 지구 곳곳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작은 존재들은 이유도 모른 채 세상에 태어난다.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 짧은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념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되고 전쟁의 상처로 고통 속에 머물다 가기도 한다. 역사가 바뀌고 변하고 진화한다 해도, 인류사에서 전쟁 없는 역사를 기록하기는 힘든 일이다.

여기, 아주 오래된 이야기, 그러나 오늘날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주는 그래픽노블이 있다. 1970년대 말, 바르셀로나. 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한 영화의 촬영 장면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할머니 이사벨의 삶을 재현하는 손녀다. 아무나 포로로 잡고 사촌 간에도 총살하는 장면이 재현된다.

1936년, 아프리카 북부 스페인령 도시 멜리야.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은 문맹의 이사벨은 평범한 재단사로, 가난하지만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친구 로사와 어울리고 남자친구들과 해변에 놀러가고,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세입자 조합이 생긴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듣고는 돈을 받으러 온 주인에게 큰소리를 낸다.

간결한 서사, 아름다운 그래픽

그해 여름 7월17일, 스무 살 생일 전날 밤, 집으로 찾아온 친척 아저씨가 쿠데타가 시작되었으니 무조건 스페인으로 도망가라는 말에 이사벨은 밤길에 혼자 집을 나선다. 어두운 길에서 총성이 들리고 몸을 숨긴 이사벨은 처형당한 친구 로사와 에밀리오를 목격한다. 그렇게 그는 맨발로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바르셀로나에서부터 진군 중인 카를로스 막스의 행렬이 그려진다. 젊은이들은 자진 입대하여 파시스트에 맞서려 한다. 군인 하이메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바르셀로나 인근 집으로 돌아와 근처 이모 댁으로 피신 온 이사벨과 처음 만난다.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이라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에 빠진다. 함께 투쟁하고 함께 죽음의 위기를 넘긴다. 공화국은 몰락하고, 패배 진영 참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둘의 삶은 전쟁보다 더 위태롭기만 하다. 손에 닿을 듯했던 ‘행복한 미래’ 대신 독재가 시작된 시대를 그들은 견뎌내야 했다.

〈내게 스무 살은 없다〉는 저자 하이메 마르틴이 자신의 조부모가 직접 온몸으로 겪은 실화를 간결한 서사와 아름다운 그래픽으로 담아냈다. 이 그래픽노블은 전쟁 희생자가 된 한 가족의 인생과 당대의 배경, 시대적 비극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프랑코를 위시한 군부 쿠데타 세력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스페인을 초토화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발할 무렵, 나의 할머니 이사벨은 스무 살이었습니다. 파시즘은 그녀에게서 친구와 가족, 젊음마저 앗아갔습니다. 화염과 총검을 앞세워 가지각색의 공포를 심었습니다. 오십여 년이 흐른 후에도 그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모든 사건을 간밤의 일처럼 생생히 떠올리는 할머니를 보면 제 가슴마저 저미곤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저 머나먼 전쟁 세대를 이해하려는 후대의 회고록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나라와 세대를 막론한 우리 모두의 상처를 담아낸 기록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자유를 빼앗긴 많은 이들의 말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명 김문영 (이숲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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