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울어서 눈이 부었다고 김보라 감독이 말했다. 인터뷰 전날인 10월2일 〈벌새〉의 ‘10만 파티’가 있었다. 우롱차와 떡을 나눠 먹었다. 영화를 지지하는 ‘벌새단’이 극중 나오는 노래를 ‘떼창’했다. 김 감독은 ‘수많은 은희가 여기에 있어요’라고 쓰인 피켓을 기억했다.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27개나 받았지만 가장 기쁜 순간은 이럴 때다. 관객들에게 손 편지를 쓰기도 했다. ‘저는 제 자신을 견딜 수 없던 밤들에 〈벌새〉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나와 같은 밤을 보낸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길 바랐습니다. 영화가 개봉되고 당신들에게 받게 된 답장은 나를 깊이 위로해주었습니다. 위로라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만남이었습니다.’

한 달 만에 10만명이 봤다. 감응의 방식이 좀 달랐다. 곳곳에서 ‘은희들’이 터져 나왔다. 각자의 역사와 각자의 은희를 고백했다. 〈벌새〉는 1994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을 배경으로 한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우등생이지만 폭력적인 오빠의 그늘, 중학생 은희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유일한 사람은 한문 학원 선생님 영지다. “이제 맞지 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지 맞서 싸워”라고,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라고도 말해준다. 시나리오가 실린 동명의 책에서 김 감독은 벌새의 의미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지만 꿀을 찾아 아주 멀리까지 날아간다고. 은희도 ‘사랑받기 위해서 또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 많은 곳을 날아다닌다’.

〈벌새〉는 묘하다. 7년여의 준비 기간에 3억원 미만의 제작비가 들었다. 1000만 영화는 아니지만 91번 본 관객이 있다. ‘모두 사랑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한번 마음을 주면 엄청 사랑하게 되는 영화.’ 김보라 감독을 만났다.

 

ⓒ엣나인 제공김보라 감독과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왼쪽)이 9월11일 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관객과의 대화를 많이 했는데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면?

많이 운다. 배급사도 이렇게 울면서 하는 GV(관객과의 대화)는 드문 광경이라고 한다. 한 50대 여성 관객은 대학 때와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며 울었다. “내가 이상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상처에 언어가 생긴 것 같다’는 20대 여성의 편지가 마음을 울렸던 것 같다. 그 전엔 ‘내가 예민한 거겠지’ 했다고. 개봉 한 달 후 또 편지를 주셨다. 한 달 동안 자기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써주었는데 너무 감사했다.

1994년 한국에 관한 이야기인데, 왜 ‘94년생’과 해외 관객들도 영화에 감응한다고 생각하나?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다. 해외에선 원래 나이를 잘 안 묻는데 많이 물어서 신기했다. 영화의 시선이 성숙해 나이 많은 사람이 만든 줄 알았다고 하더라. 동안이라는 말을 싫어하는데 그건 칭찬으로 들렸다. 한국에서의 반응은 폭발적인 느낌이 있었다. 아직도 가부장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쁘면서도 슬프고 안타깝다. 이 정도까지 반응한다는 건 겉모습은 다르더라도 비슷한 형태의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의미 같다.

불안한 유학 시절, 중학교에 다시 다니는 꿈을 꾸었고 그게 〈벌새〉의 시작이라는데?

정희진 여성학자가 〈벌새〉를 보고 지금 시대의 프리퀄(기존 작품 속 이야기보다 앞선 시기를 다루는 속편) 같다고 표현했는데 정확한 말이다. 1990년대, 전국에 맥도날드가 몇 개 없을 때 강남 대치동에 있었다. 베네통, 켈빈클라인, 게스 같은 브랜드의 각축장이었다. 국소적인 동네에 미국식 자본주의가 엄청나게 유입됐고 그것의 집약체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아빠가 뭘 하고 몇 동에 살고 무슨 차를 모는지, 비교급의 삶이랄까 지금 전역으로 퍼진 가치관이 그때 있었다. 우리 집이 방앗간을 했는데 아이들이 놀리는 게 당연했고 나도 부끄러운 게 당연했다. 앞서 만든 단편 〈리코더 시험〉을 보고 오빠가 자기도 놀림을 당했다고 했다. 오빠는 공부를 잘해서 나와 다른 세계에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처음 한 말이 그거라 마음이 짠했다. 사람을 본질로 보지 못하는 환경이 어린 시절에 너무 아팠다. 예술가가 될 씨앗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당시 일기를 보면 학교에서 남존여비라는 단어를 배우고 분개해서 써내려간 흔적이 있다.

그 시절이 어떤 의미를 가지나?

화나는 일이 많았다. 학교 수련회에 장애인이 왔는데 조명 아래서 자기 삶이 얼마나 힘든지 울면서 얘기했고, 아이들이 같이 울었다. 그가 퇴장할 때 선생님이 “너네 얼마나 행복한지 알겠지?” 이러는 거다. 우는 애들조차 역겹게 느껴졌다. 뭘 안다고 저 사람을 동정해 우는 건가? 〈벌새〉를 본 중학교 후배의 편지를 받았다. 자기는 지환이 정도의 경제 수준으로 살았고 공부도 그 정도 했는데 마음은 은희였다고 했다.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어릴 때 타워팰리스를 지으려고 집들을 부술 때 나는 마음이 찢어지고 화가 나는데 다른 사람들도 과연 분노할까 생각했다. 그래서 편지가 반갑더라. 그의 SNS 계정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중학교 사진을 올려놓고 ‘은희도 다녔던 이 학교 정말 X 같았다’고 써놨더라(웃음).

대학에 가니 달라졌나?

거기선 ‘강남 출신’이었다. 남들은 구분 짓기 좋아하고 상대의 조건을 보고 판단하려 한다. (대학 졸업 후 유학 간) 컬럼비아 대학에서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부잣집의 백인 여자 친구가 기억에 남는다. 촬영 때문에 집에 갔는데 대저택이었다.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가 재혼했는데 전에는 잘사는 집이 아니었다. 삶이 변해서 좋았던 게 뭐냐고 물으니 침대가 커져서 뛰어놀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 말이 와 닿았다. 부잣집 딸이라는 이유로 많은 아이들이 편견을 가졌는데 깊이 얘기해보니 그 때문에 힘들었다는 게 느껴졌다. 인간이란 똑같은데 왜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착각하고 구분 지을까. 국적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은 원하는 게 비슷하구나.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벌새〉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때 경험으로 한국 사회를 타자의 시선으로 보게 되었고 나의 경험도 비로소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다.

ⓒ엣나인 제공〈벌새〉에서 학원 선생님 영지(왼쪽)는 은희가 처음으로 만난 ‘의미 있는 타자’다.

유년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녹음하고 메모하고 집요하게 기억을 채집했다고 하던데?

감사 노트, 꿈 일기 등 많은 종류의 노트가 있었다. 애도 일기라고 쓰인 노트에는 애도할 것들만 적었다. 나의 역사, 나의 서사에 집중해 탐구하는 시간이 있었다. 20대 중반 명상 모임에서 부모의 장단점과 그로부터 물려받은 것, 부모를 싫어하면서도 부모와 닮은 점, 10대부터 20대까지 큰 사건을 정리했다. 자기 삶의 전문가가 된다는 마음으로 적었다. 내 삶의 전문가가 되면 결국 남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게 있더라. 우리는 결국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최은영 작가가 ‘어린 나의 고통은 어른이 된 나의 고통에 비해 조금도 사소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생생했다’고 했다.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그 말이 신기한데, 나는 못 잊었던 것 같다. 못 잊고 힘들어서 작업을 시작한 거다. 내가 편하려고 시작한 건데 이렇게 영화로 만들어지고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정상 가족’인 은희네는 같이 살지만 각자의 책임만 수행한다. 그게 너무 불안하다.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우환이 닥친다든가, 좋은 일이 있고 나서 병원에 가는 등 충돌하는 장면을 만들었다. 큰 병원에 있을 때는 낯선 이들의 환대를 강조했지만 작은 병원에 다니면서는 긴장감이 느껴지길 바랐다. 영화가 잔잔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균열이 보여야 했다. 유리 조각을 발견하는 장면이나 구멍 난 스타킹, 재난을 예고하는 음악 같은 장치를 넣었다. 내 삶의 일부분을 반영한 장면도 있지만 관객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건 허구로 쓴 장면이다. 예를 들어 (1002호에 사는 은희가 실수로 902호에 가서) 엄마를 부르는 오프닝 장면은 마음속의 두려움 같은 걸 시각화한 거다.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에서 작가적인 실험이었다. 편집 단계에서 톤이 많이 튄다고 했는데 넣자고 했다. 좋아해주셔서 기쁘다.

은희가 ‘처음으로 만난 의미 있는 타자’가 영지다. 캐릭터의 배경이 많이 생략된 것 같다.

다 보여주는 것보다는 덜 보여주는 게 매력 있을 것 같았다. 잠언 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이니 많이 보여주기보단 어떻게 하면 김새벽씨의 연기를 통해 대사를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실제 모델이 된 한문 선생님이 있다. 친한 건 아니었고,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나 단독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의 일별 같은 걸 느꼈다. 페미니스트였을 것 같고 학생운동도 열심히 한 것 같다. 이전에 만난 여자들은 대체로 여성성을 수행하고 있었다. 자기로 살아가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목도한 게 어린 나이에 즐거운 경험이었다. 인상이 강하게 남아 영지를 만들게 되었는데 (캐릭터는) 살아오며 만난 많은 영지들의 총합이다.

왜 1994년이고 왜 성수대교를 영화에 담아야 했나?

성수대교 사건 사진을 찾아 보는데 몸의 통증이 있었다. 국가적 재난은 알지 못하는 사이 공동의 트라우마로 남는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난 날 성수대교가 무너져서 아이의 생일이 되면 그 사건이 떠오른다고 하는 글을 봤다. 그날 무얼 하고 있었는지 우린 다 기억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충격에서 회복되기 위한 작업을 했나. 공동의 장에서 얘기되지 않고 덮인 채 곪아 있었다. 세월호가 그래서 더 아프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12년부터 시나리오 작업을 했는데 세월호를 겪으며 반복된다고 느꼈다.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은희의 일상과 성수대교를 연결하고 싶었다. 성수대교 자체가 균열의 시작 같았다. 삼풍백화점을 비롯한 물리적 붕괴가 IMF(외환위기)라는 경제적 붕괴로 이어졌고, 그 후엔 정신적 붕괴를 맞이한 것 같다. 온라인의 혐오 문화를 보면 〈벌새〉가 진짜 프리퀄이다. 성수대교 사건은 개인적으로도 충격적인,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매번 바뀌는데 지금 떠오르는 건 은희가 밤길을 혼자 걸어오다가 문득 관객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다. 영지와 은희가 충만한 대화를 나눈 뒤의 장면이다. 의도했던 대로 나왔다. 아름다움 속에 늘 삶의 고통이 같이 느껴지는 것 같다. 기쁘지만 곧 다가올 상실도 예감한다는 느낌으로 연출했다. 기쁨과 슬픔이 어떻게 함께하는지, 그 무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영화로 잘 드러나니까 신기했다. 사람들이 잘 이해해주어서 고맙다. 물론 영화를 아예 이해 못하는 분이 많은 것도 알고 있다.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과의 대화가 책에 실려 있다. 그는 〈벌새〉가 ‘별일 없는’ 소녀의 이야기를 거대한 서사시로 재탄생시켰다고 했다.

의도한 걸 정확한 언어로 이해해주니까 좋았다. 벡델이 한 일이 그거다. 개인의 서사를 거대한 우주로 묘사해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다. 첫 작품이 잘되고 두 번째 작품이 잘 안 되었을 때의 속상한 기억 같은 것도 솔직하게 나눠주었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날 때의 기쁨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갑자기 상을 세 개나 받았고, 좋지만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의 집에 가서 환대받고 자연과 벗 삼아 이야기하니 내가 정렬되는 느낌이 들고 너무 행복했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잘 나누면 궁극의 행복감 같은 게 있다. 작업실에선 나와 벡델이 이야기를 나누고, 거실에서는 그의 아내와 내 애인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 생각이 많았다고 했는데 그런 성향이 영화를 하기로 결심하는 데 영향을 주었나?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기 싫어서 예술고에 갔다. 대학도 연극영화과에 갔는데 첫 영화를 만들고 좋았던 게, 내가 누구라고 일일이 붙들고 얘기하지 않아도 됐다. 효율적이었다. 그때까지도 ‘강남 여자아이’로 보는 눈이 있었다. 심지어 운동권 느낌의 동아리 모임에서 나한테 대놓고 너는 강남 애니까 이런 데는 안 어울린다고 이야기했다. 지금은 친해진 동기도 우리가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줄 알았다고 했다. 영화를 만들고 나서 그런 편견과 시선이 일순간 사라지는 걸 느꼈다. 대학 때는 과제를 열심히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지만 완성도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대학원에 가서는 관객에게 가 닿는 웰메이드(잘 만들어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학교 자체가 〈그린북〉 〈리틀 미스 선샤인〉같이 선댄스 영화제에서 호평받는 영화를 지향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제작 기간이 길어진 것도 있다.

ⓒ아르테 제공그래픽노블 작가 앨리슨 벡델(오른쪽)과 김보라 감독이 대담을 나눴다.

열 번 정도 시나리오를 고쳤다는데?

열 번 넘는다. 시나리오에는 부끄러움이 없다. 영화는 러닝타임 때문에 잘라내 아쉽지만 시나리오는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으로 잘 쓴 것 같다. 남들이 봐도 잘 썼다는 게 아니라 내 기준에는 만족한다. 언제나 자기 기준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이야기’에서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과정을 들려달라. ‘원형적 서사’라는 말을 쓰더라.

북유럽 친구 중 한 명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더니 자기가 중학교 때 도시락을 싸갔는데 반찬이 부끄러웠다는 얘기를 했다. 유럽 친구가 그러는 걸 보니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구나 싶었다. 각자 좋아하는 장면도, 꽂히는 지점도 달랐다. 미국 친구도 이해하더라. 성수대교는 9·11 테러로 치환해 읽었다. 각자 재난의 경험이 있고 이 영화가 보편적으로 통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았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모니터링 받으며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 부분은 솎아내기도 했다.

실제 가족들과는 화해했다고 들었다.

가족과의 화해는 20대부터 일어났다. 다 도마 위에 올려서 가부장성에 대해 질문했고 오빠와 아빠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아빠가 여러 번 사과했고 그 부분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가족 채팅방을 보면 프로필 사진이 모두 〈벌새〉다. 다들 홍보하고 응원한다. 왜 이런 걸 하냐고 할 수도 있는데 같이 기뻐해준다. 가족 화해의 끝에서 다 같이 해낸 영화처럼 느껴진다. 촬영이 다가왔을 때 불안했는데 아빠가 정상에 오르기 전이 가장 두려운 거라며 ‘네가 지금 두렵다는 건 다 왔다는 얘기’라고 해주었다. 울컥했다. 그 전엔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소중하다. 나는 그랬지만 나의 방법이 누구에게나 맞는 건 아니라 이런 말을 할 때 조심스럽다.

영화에 대한 인상적인 비판이 있었다면?

성수대교를 도구화했다는 의견은 관객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어떤 사건이든 영화화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태도인데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소외시키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강간 장면을 다룰 때 강간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는 모든 여성이 소외되지 않는 방식으로 다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성수대교를 다루면서 어떤 사람의 죽음도 대상화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으려 했다.

〈벌새〉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기억이 있다면?

20대에 했던 모든 행동이 〈벌새〉의 자양분이 되었다. 여성주의 안에서 즐겁게 놀면서 여성의 서사라든가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고, 그런 내가 30대가 되어 〈벌새〉를 만든 건 자연스럽다. 페미니스트 단체의 친구들과 ‘여성과 평화’라는 콘셉트로 베트남에 간 적이 있다. 한국군이 학살을 한 곳이었는데 그곳 전쟁박물관에는 무기가 아니라 여성의 머리빗, 신발 같은 일상용품이 있었다. 그런 방식이 여성적이라고 느꼈고 실제 전쟁이란 건 일상의 폐허라고 생각했다. 전쟁뿐 아니라 모든 역사가 여성이 서술했을 때 다르게 적힌다. 여중생의 묘사 방법만 해도 그렇다. 뭐만 해도 깔깔 웃고 화사하게 그려지는데 과연 그런가. 세상의 더러운 면을 본격적으로 포화 맞듯 맞닥뜨리는 시기다.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벌새〉는 2시간18분짜리다. 여성 감독이 만드는 장편 영화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누가 여중생 이야기를 길게 보겠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나중에 사과했지만 당당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게 용인되는 분위기가 있다.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동성애 혐오 발언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누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남자아이 성장 서사의 길이를 논할 것이며, 몇 퍼센트가 자전적인지 캐물을까. 남자들의 성장 서사는 묵직하게 느껴지는데 여자의 성장 서사 하면 세심하고 귀여울 거라는 추측이 있는 것 같다. 거기서 가장 먼 서사로 만들려고 했다. 노래도 그렇고 시각적인 스토리텔링도 묵직하고 장엄한 마스터피스(명작) 느낌이 나도록 노력했다.

다음 작업이 부담스럽진 않은가?

신기하게도 부담스럽지 않다. 하면 잘하고 싶은데 안 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뭘 안 만들 때의 행복도 되게 크다. 원형적 서사를 만들기까지 사람들 얘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고 힘들었는데, 안 하고 있을 때 되게 행복하다. 그런 건 있다. 공장에서 찍다시피 하는 상업영화는 안 만들 거다. 내 색깔을 담는 게 아니면 만들 필요가 없다. 두 번째 작품은 내 시나리오가 아닌 걸로 하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몰라서 말을 아끼고 있다. ‘카펫 아래의 개들’이라는 SF 영화도 구상 중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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