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형영당 일기〉라는 단막극이 논란 끝에 방영되었다. 논란이 된 이유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퀴어’ 소재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2006년 극본 공모전 단막극 부문 대상을 받으며 눈 밝은 관계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소재라는 이유로 8년 뒤 동성애를 반대하는 집단의 거센 항의 끝에 주요 내용이 상당 부분 수정된 후 방영될 수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19년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는 동성을 사랑하는 작곡가가 주요 인물로 등장했다. 또한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문제를 다루었다. 동성애자가 논란의 대상이나 문제적 인간, 비일상적 존재가 아닌 보통의 존재로 일상의 공간에 배치되고, 그들의 인권이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적 주제로 대중과 만나기까지 꽤 지난하고 험난한 과정이 필요했다.
사회는 성실하게 변한다. 대중문화는 그런 변화하는 사회를 적극 반영하는 장르다. 물론 누군가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어떤 이는 관습에 갇혀, 또는 취향의 차이로 인해 사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데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필요하다면, 보편적인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대중문화를 주요하게 참고해야 한다.
국민을 ‘불법적 존재’로 살게 하는 법과 제도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는 꽤 큰 폭으로 바뀌고 있다. 관습과 편견의 저항은 강력하지만, 더 나은 것을 지향하는 대중은 새로운 문화를 생산하고 있다. 자신을 “떨어질 솜털, 져버릴 꽃”으로 소비되는 존재가 아닌 “나무(I’m Tree)”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여성 아이돌 그룹과 보깅 댄서들의 퍼포먼스에 환호하고, 젠더나 인권을 주제로 한 책이나 강좌는 핫한 문화 콘텐츠가 되었다. ‘대세’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존재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할 기반은 형성된 것임을 몇 년 사이 대중문화의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변화의 덜미를 잡아채는 일 또한 벌어지고 있다. 연세대학교는 필수 교양과목으로 시행할 계획이던 ‘연세 정신과 인권’ 강좌를 선택과목으로 변경했다. 해당 과목은 전임 교수 15명이 노동·아동·장애·난민·성·환경·생명·사회정의· 교육 등 사회 이슈를 다루는 온라인 과정이다. 커리큘럼에 인권·난민·젠더 등의 용어가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개신교계를 비롯한 세력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끝에 ‘필수’를 ‘선택’으로 변경한 것은 온당하지 않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최영애 위원장은 차별금지법이나 인권기본법 문제에 관해 ‘총선 때까지 거론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알려졌다. 역시 개신교계를 비롯한 동성애 반대 집단의 반발 때문이다.
정치는 무얼 하고 있을까? 조국 법무부 장관은 동성 결혼의 법적 인정은 이르다고 밝혔다. 개혁이 필요하다면 강한 반대를 뚫고서라도 실행해야 한다는 박력 넘치는 대의로 가득한 정부가 차별금지법 제정이나 인권 과제 앞에서는 쉽게 뒷걸음질하며 ‘나중에’를 외친다. 이 정부의 이름이 ‘나중에 정부’였던가?
〈60일, 지정생존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루는 권력을 비판한다. 선거에서 이겨 차기 정부에서 제일 먼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향해 레즈비언 영화감독은 이렇게 일갈한다. “차별금지법은 특혜를 주는 법이 아니에요. 우리 같은 소수자들은 그 법이 있어야 비로소 보통 사람이 되는 거죠. 선심 쓰듯 말하지 마세요. 대행님은 오늘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뿐이니까요.” 차별과 혐오의 신을 섬기는 종교, 인권을 선택의 회색지대로 밀어내는 교육, 국민을 불법적 존재로 살게 하는 법과 제도가 변화의 발목을 잡는 한, 우리 사회는 ‘보통’의 사회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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