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양한모

AOA의 ‘너나 해’는 단연 ‘올해의 무대’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엠넷의 걸그룹 경연 〈퀸덤〉에서 마마무의 원곡을 재해석했다. 멜로디는 원곡보다 부드럽고 매끄럽게 연출해 관능적인 질감을 더하고, 래퍼 지민의 앙칼진 랩이 틈틈이 꽂혔다. 남성 보깅 댄서들을 기용한 과감한 연출을 두고 남녀 성 역할의 반전이라는 해석과 다양성의 적극적인 포용이라는 의견이 대두됐다. 절도 있는 폭발력으로 무대를 장악한 멤버들의 기량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무엇보다 AOA가 이 무대를 준비했다는 것이 가장 큰 흥분을 안겼다. 2014년을 강타한 ‘짧은 치마’ ‘단발머리’ ‘사뿐사뿐’ 3연작으로 가요계의 정상을 차지한 이 그룹은, 납작하게 표현된 ‘섹시’ 이미지와 그에 결부된 난폭한 시선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너나 해’는 그들이 잿더미에서 일어나 자신의 길을 스스로 걷겠다는 선언처럼 보이고 들렸다. 구질구질한 통속을 쾌감으로 담아냈던 ‘짧은 치마’에 몸서리치면서도 AOA를 미워할 수 없었던, 그래서 그들의 고난에 마음 쓰였던 이들에게는 이보다 짜릿한 소식이 있을 수 없었다.

무대가 전파를 탄 후, 보깅 댄서 팀의 섭외까지 멤버 지민이 직접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곧이어 이 방송에 음악감독이 없어서 무대기획을 출연자들이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지민은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아티스트였다. 2012년 데뷔 초 밴드를 병행하는 콘셉트에서 기타를 담당하며 많은 여성 팬의 주목을 받았다. 걸그룹 세계에 날카로운 코맹맹이 랩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2015년 엠넷의 〈언프리티 랩스타〉에 나와서 걸그룹 래퍼에 대한 편견을 시원하게 부숴버린 이도 그였다.

“꽃이 되기 싫다, 나는 나무다”

하지만 AOA의 연이은 히트곡에서는 ‘헤이 여신’이라 불릴 정도로, 인상적이지만 지나치게 반복된 여음구 “헤이”를 담당해야 했다. 달리 말해 프로덕션은 그에게 그 이상의 것을 이끌어낼 줄 몰랐던 셈이다. 그가 해낸 것이나 할 수 있는 것과 별개로, 그에게 주어진 틀은 좁았다. 〈퀸덤〉마저도 딱히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획은 아니다. 방송은 굳이 “(우리보다) 한 수 위, 아래”라는 말처럼 걸그룹 사이에 자존심 싸움을 부추기려 부단히 애쓴다. 방송 초반에 출연자들의 경쟁에 관해 지민과 (여자)아이들의 전소연이 유독 “재미있겠다”라며 의욕을 불태우는 장면이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엠넷의 여성 아티스트 서바이벌을 겪어보았고, 치졸한 구도를 극복하고 나왔다.

‘너나 해’의 무대를 다시 본다. 인트로에서 지민은 “꽃이 되기 싫다, 나는 나무다”라는 날카로운 발언을 던진다. 이 한 곡에는 AOA의 절치부심과 생명력, 의지가 담겨 있다. 그 속에서 지민은 기획자이자 퍼포머로서 기량과 감각을 한껏 발휘하며 본때를 확실히 보여줬다. 주어진 판의 지붕을 기어이 뚫고 나와버리는 나무의 줄기였다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

기자명 미묘 (〈아이돌로지〉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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