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1975년에 〈동물 해방〉(연암서가, 2012)을 출간한 피터 싱어는 동물 해방 운동과 동물권 논의의 선구자로 꼽힌다. 근대 세계의 초석을 놓은 철저한 이성중심주의자 데카르트는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 차이로 이성의 유무를 들었다. 싱어는 이 분야의 고전이 되어버린 책에서 동물도 똑같이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는 생명체라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주장을 고스란히 따르면 지능이 낮은 인간과 높은 인간은 이성을 활용하는 능력에서 동일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달리 취급받아야 한다. 반면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는 종차별 반대주의자들(동물 해방론자)은 차별당하는 동류의 인간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들과 연대한다.

“이 시점에서 역사적인 여담 한 가지를 들려주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일부 사람들은 ‘인간 우선’이라는 생각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동물 복리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인간보다 동물을 더 배려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동물 복리 운동의 지도자들은 동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인간에 대해 훨씬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실제로 흑인과 여성 억압에 대항하는 운동의 지도자가 동물 학대에 반대하는 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한 경우는 실로 많다. 너무 많기 때문에 예상치도 않게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종차별주의가 일맥상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이다.” 이 인용문에서는 누락되었지만, 싱어는 동물 복리에 민감한 사람들은 아동학대 방지에도 적극적이라고 한다.

동물 해방 운동에서 싱어가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그의 책을 읽고 많은 독자들이 공장식 축산과 동물실험 시 겪게 되는 동물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채식주의와 비거니즘(veganism)을 선택하게 되었다. 싱어는 자신의 책 서문과 마지막 장에서 동물 해방의 특수한 어려움을 말하면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뭇 인간들과는 달리 피해자인 동물은 자신들의 입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싱어는 〈동물 해방〉의 결말을 아래와 같은 의문문으로 끝마쳤다.

“동물 해방 운동은 다른 어떤 해방 운동보다도 인간 편의 훨씬 큰 이타적 태도를 요구한다. 동물들은 스스로가 해방을 요구할 능력이 없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에 항의하는 투표, 시위 또는 거부 운동을 벌일 수도 없다. 도덕성이 자기 이익과 부딪칠 경우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우리의 횡포가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지배하에 있는 생물 종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종식시킴으로써 진정한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음을 입증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 모두가 개별적으로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하는가에 달려 있다.”

싱어의 마지막 질문을 이어받은 것이 코린 펠뤼숑의 〈동물주의 선언〉 (책공장더불어, 2019)이다. 싱어로부터 동물 해방을 학문적·문화적·도덕적 운동에 국한해서는 아무런 해결도 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전수받았던 것이 분명한 그는, 인간이 동물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는 없지만 동물의 권리는 오직 인간에 의해서만 발의될 수 있다는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다. 동물은 권력을 쟁취할 수도 없고, 자신들의 피해를 고발할 법정을 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의 이익을 인간의 공적 정치에 포함”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지은이가 선언한 동물주의의 핵심이다.

동물을 무한정 착취하는 체제

동물주의(Animaliste)란 “동물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이 곧 인간의 권익 옹호이며, 동물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일이라 확신하고, 윤리와 정의에 동물을 포함”시키는 정치를 목표로 삼는다. 공장식 축산과 동물실험 등 동물에 대한 가혹한 착취 행위가 끝나려면 동물주의를 표방한 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혁명이다. 다른 단계의 문명으로의 이행이다.”

〈동물 해방〉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연암서가 펴냄

동물주의를 표방한 동물 정치(zoopolitique) 혹은 동물 정치 공동체(zoopolis)는 굉장히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동물의 권익 옹호가 곧 인류의 권익을 옹호하는 일이라는 동물주의는 그렇게 난해한 개념이 아니다. 예컨대 동물의 대량 소비를 통해 인류는 어떤 이익을 얻는가? 고기를 얻기 위한 지구적 규모의 산업이 30억명이 시달리는 극단적인 기아와 영양 불균형에 책임이 있음은 이미 알려져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사육되는 가축의 먹이로 쓸 대두를 재배하기 위해 숲이 파괴되는 것도, 매년 71억t의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가축이 지구온난화의 일곱 번째 주범인 것도, 똑같은 칼로리를 얻기 위해 식용식물에 드는 물보다 가축에 드는 물이 몇 배나 많은 것도, 공장식 축산이 인수 공통 전염병의 원인인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불쾌한 진실은 그저 뉴스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의 고통을 최대한 외면하다가 고통의 일부가 드러날 때만 간혹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악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것이다. 악한 일이 벌어지려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동조가 필요하다. 동물을 무한정 착취하는 체제는 경제 관계자들은 물론 이 같은 상품을 소비해 이에 동조하는 공모자들이 있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하다. 인간은 동물이 ‘감수성’을 지녔음을 알면서도 동물을 도덕적으로 배려하지 않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섬세함을 억압하는 법을 배운다.” 동물주의자가 되는 것은 “삶 전체를 바꾸는 결정”이기에, “앞으로는 전과 같이 살 수 없다”는 각오로 생명에 대한 인식과 일상적인 소비 습관을 완전히 변화시켜가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와 달리 비건주의자들은 동물과 동물을 이용해 생산된 그 어떤 것도 먹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을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모든 행위를 거부한다. 비건주의자들은 시각장애인을 돕기 위해 개를 교육하고 안내 서비스에 이용하는 것에도 반대한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술 사이의 경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이보그(cyborg) 이론가 도나 해러웨이는, 동물을 자연 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최상이라는 비건주의자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러웨이 선언문〉(책세상, 2019)에 실려 있는 ‘반려종 선언’에 따르면, 그런 본질주의는 인간과 동물(자연)이 맺어온 ‘자연문화’의 창발적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반려동물 역시 다양한 소질 훈련을 통해 잠재력을 끄집어낼 때 성취와 행복을 느낀다. 동물주의가 하나의 사상이라면 이런 반론이 동물주의를 더욱 풍성하게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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