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돼지열병이 무서운 이유
  • 나경희 기자
  • 호수 629
  • 승인 2019.10.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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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DNA를 지니고 있어 주변 환경 변화에 잘 견딘다. 고기를 냉동해도 1000일 동안 버틴다. 70℃ 이상에서 최소 30분 이상 조리해야 비로소 멸균된다.
ⓒ연합뉴스9월24일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확진된 경기도 김포시의 한 양돈 농장에서 방역 당국 관계자들이 돼지를 살처분하고 있다.

9월16일 오후 6시,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한 돼지 농장에서 고열에 시달리던 어미 돼지 다섯 마리가 쓰러졌다. 농장 주인은 농림축산검역본부(검역본부)에 신고했고, 이튿날 국내 최초로 아프리카돼지열병 확진 판정이 나왔다. 농장 주인이 소유한 다른 농장에 있던 돼지까지 3950마리가 곧바로 살처분됐다.

관계 부처가 소독시설과 통제 초소를 세우고 48시간 동안 전국의 모든 돼지 농장과 도축장 등 관계시설의 출입을 막는 ‘스탠드 스틸(가축, 관계자 등에 대한 이동 중지)’ 조치를 발령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일주일 만에 경기도 연천군·김포시, 인천시 강화군 등지로 퍼져나갔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초기 방역망이 뚫렸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한국양돈수의사회 김현섭 회장은 <시사IN>과의 전화 통화에서 “애초에 동시다발적으로 감염이 됐다가 지금 속속 증상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역학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방역이 뚫린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검역본부에 따르면 9월25일 오후 6시 기준, 총 32개 농장에서 6만283마리가 질병 확산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처분되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African Swine Fever Virus, ASFV)는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지만, 돼지나 멧돼지 등 돼지과 동물 사이에서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검역본부는 이번에 발견된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중국 등지에서 유행 중인 고병원성 급성형이라고 설명했다. 전파 속도가 빠르고 치사율이 높다는 의미다. 3~8일 안에 죽을 확률이 최대 90~100%에 달한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에 감염된 모든 돼지가 반드시 죽는 건 아니다. 막상 이 바이러스가 창궐한 아프리카 야생 돼지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더라도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고 살아간다. 이 지역 돼지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바이러스에 적응된 면역체계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1921년 케냐에서 처음으로 발병이 보고된 이후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원래 아프리카 대륙에서만 발생하는, 일종의 풍토병이었다.

아프리카 풍토병이 전 세계적인 위협이 된 것은 1957년부터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우연히 포르투갈 리스본 공항에 ‘착륙’했다. 앙골라 루안다 공항을 출발한 한 비행기에서 제공된 기내식이 하필 아프리카돼지열병에 감염된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이었고, 공항에서 수거한 음식물 쓰레기가 다시 포르투갈 돼지 농장으로 향하면서 유럽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아프리카를 경유한 선박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통해 조지아, 러시아 등 동유럽 국가에도 바이러스가 퍼졌다.

현재 세계 53개국이 아프리카돼지열병과 싸우고 있다. 2017년 유럽식품안전청(EFSA)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유럽 각국에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전염된 원인 1위가 ‘이동된 감염원(38%)’이었다. 감염된 돼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거나, 감염된 돼지로 가공한 축산물이 유통된 경우다. 2위는 ‘돼지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먹인 경우(34%)’다. 아프리카 풍토병이 유럽과 동유럽으로 퍼져나갔던 이유도 감염된 축산물이 포함된 음식물 쓰레기를 사료로 썼기 때문이다. 편리해진 교통과 더불어 국제적인 식품 네트워크, 육류 대량생산 체계 확대가 바이러스 확산을 뒷받침한 셈이다.

아시아에서는 2018년 8월 최초로 중국에서 확진 판정이 나온 이후 몽골, 베트남, 북한, 라오스, 미얀마, 필리핀 등지로 질병이 퍼져나갔다. 북한은 지난 5월30일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했다고 보고한 바 있다. 국가정보원은 9월24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인해 북한 평안북도의 돼지가 전멸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아직 ‘공격적 살처분’ 할 때는 아니다”

검역본부는 바이러스 유입 경로에 대해 아직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만 최초 확진 판정을 받은 농장에서 돼지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먹이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태풍에 의한 바이러스 침투 가능성도 제기된다. 9월26일 현재 정확한 전파 경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국가는 즉시 세계동물보건기구에 알려야 한다. 국가 간 감염된 돼지고기 수출입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정부는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이후로 중국산 돼지고기 수입을 금지해왔다. 지난해 8월24일 중국 여행객이 들여온 순대와 소시지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 유전자를 확인한 이후로 관계 부처는 공항과 항만 등지에서 검역 활동을 강화한 바 있다.

발병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를 잡을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은 없다. 바이러스 발생 지역에서 돼지를 ‘전멸’시키는 선택을 내리는 건 아직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이른바 ‘DNA 바이러스’에 해당한다. DNA를 지닌 바이러스라는 뜻이다. DNA 바이러스는 상대적으로 주변 환경의 변화에 잘 견딘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고기를 소금에 절여도 182일 동안 생존하고, 냉동을 해도 1000일 동안 버틴다. 70℃ 이상에서 최소 30분간 조리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멸균된다. 음식물 쓰레기에 바이러스가 남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이 바이러스는 유전체의 크기가 크고, 그 안에 담긴 유전자형도 다양하다. 구제역 바이러스의 유전자형이 7가지인 데 비해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의 유전자형은 24가지나 된다. 서로 다른 유전형의 바이러스들은 각각 다양한 항원(숙주를 공격하는 물질)을 만들어낸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만들어내는 항원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아직까지 각 항원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다.

예방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해답은 소독과 살처분 외에 마땅치 않다. 관계 당국은 당장 살처분을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9월26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살처분 범위를 확진 판정 농가 반경 500m에서 3㎞로 확장했다. 농가 인근 3㎞에 생존해 있던 모든 돼지는 살처분한다는 의미다. 이번 아프리카돼지열병 살처분은 주로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안락사시킨 후, 매장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2010~2011년 구제역 사태 당시 돼지 생매장 등이 비판을 받으면서 그나마 개선된 방식이다. 일각에서는 급하게 살처분 범위를 늘릴 경우 안락사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고 매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아직 의식이 깨어 있는 채로 돼지들이 생매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한국양돈수의사회 김현섭 회장은 9월26일 “정부가 스탠드 스틸 명령을 엄격하게 유지하고, 감염된 농장을 관리하면 전파를 막을 수 있다. 살처분 지역을 넘어 지역 일대의 모든 돼지를 몰살하는 ‘공격적 살처분’이라는 단어를 꺼낼 때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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