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아이의 카카오톡이 위잉, 위잉 울려댄다. 어지간한 어른도 잠자리에 들 시간에 아이들의 사교활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대부분 학원 마치고 집에 와서 한숨 돌리는 이 시간이 유일하게 짬이 맞는 때다. 수다 떨고 바로 자면 모르겠으나, 일부는 그러고 또 눈 비비며 학원 숙제를 해야 한다. 고작 중학교 1학년생이 이렇다. 자유학년제 기간이라 학교 시험 부담은 없지만 이참에 ‘바짝 달려놔야’ 하는 것이다. 상당수는 초등 고학년부터 이런 일과를 이어오고 있다.
미용 관련업에 종사하는 그이는 아이를 동남아시아의 한 국제학교로 보낸 뒤 주 7일 ‘바짝 벌고’ 있다. 근무처가 쉬는 날에는 다른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우리나라 학원비를 생각하면 물가 싼 나라의 국제학교에 보낼 만하다며, 영어라도 제대로 배울 테고 무엇보다 여기서는 바빠서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는데 홈스테이에서 ‘따순 밥’ 먹고 또래와 어울리니 좋다고 역설했다. 큰애 적응하는 것 봐서 둘째도 데리고 갈 생각이란다. 부모가 외국에 함께 거주해야 하는 대학 특례입학 요건을 고려한 듯했다.
교육은 더 이상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아니다. 오히려 계층 간 넘나듦을 허락하지 않는, 계급적 차이를 공고히 하는 콘크리트 천장으로 작동한다. 좋은 대학 나와서 떵떵거리고 잘살라고, 잘살려고 너나없이 이렇게 고된 건 아니다. 불안해서 그렇다. 부와 지위의 대물림이라는 양극화 현상이 심해질수록 대학으로 대표되는 ‘학벌 자본’이 마지막 동아줄인 것이다.
수시 덕분에 그나마 학교가 입시학원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수시는 수상하고 정시는 정직하다’는 주장도, 균형점을 찾으려는 교육 당국의 여러 시도도 저마다 일리가 있다. 가능한 다수에게 좋은 방안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봤자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제아무리 좋은 정책과 제도라도 대학 입시라는 ‘깔때기’를 통과하는 이상 아수라장을 거쳐 엉망으로 수렴돼버리기 때문이다.
해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해보았다. 재벌 개혁보다 사학 개혁이 어렵고, 부동산 규제보다 사교육 규제가 힘들다는 것도 절감했다. 학교 선택권은 사실상 없고 학생 선발권도 포장이라는 걸 모두 안다. 그 결과 전쟁 같은 경쟁을 채 자라지도 않은 아이들이 매일 치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초등생의 평균 학습시간이 대학생보다 길다. 사회 전체가 아이들을 학대하는 꼴이다. 미친 짓이다. 차라리 경쟁 없는 ‘대학 평준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더 멀쩡하고 현실적이라고 본다.
합리적이고 정교한 ‘대입 추첨’ 시스템 가능
국공립대 통합이나 공영형 사립대 같은 방안도 이미 나와 있다. 심화시키면 길이 보인다. 지원 뒤 무작위 추첨이라는 기본 얼개를 기반으로 공정한 장치를 갖추면 ‘뺑뺑이’로 대학 가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50년 전 중학교 무시험 배정에 쓰인 은행알 뽑던 물레를 누구도 불공정하다고 하지 않았다. 연이어, 고교 평준화 정책을 시행했고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학력 수준이 떨어진다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게 입증됐다. 게다가 지금은 수십, 수백만 건의 자기소개서와 교사추천서에 쓰인 문장의 유사성을 탈탈 털어내고 학교별 수상 실적의 난이도까지 비교해내는 프로그램 기술을 지닌 시대이다. 합리적이고 정교한 대입 추첨 시스템을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중등교육 제대로 받은 아이들을 부모 배경 없이, 차별 없이, 편견 없이 뽑아 고등교육은 대학이 책임지자. 못 따라가면 유급이나 낙제시키고 따라가면 잘 가르쳐 졸업시키면 된다. 여기서 또 다른 경쟁이 일겠지만, 적어도 그건 성인기 이후 제 깜냥과 선택에 따른 게 아니겠는가. ‘뺑뺑이’로 대학 가자.
-
아직 젖을 떼지 못한 대학생들
아직 젖을 떼지 못한 대학생들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대학병원 인턴·레지던트의 부모들이 조를 짜서 간식을 넣어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유명 대학병원일수록 부모의 ‘뒷바라지’가 극성이라고 한다. 대학 공부 마치고 월급도 받는 멀쩡한 성인...
-
아이에게 아직 친구가 없다면
아이에게 아직 친구가 없다면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새봄, 학부모 처지에서는 어떤 교사를 만날까 궁금하지만 아이들은 머리가 굵어갈수록 ‘선생님은 어차피 선생님. 거기서 거기’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올해 중학교에 진학한 내 아이를...
-
아이들은 뛰는데 성교육은 걸음마
아이들은 뛰는데 성교육은 걸음마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아이 아빠가 옷을 고르며 “남자는 핑크지” 했다. 아이가 나무랐다. “그거 편견이야.” 얼마 전 휴대전화를 바꿀 때에도 이 말을 했는데 당시 아이는 시큰둥하고 나만 웃었다. 그렇다...
-
공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위하여
공교육 걱정 없는 세상을 위하여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중학교에는 듣도 보도 못한 교내 대회들이 정말 많다. 내 아이 학교에서는 지난 1학기에만 스물다섯 개였다. 매주 한 개 이상이다. 이런저런 발표나 실험, 글쓰기, 겨루기, 그리기 ...
-
‘정시 확대’가 가져올 딜레마
‘정시 확대’가 가져올 딜레마
천관율 기자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시간이 갈수록 ‘자명한 시대정...
-
“그 집 아이가 어느 대학을 다니는데···”라는 말버릇
“그 집 아이가 어느 대학을 다니는데···”라는 말버릇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누구나 ‘장수생’ 한 명씩은 알고 있을 것이다. 수능만 내리 몇 년째 보고 있는 젊은이들 말이다. 지인의 아들은 삼수 끝에 붙은 대학이 마음에 안 든다고 군에 입대하고도 휴가 기간...
-
아이 보면 한숨 나오는 당신 잘 키우고 계신 거다
아이 보면 한숨 나오는 당신 잘 키우고 계신 거다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분리수거를 하는데 한 아이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안 타. 엄마가 태워다준대.” “코로나 위험하다고.” “그래도 빠지지 말래.” “몰라. 문 닫았으면 좋겠어.”코로나19 감염이 ...
-
‘시험 없는 챌린지’를 응원한다
‘시험 없는 챌린지’를 응원한다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처음 개학이 연기되었을 때 아이는 “‘자유학년제’도 있는데 ‘자가학기제’ 못할 게 뭐 있냐”라며 ‘슬기로운 자가생활’을 장담했다. 좋아하는 배구는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