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상당한 걱정거리다. 게다가 북한 지도자 김정은은 매우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다. 북한 문제는 공화·민주 양당의 초당적 대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9월11일 전격 경질된 존 볼턴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후임으로 임명된 로버트 오브라이언 신임 보좌관이 한 말이다. 그는 그동안 국무부 인질문제 담당 대통령 특사로 활동해왔다.
워싱턴 외교가는 오브라이언 신임 안보보좌관의 임명을 계기로 북한·이란을 포함한 주요 외교 현안에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지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극우적 이념에 치우친 볼턴 전 보좌관과 달리 법률가 출신인 그는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2005년 이후 최근까지 국무부와 국방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제 외교안보 경험을 쌓았다. 볼턴 전 보좌관에겐 없는 균형감각을 갖추었다는 평가다. 미국 행정부 내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후하다. 최소한 내년 11월 대선 때까지 전 세계 주요 외교안보 현안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을 보좌할 수 있는 적임자로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이고 폼페이오 국무장관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점을 고려할 때 외교안보 라인의 윤활유 노릇을 할 수 있으리라 보인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고집불통인 볼턴 전 보좌관은 경질되기 전날까지도 이란 문제로 트럼프 대통령과 격한 언쟁을 벌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제재 완화에 긍정적이었던 반면 볼턴 전 보좌관은 초강경 의견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대통령과의 불화가 경질의 주된 요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주장이 강했던 볼턴 전 보좌관과 달리 오브라이언 신임 보좌관은 외교안보 부처의 의견을 조율하는 데에 충실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 오브라이언 보좌관이 전임자 행보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이 볼턴과 상대하길 전혀 원치 않았다. 볼턴이 리비아식 해법을 추구함으로써 대북 외교의 기회를 후퇴시켰다”라고 정면 비판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오브라이언이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유엔 대사로 일하던 볼턴과 함께 근무한 전력을 들어 그의 대북관에 우려를 표명한다.
“북·미 비핵화 협상 두 달 안에 개최될 수도”
하지만 그가 볼턴 전 보좌관처럼 이념형이 아니란 점에서 큰 문제가 없으리라 본다. 게다가 볼턴 전 보좌관을 내치면서까지 비핵화 협상의 성공을 바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오브라이언 신임 보좌관이 모를 리 없다. 사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대북 협상 때 볼턴 전 보좌관의 ‘감시자’ 구실을 인정하면서도 사실상 ‘방해자’ 노릇도 해왔다는 데 이견이 거의 없다. 미국이 당초 북한과의 ‘동시·단계적 행동에 따른 비핵화’ 해법에 동의했지만 점차 일괄타결의 ‘빅딜’ 쪽으로 이동하면서, 협상이 난관에 봉착하게 된 배경에도 볼턴 전 보좌관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당시 영변 핵시설 해체 카드를 들고 나온 북한에 대해 영변 밖을 포함한 ‘전면 핵시설 해체’로 맞선 장본인이 볼턴 전 보좌관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턴의 전격적인 퇴장과 오브라이언의 등장은 곧 진행될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의 청신호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유라시아그룹의 스콧 시먼 아시아 연구국장은 CNBC 방송에서 “볼턴이 퇴장함으로써 미국 정부가 대북 협상에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볼턴의 제거로 대북 협상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상호적·단계적 접근책을 반대하는 사람이 없게 된 만큼 본격적 비핵화 협상이 두 달 안에 열릴 가능성이 크다”라고 진단했다.
향후 비핵화 협상에서 오브라이언 보좌관이 당초 북·미 합의대로 ‘동시·단계적 행동’ 원칙에 힘을 실어주고, 이를 폼페이오 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한다면 협상에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내 3차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향후 비핵화 협상 결과에 따라 워싱턴에서든 평양에서든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뜻을 비친 상태다.
물론 오브라이언의 등장만으로 향후 비핵화 협상 전망이 반드시 장밋빛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북한·이란·아프간 등 핵심 외교 현안에 관해 트럼프 대통령이 안보보좌관의 말을 경청하기보다 독단적 결정을 내려온 전례에 비춰볼 때 그의 입지가 넓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 대부분은 북한의 핵심 요구 사안인 체제 보장과 대북 제재 해제에 미국이 성의를 보이지 않는 한 비핵화 협상의 기조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반도 전문가인 수미 테리 선임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에 “미국이 가시적인 대북 제재 완화를 제공하지 않는 한 아무리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아첨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실제로 북한은 9월 들어 체제 보장과 더불어 대북 제재 해제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지난 7월 북한과 실무협상 당시 ‘영변 핵시설 폐기 시 인도주의적 지원’ ‘인적 대화 확대’ ‘양국 수도에 상대국의 연락사무소 설치’ 등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실패한 뒤 미국을 상대로 ‘새로운 계산법’을 요구한 북한이 이 정도 보상 선에서 만족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란 변수도 있다.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對)이란 제재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대이란 협상 타개를 목표로 제재 완화도 고려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은 오브라이언 신임 보좌관의 대이란 대처 방식을 눈여겨볼 게 확실하다. 9월14일 사우디아라비아 원유 시설에 대한 공격의 배후로 이란이 지목되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더욱 강화한 상황이다. 2020년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란과의 핵 협상 타결은 물론 중국과의 무역전쟁도 신속히 수습하길 원한다. 그런 점에서 북핵이든 이란 문제든 외교 전문가들이 오브라이언 보좌관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도 전임자가 누리지 못한 트럼프 대통령과의 ‘호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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