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물고기에 깃든 역사
  • 오창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호수 626
  • 승인 2019.09.2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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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멸치는 일상 요리에 사용됐지만, 일본에서는 비료로 썼다. 삶아서 말린 멸치는 이제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소비된다. 멸치는 두 나라에서 각각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연합뉴스부산광역시 기장군 대변항에서 어부들이 그물에 걸린 멸치를 떨어내고 있다.

멸치에도 역사가 있다. 멸치는 현대 한국인의 일상에서 가장 친숙한 물고기 중 하나다. 너무 흔하고 일상적이어서 별다른 관심이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지난해 유명 음식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씨가 삶아서 말린 멸치나 멸치로 우려낸 국물이 일본에서 왔다고 언급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멸치볶음이나 멸치육수가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다소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마트나 건어물 시장에 가보면, 멸치를 크기에 따라 ‘지리멘’ ‘가이리’ ‘고바’ ‘주바’ ‘오바’로 부르기도 한다. 이 같은 용어는 일본에서 유래했다. 한국의 멸치 문화가 일본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개 문화가 발명되기보다는 전파를 통해 확산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고,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은 민족주의 담론이 일상을 지배하는 현상이다. 얼마 전까지 ‘김치와 마늘 냄새’가 한국인 차별 담론으로 이어졌던 것을 상기해보자. 일본의 ‘다시’를 설명하면서 언급했듯이, 전파된 문화가 새로운 토양 위에서 미묘하게 엇갈리며 전개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시사IN> 제623호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한 비슷한 듯 다른 여정’ 기사 참조). 멸치 가공법이 일본으로부터 전파되었더라도 한국에서는 상이한 맥락과 방법으로 수용됐다는 것이다.

19세기 말 일본의 멸치 건조 방법에는 그냥 햇볕에 말리는 방식(素乾·소건)과 삶아서 말리는 방식(煮乾·자건)이 있었다. 이 두 가지 방식 중 전자는 19세기 개항 이전에도 한반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멸치는 전국적으로 어획되었고, 특히 강원도와 함경남도 지방에서 멸치 생산량이 많았다. 두 지방에서는 비교적 큰 멸치가 가을철이면 해안에 접근했다. 또 바위가 적고 모래 해변이 많아 해변에서 거대한 그물로 멸치를 당겨 올리는 ‘후릿그물’ 어업이 가능했다. 이 지역의 마른 멸치는 19세기에 이미 서울을 비롯해 전국 구석구석까지 유통되었다. 물론 서남해에서는 마른 멸치뿐 아니라 멸치젓갈이 생산되고 있었다는 점도 부기할 필요가 있다.

개항 이후 조선의 멸치 어업과 유통에 큰 변화가 생긴다. 일본인 상인이 (쌀과 마찬가지로) 마른 멸치의 구입 단가를 높이 제시하면서, 조선의 마른 멸치가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었다. 똑같은 동해 바다에서 똑같이 어획해 건조한 마른 멸치라도 조선과 일본의 소비 방식은 달랐다. 조선에서는 생멸치나 마른 멸치를 일상 요리에 사용했다(당시 구체적인 요리 방식은 아직 불분명하다). 너무 많이 잡히거나 비가 오거나 습해서 썩어버린 경우에는 근방 논밭에 비료로 사용했다. 조선과 달리 일본에서는 처음부터 마른 멸치를 비료로 썼다.

일본의 멸치 문화를 다루기 전에, 일본 문헌에서는 멸치와 정어리를 잘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어에는 ‘가타구치이와시(片口鰯)’나 ‘세구로이와시(背黒鰯)’ 등 한국의 멸치에 해당하는 용어가 있다. 그리고 정어리는 ‘마이와시’라고 부른다. 멸치와 정어리 모두 ‘이와시’가 어미에 붙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멸치와 정어리를 ‘이와시’라는 한 범주로 인식해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20세기 초반까지 일본에서 멸치와 정어리는 식용보다 농업 비료로서 가치가 높았다. 에도 시대 들어 일본에서 면화 같은 상품 작물 재배가 성행하면서, 대량 어획되는 물고기를 건조해 논밭의 비료로 사용하는 농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891년 일본의 전국 어업 조사에 따르면, 멸치와 정어리류, 즉 이와시 생산액 중 식용이 121만 엔인 데 비해 비료용은 153만 엔에 달했다. 이러한 농업용 생선 비료는 19세기 이후 수요 확대로 인해 가격이 계속 높아졌다. 이 같은 배경에서 바로 조선인이 먹던 마른 멸치가 개항 직후부터 일본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남 거제에서 벌어진 일본 어민과의 갈등

일본에서 멸치를 비료에만 사용하고 식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멸치는 규슈부터 혼슈 최북단인 아오모리까지 어획되는 생선이었기에 지역별로 다양한 멸치 요리 방식이 발달해 있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 멸치는 주요한 다시 재료 중 하나였다. 일본의 다시용 멸치는 단순히 햇볕에 건조한 것이 아니라 삶아서 말린 것이었다. 이는 과거 조선에는 보편적이지 않은 방식이었다. 멸치를 삶아 말리는 것은 부패 방지에도 목적이 있지만 재료의 감칠맛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이에 일본 어민은 국경을 넘어 경남 남해안에서 직접 멸치 어업과 가공을 시작한다.  

ⓒ오창현 제공일본인은 멸치를 잘 먹지 않는다. 작은 멸치를 반건조해 먹는 정도다.

한반도 남해안에 진출한 일본 어민의 월경 어업에 대해서는 역사학자인 김수희 독도재단 교육연구부장이 연구한 경남 거제 구조라리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시코쿠 에히메현 우오시마(魚島) 어민은 경남 남해안에서 1891년 멸치 어업을 시작했다. 한반도에서 멸치 어획량은 점점 늘어나 1910년이면 조선 내 어획량이 우오시마 총어업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한다. 이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멸치를 잡더라도 육지에 건조장이 필요했다. 청일전쟁 후 조선 내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멸치 건조장을 얻기 어려워졌다. 1896년 우오시마 어민 120명이 어선 20척을 타고 와 거제 구조라리 근방에 멸치 창고를 지으려 했다. 그러자 구조라리 주민 300명이 죽창을 들고 몰려와 ‘조일통어장정’ 때문에 멸치 어업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마을 내 창고는 지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이에 우오시마 어민이 일본 영사관을 동원해 마을 주민을 절도범으로 몰아 압송해버렸다. 결국 6년 뒤인 1902년 구조라리에는 우오시마 어민 210명이 상주하며 멸치 창고 7개, 어선 35척을 운영하고 있었다.

차관 정치가 시행된 1908년에는 구조라리에서 일본인회가 결성되었다. 일본이 압도하는 정치적 상황에서 일본 어민은 마을 주민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서약서’를 교환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인 대표 8명이 첫째, 여자들이 다닐 때에는 음담패설을 하지 말 것, 둘째, 마을 앞에서는 옷을 벗지 말 것, 셋째, 소와 개를 해치지 말 것, 넷째, 어업은 서로 융통할 것, 다섯째, 서로 싸우지 말 것을 약속했다. 특히 동네 근처에서 일본인들이 옷을 벗고 돌아다니는 일은 구조라리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가장 빈번한 갈등의 원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 중 많은 수는 이익이 더 크게 나는 정어리, 고등어 건착망 어업에 전업하면서 울산 등지로 이주한다.

일본인 어민이 멸치 어업에서 손을 뗀 뒤에도 경남 남해의 멸치 어업은 쇠퇴하지 않았다. 일본인의 자리를 조선인이 채웠기 때문이다. 민속학자인 이소모토 히로노리(도쿠시마 현립박물관)는 히로시마현 일본인 선주의 1920년대 일지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인 선주는 경남 통영 용남면 원평리에서 조선인 주민 약 20명을 봄부터 가을까지 고용해 어업 및 가공을 맡겼다. 선주는 자신이 고용한 조선 어민과 함께 일하면서 술과 쌀을 대접하거나 음식을 같이 먹기도 했다. 또 지역에서 쌀이나 선박 연료를 구입하기도 했고, 휴어기 겨울철에는 지역 어민들에게 어선과 어구를 빌려주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경우 휴어기에 선주를 따라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조선 어민도 있었다.

다시 멸치 가공법으로 돌아와보자.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삶아 말린’ 멸치를 일상적으로 먹었을까? 그렇지 않았던 듯 보인다. 마른 멸치는 대개 일본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이다. 1935~1945년에 조선의 마른 멸치 중 70~90%가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광복 이후 이러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는데, 1950년 이후로는 1951년 한 해를 제외하면 전체 어획량의 1%도 수출하지 못했다. 아마도 광복 이후 자국으로 돌아간 일본 어민들이 일본 근해에서 멸치를 직접 어획해 출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오창현 제공일본 우오시마 어민과 경남 거제 구조라리 주민 간에 맺은 서약서.

일본 수출이 어려워지자 ‘수출 효자상품’이었던 한국 멸치는 이제 국내에서 소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멸치의 영양학적 가치가 주목받으면서, 멸치 소비를 권장하는 다양한 정책이 펼쳐졌다. 1967년 12월 <경향신문>은 칼슘이 부족한 상황에서 “멸치젓갈 다량 이용, 멸치육수 이용, 멸치가루, 멸치 통조림 소비”를 장려하고 있다. 또 1969년 10월 <매일경제>는 한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신장이나 체중이 덜 나가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월요일과 수요일의 이상적인 식단 중 하나로 멸치볶음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인이 한국 된장찌개에 놀라는 것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의 멸치 사용법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멸치젓갈 사용이 많지 않았고, 또 멸치국물도 일반화되지 않았다. 1969년 11월 <매일경제>는 “찌개나 탕을 끓일 때는 꼭 육수를 부으면 더욱 맛이 좋겠지만, 육수가 없을 때에는 멸치국물을 끓여서 병에다 넣어두었다가 맹물을 붓지 말고 육수 대신 사용하면 좋다”라고 소개했다. 즉, 멸치국물이 육수의 대체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바야흐로 삶아서 말린 멸치는 이제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소비된다. 일본에서도 정월 요리로 우리의 멸치볶음과 유사한 ‘다즈쿠리’를 먹기는 하지만, 일본에서는 멸치를 거의 직접 식용하지 않는다. 내장이 발달하기 전인 아주 작은 멸치(시라스)를 반건조해 먹는 정도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멸치 소비 방식은 비료 또는 다시 같은 간접 소비였다. 한국에서는 지금 매일 먹는 멸치볶음처럼 멸치를 직접 소비한다. 한국에 온 일본인은 식당에서 주문한 된장찌개에 남아 있는 멸치를 보고 놀란다. 일본에서는 내장을 뗀 다시용 멸치를 약한 불에 단시간 삶아 다시를 낸 뒤 반드시 꺼내 버리기 때문에 멸치를 볼 수 없다. 한국에서는 된장찌개에 고추·양파 등 다양한 양념이 들어가므로 멸치의 잡맛에 영향받지 않는다. 멸치를 직접 먹는 게 이상하지 않기 때문에 찌개에 남아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멸치 자체의 맛에 더 민감하므로 멸치를 더욱 세분화· 고급화해, 수십만원대의 ‘죽방렴’ 멸치 세트까지 판매한다.

일본으로의 멸치 수출은 1980년 전후 ‘공멸(까나리)’을 필두로 재개되었다. 일본인은 공멸 중에서 크기가 작은 것, 지방이 적은 것을 선호했다. 이후 점차 일본인이 선호하는 세멸(지리멘)로 수출이 확대되었다. 이제 여러 크기의 멸치 중 한국이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은 가장 작은 세멸뿐이고, 반대로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것은 멸치볶음에 주로 사용하는 중소형(고바-가에리)이다. 멸치 가공 기술이 동일해진 지금도 멸치 소비 방식은 일정 부분 유지되는 것이다. 멸치는 두 나라에서 각각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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