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폰필’에 사로잡힌 한국의 젊은이
  • 이오성 기자
  • 호수 79
  • 승인 2009.03.1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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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이 형용 모순의 말은 일본을 설명하는 상징적 수식이었다. 하지만 세대가 변하면서 일본에 대한 인식도 바뀌고 있다. 일본 문화는 ‘가까이 더 가까이’ 우리 젊은이의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시사IN 한향란
저녁마다 긴 줄을 서는 서울 홍대 앞 일본 음식점(위).
“예약 안 하셨어요? 자리 없습니다~.”

2월28일 저녁, 서울 이태원 제일기획 사거리 앞. 일본식 이자카야(居酒屋·일본식 선술집) 여섯 곳이 연달아 있는 이 거리는 벌써 불야성이다. 그나마 토요일이라 한가한 편이지, 금요일 저녁엔 발 디딜 틈도 없다. 이곳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한 주점의 경우 밤 10시가 넘어서도 예약이 꽉 차곤 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20~30대 한국인이다. 한 잔에 8000원인 아사히 생맥주, 웬만한 건 5만원을 훌쩍 넘어가는 사케(일본 청주) 가격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이들은 일본 음식 예찬에 열을 올린다. 빈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던 이현진씨(29·직장인)는 “이 집 꼬치 요리를 아주 좋아한다. 신선한 재료를 숯불에서 구웠기 때문에 동네 선술집에서 먹던 것과 차원이 다르다. 여기에 거품이 살아 있고 쌉쌀한 일본 생맥주를 한두 잔 곁들이면 최고다”라고 말했다. 그는 “안주 값이 2만원 안팎이고, 주로 한국 소주를 마시기 때문에 가격이 부담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이 ‘삼일절’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미국 독립기념일에 영어 공부 하지 말아야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처럼 이태원과 홍대 앞 등 젊은이가 즐겨 찾는 유흥가에서는 일본 음식에 ‘꽂힌’ 마니아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복고양이·기모노 인형 등 한껏 일본풍으로 치장한 이들 음식점의 점원은 손님을 맞을 때도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세요)’라고 외친다. 1990년대 로바다야키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면 이자카야는 한결 대중적이다. 초밥·돈카스·꼬치구이 따위 일본 음식을 파는 음식점도 우후죽순 늘었다. 2009년 2월 현재 음식업중앙회에 등록된 일식집은 1만2645곳이다. 어느덧 양식집(1만4810곳)을 얼추 따라잡았다.

도쿄에서 초밥 먹고, 후지TV 시청하고

먹을거리뿐 아니다. 입을거리와 놀거리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본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고, 초밥을 먹고 사케를 마시는 일상이 자연스러운, 이른바 ‘니폰필(Nippon Feel)’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다. 한때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던 ‘오타쿠(광적 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는 어느새 전문가 뺨치는 식견을 갖춘 아마추어를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었다. 인터넷상에서는 ‘~한다는’으로 끝나는 일본어투 문장을 사용하는 누리꾼이 차고 넘친다.

젊은 세대가 일본 문화에 사로잡혔다는 이야기는 과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98년 10월, 1차 일본 문화 개방으로 ‘망가’ 등이 들어온 이래 지난 10년 동안 니폰필은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 전에도 해적판 만화를 보고, 프라모델을 수집하면서 일본 문화를 답습한 이는 많았다. 하지만 요즘 세대는 확실히 다르다. 후지TV에서 방영하는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시청하고, 도쿄 쓰키지 어시장 초밥 맛을 논하고, 다이칸야마에서 쇼핑을 즐기는 등 거르지 않은 일본 문화를 ‘날것’ 그대로 접한다. ‘동경에서 일상으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뉴시스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는 김석희씨(26)는 청소년 시절부터 일본 여행을 꿈꿨다. 음반과 프라모델을 좋아하는 그에게 일본만큼 구미 당기는 여행지는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 도쿄에 갔을 때 그는 맨 먼저 시부야에 있는 ‘타워레코드’부터 찾았다. 자주 찾던 서울 강남 타워레코드가 사라진 마당에 7층짜리 건물 전체가 음반으로 가득 찬 광경은 그를 황홀하게 했다. 음반도 책처럼 검색해서 찾아야 한다는 점이 놀랍기만 했다.

김씨는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Uniqlo) 옷도 즐겨 입는다. 싸고 질 좋고 디자인도 괜찮기 때문이다. 그는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옷을 싫어한다. 그는 “로고가 박힌 옷은 디자인이 촌스럽거나 괜히 비싼 경우가 많다. 유니클로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했다. 유니클로는 일본의 대표적 중저가 브랜드다. 본사가 생산·유통·판매를 직접 맡아 옷값 거품을 뺀 게 강점이다. 1000~ 2000엔대가 대부분이다. 2005년 한국에 입성한 이래 연간 150~200%씩 폭발적으로 성장해 첫해 3개였던 매장 수가 지금은 25개로 늘었다. 지난해 말 17만 장 기획상품으로 출시된 1만9900원짜리 셔츠와 레깅스는 불황 속에서도 3개월 만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김씨의 말처럼 유니클로 제품은 심플하다. 화려한 치장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느낌이다. 이들의 판매 전략은 ‘믹스 앤드 매치(mix& match)’. 소비자가 선택해서 조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이다. 유니클로를 판매하는 FRL코리아 김태우 마케팅팀 주임은 “유행에 민감한 요란한 제품 대신 심플한 스타일을 유지함으로써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게 하는 것이 유니클로의 방침이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명동 유니클로에서 만난 박진희씨(24)는 “유니클로 제품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세련된 멋이 있다. 캐시미어 제품의 경우 원료가 되는 양 목장까지 본사가 직접 관리한다고 들었는데, 일본인의 꼼꼼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 좋다”라며 유니클로 제품을 추어올렸다.

한류 아줌마 뺨치는 ‘자니스 팬’

패션은 물론 ‘헤어’에도 일류(日流)는 거세다. 이른바 ‘섀기커트(머리 끝이 삐죽삐죽하게 여러 층으로 자르는 커트)’라 불리는 머리 손질법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드라마 <온에어>에서 탤런트 김하늘이 선보여 인기를 끈 스타일이다. 이들 미용실은 병원처럼 차트를 작성해 고객을 관리해 큰 호응을 얻는다. 명동 헤어숍 모어스 디자이너 곤씨는 “일본 드라마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일본 스타일을 요구하는 한국인 고객이 부쩍 늘었다. 커트 요금이 2만~3만원으로 비싼 편이지만, 세심한 상담과 머리 손질에 만족하는 고객이 많다”라고 말했다.

   
ⓒ시사IN 한향란
2005년 한국에 들어온 유니클로(위)는 불황 속에서도 식지 않는 인기를 누린다.
한때 ‘한류의 식민지’처럼 여겼던 일본 연예계의 공세도 위협적이다. 일본 연예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자니스’라는 세 글자를 기억해야 한다. 자니스란 뮤지션이나 영화배우의 이름이 아니다. 1965년 설립된 일본 최대 연예기획사다. 우리로 따지자면 ‘SM 엔터테인먼트’ 같은 연예기획사인 셈인데, 남성 연예인만 양성하는 게 특징이다. SM 역시 자니스를 롤모델로 삼아 출발했다. ‘소년대’ ‘히카루겐지’ ‘SMAP’ ‘V6’ ‘아라시’ 등 시대를 풍미한 일본 아이돌 그룹이 모두 자니스 소속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아라시 내한 공연 때는 예매 30분 만에 좌석 2만 개가 매진돼 행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국내 자니스 팬층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일본 교토로 교환학생을 다녀와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일본어 특기자로 인턴십을 하고 있는 이 아무개씨(26). 학창시절 누구나 그렇듯 책 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 보다 일본 만화를 접했다. 만화의 애니메이션 판을 보다가 주제가에 심취했고, 그 주제가를 부른 ‘자니스’ 소속 뮤지션에 빠져들었다. 

이씨와 같은 자니스 팬들은 일본 마니아 중에서도 가장 충성도가 높다. 이들은 매년 일본으로 정기 여행을 떠난다. 코스는 대개 이렇다. 1차 목적지는 대형 콘서트장이다. 이들은 콘서트 현장에서 한정 판매하는 ‘우치와(응원용 부채)’ 등 ‘굿즈(기념품)’를 구매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니스샵’에 들러 사진과 머그컵 같은 굿즈를 더 사거나, 일본 전역에 퍼진 중고 서적 체인점 ‘북오프’을 찾아 희귀 음반과 과월호 잡지를 산다. 열혈 팬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자니스 연예인의 출생지나 본가를 찾는 ‘성지 순례’를 떠나기도 한다. 일본 ‘전국 투어’를 쫓아다니는 극성팬까지 있다. 이들에게 웬만한 일본어 회화는 기본이다. 날마다 노래와 드라마를 통해 ‘자발적으로’ 학습한 결과다. 일본의 ‘한류 아줌마’ 뺨치는 수준이다.

   
ⓒ시사IN 한향란
헤어숍에서도 일본풍이 인기를 끈다.
이들이 자니스에 빠져든 건 단지 꽃미남에 열광해서가 아니다. 40년 넘는 관록을 자랑하는 자니스의 ‘스타 관리 전략’에 대한 이해도 한몫한다. 자니스에는 ‘자니스 주니어’라는 제도가 있다. 우리처럼 훈련된 스타를 한순간에 ‘뻥’ 터뜨리는 게 아니라, 아직 무르익지 않은 아티스트를 일찍 데뷔시켜 대중이 스타의 발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달리 10년 이상 ‘장수하는 아이돌’ 스타가 많다. 자니스 공연을 보기 위해 일본을 세 차례 다녀온 직장인 이해영씨(28)는 “올해 데뷔 18주년을 맞은 SMAP처럼, 나와 함께 늙어가는 아이돌 스타를 볼 수 있다는 게 즐겁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없다’ 대 ‘일본을 배우자’

일본을 찾는 한국 여행자 수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총 238만3000명이다. 전체 외국인 여행자 중 28.5%로 단연 1위다. 타이완(139만명, 16.6%),  중국(100만명, 12.0%)과 비교해도 큰 차이다. 엔화 가치가 폭등한 2008년 10월 이후 일본으로 여행 가는 사람은 줄었지만, 환율이 100엔당 700~800원대였던 2007년에 비해 겨우 8.4% 감소했다.

일본 마니아의 삶이 마냥 행복한 건 아니다. 이들은 ‘일빠’ ‘매국노’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한일 누리꾼 교류 사이트인 네이버 ‘인조이 재팬’이 소모적 논쟁의 장으로 변질해간 점에서 알 수 있듯 젊은 세대에게도 ‘일본’은 민감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일본 문화를 여과 없이 접하다 영혼마저 ‘일본화’할지 모른다는 염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염려에 대해 당사자는 물론, 전문가도 기우라는 반응이다.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은 “학교에서 반일 교육을 철저히 하는 만큼 ‘일본화’ 걱정은 과하다. 오히려 젊은 세대가 일본에 열광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를 통해 우리 문화 토양을  튼튼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선우정 조선일보 도쿄특파원은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이 아직 모던(근대)에 머물러 있다면, 일본은 포스트모던(탈근대)이다. 이런 일본의 장점에 눈을 뜨는 것 자체가 진보와 도약의 첫걸음이다”라고까지 주장한다.

과거 일본은 양날의 칼이었다. 한쪽에선 ‘일본은 없다’라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일본을 본받자’라고 외쳤다. 어느 편도 섣불리 지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는 동안 일본에서는 한류가 몰아쳤고, 한국에서는 일류에 열광하는 세대가 성장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문화 교류’가 최근 봇물 터지듯 이뤄진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혹자는 이를 통해 런던 대학 모리시마 미치오 교수가 제안한 ‘동북아 공동체’의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시사IN 한향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 이태원 이자카야.
3월9일 저녁, 홍대 앞 이자카야에서는 DMB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을 시청하는 젊은이가 많았다. 4회 초 한국팀 4번 타자 김태균이 결승타를 때리자 이 일본식 술집은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이치로를 비난하는 소리도 곳곳에서 들렸다. 그들은 아사히 생맥주와 사케 그리고 한국 소주를 섞어 마시며 이날 승리를 자축했다. 쇼비니즘적 애국심과 니폰필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취재 도움:이해나(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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