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홍콩에 갈등의 씨앗 뿌렸나
  •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 호수 624
  • 승인 2019.09.0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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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1997년 6월30일 열린 홍콩 반환식에서 영국 국기(왼쪽)와 홍콩 정부기가 내려지고 있다.

1997년 7월1일 오전 6시, 장갑차와 작전용 트럭에 탑승한 인민해방군 병력 4000여 명이 홍콩과 중국 본토 사이의 경계지점인 선전 검문소를 통과했다. 장대비가 내리는데도 홍콩 주민 1만여 명은 도로변에서 오성홍기와 홍콩특구기를 흔들며 이들을 환영했다. 따뜻한 포옹과 꽃다발 세례가 이어졌지만, 주민들의 얼굴에 스쳐가는 긴장감은 감출 수 없었다. 홍콩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장면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을 터였다.

178년 전, 홍콩섬은 영국 군대에 함락되었다. 자강의 열망과 기득권층의 발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청나라 조정은 홍콩을 발판으로 아시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영국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영국은 점령지를 차츰 넓혀 나갔다. 홍콩섬 건너편인 구룡반도(카오룽반도)는 물론이고,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 본토에 바싹 붙은 신계까지 진출했다. 대륙의 턱 끝에 비수를 들이댄 형국이었다. 그런 자신감의 발로였을까. 홍콩섬처럼 신계를 다짜고짜 자국령으로 선포해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9년 동안 빌리는 형식으로 지배하기 시작한다. 말이 좋아 99년이지, 당시 조약문을 작성하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 숫자는 구속력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국력이 강해지던 영국이었고 누가 보아도 껍데기만 남은 청나라였기에, 99년이라는 표현은 청나라 대표에겐 황제에게 둘러댈 변명거리를, 영국 대표에겐 프랑스나 미국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구실을 확보하는 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 홍콩은, 그리고 홍콩을 둘러싼 국제관계는 변화를 맞이한다. 20세기 초반에는 영국의 의도대로, 홍콩은 아시아를 상대로 하는 영국의 무역기지 역할에 충실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식 기반시설과 교육 시스템이 이식되었으며, 인근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몰려들어 인구는 나날이 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력이 매우 약해진 영국이 다른 식민지는 독립시키면서도 홍콩에서만은 물러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이 지역이 가진 중요성을 말해준다.

홍콩인들이 중국에 가진 두려움의 정체

1970년대 중국 본토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실패로 끝난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또는 먹고살 길을 마련하기 위해 홍콩으로 넘어온 사람들 또한 엄청나게 늘어났다. 현재 홍콩인들이 중국 정부에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 기원하는 지점이다. 1950~1960년대에 걸쳐 홍콩이 제조업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하며 빈부의 격차가 커져갔고, 본토에서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이 여기에 불을 댕겨 시위가 격화된 시점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땅을 빌렸던 영국의 힘은 점점 쇠약해지고, 땅을 빌려준 중국의 힘은 점점 더 강해져갔다.

1997년 6월30일, 영국군은 150년 넘게 이 땅에서 펄럭이던 유니언잭을 챙겨 홍콩을 떠났다. 마거릿 대처 총리가 당시 중국의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협상에 나섰다. 향후 50년에 걸쳐 홍콩 땅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 중국식 사회주의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일국양제’의 조건에 만족하고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반환협상이 타결된 1984년부터 홍콩을 떠나는 그날까지, 직선제를 확충하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뿌리내리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어찌 보면 중국의 품으로 돌아가는 옛 영토에 대한 최소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분쟁과 갈등의 씨앗을 뿌린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품을 떠나는 양자에 대한 마지막 의무를 다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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