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물리학에 대해 좀 아는 사람 있어요?”
“대화에 낄 정도만요.”
〈어벤져스:엔드게임〉에 나온 이 대사에 공감한 관객이 많았을 것이다. 어차피 전공자에게도 어려운 개념이니 대화에 낄 정도라고 말하면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정 할 말이 없으면 어벤져스나 고양이 얘기라도 하면 얼추 낄 수 있다. 그 정도만 해도 왠지 아이슈타인을 넘어서는 것 같은 쾌감도 얻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니 양자역학을 잘 몰라도 인정은 하고 있는 내가 아이슈타인보단 낫다고 정신 승리를 하게 해줄 수 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아인슈타인보다 똑똑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린 아이슈타인과 다른 시대를 살고 있기에 우리에게만 당연한 것들이 있다.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학생은 보호와 관리 대상인가, 인권의 주체인가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패러다임 이론이 타당해 보일 때가 있다. 자연과학의 세계만큼 극적으로 판정되지 않기에 변화와 충돌의 순간에 이것이 진보의 상황인지 패러다임의 전환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이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던 순간이 있다. 지나고 나야 알 수 있기에 충돌하는 순간에는 두 세력 모두 서로 답답하기만 하다.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라면 타협의 지점을 찾는 게 가능하지만,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시기라면 두 세력 사이의 충돌은 타협이 불가능하다. 천동설과 지동설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왕정과 민주주의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와 충돌의 순간, 갈등한다. 토론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할지 아니면 혁명을 통해 다른 시대정신을 만들어내야 할지 고민한다. 나에게는 학생 인권이 그런 고민의 대상이다.
학생 인권, 청소년 인권에 대해 주장할 때 한쪽에선 전통적인 교육방식과 교권을 이유로 중간의 어느 선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권을 정답처럼 여긴다며 인권운동가들이 편협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학생 인권에서 중간 지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학생이 보호와 관리의 대상인지 아니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동등한 인격체인지 중간을 찾는 것은 학생을 반인반수로 여기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중간을 찾는다 해도 서로에게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다. 흑인에게 백인과 똑같은 권리를 주는 것과 흑인을 노예로 취급하는 것 사이에서 중간을 제시해도 둘 모두 납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이와 성숙의 문제이니 인종문제와 다르다는 주장은, 마치 백인만큼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 흑인에게 시민권의 일부만 주자는 말처럼 들린다.
방학이 지나면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은 퇴직한다. 지난 8년 동안 나와 교장은 많은 지점에서 충돌했다. 그분에게 학생은 보호와 관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분도 각자의 생각에 충실했다. 서로에게 적의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불편해하고 답답해했지만 서로 인간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분도 나도 꽤 좋은 시민으로서 살고 있다. 다만 학생과 인권에 대한 생각이 반대 방향이었을 뿐이다.
교장선생님의 퇴직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지난 8년 동안 우린 타협의 지점을 찾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결국 패러다임의 전환처럼 자연 감소의 흐름 속에 새로운 세대가 과거의 세대를 점점 장악해가는 과정이었을까? 아직 우리 학교엔 과거의 학교에 익숙한 세대가 많다. 학생들은 새로운 세대의 논리에 익숙하다. 그 둘은 각자의 생각에 충실한 채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게 될까? 아니면 누군가의 설득이 성공할까? 바라는 것은 설득이 성공하는 쪽이다. 이왕이면 내가 설득에 성공한 사람이었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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