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건강보험 체납 추심은 엄격하다. 30대 미혼 양육모가 건강보험 체납 때문에 통장이 압류된 사례도 있었다.

한국의 건강보험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성공적으로 전 국민에게 적용되었다. 또한 놀라운 사회연대의 힘으로 ‘통합’을 이뤄내기도 했다. 이러한 성장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체감하는 의료비 부담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은 채 30년이 흘렀다. 지난 기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시민사회의 단골 요구였고, 역대 정부도 끊임없이 보장성 개선안을 내놓았다. 느린 개선이 답보 상태에 다다를 즈음, 이 문제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한 정치적 발걸음, ‘문재인 케어’가 시작되었다.   

예전에 캐나다 의료보장 제도인 메디케어 역사를 다룬 책에서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할머니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병원 문턱을 넘지 못했던 옛날을 떠올리며 이제는 메디케어 없는 세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부모 병치레로 뼈가 굵은 나도 그렇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 건강보험이란 태어나 보니 원래 있던 것이지만, 3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만 해도 건강보험 가입 이력을 조회해보면 자료가 1988년부터 존재한다. 영세사업장에 다녔던 아버지가 아마도 그때부터 직장의료보험에 가입되고 나도 피부양자로 등록되었으리라. 그전에는 말하자면 ‘무보험자’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때가 1986년인데, 대체 병원비는 어떻게 부담했는지 모르겠다. 책에 나오는 ‘재난적 의료비에 의한 빈곤’은 어릴 적 우리 집 이야기였다. 1990년대 후반 수련의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내가 직장의료보험 가입자가 되었고, 부모를 피부양자로 올릴 수 있었다. 전공의를 마치고 연구교수로 ‘승진’하면서 나는 직장가입자 자격을 잃었다.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이다. 정규직인 전공의 때보다 임금도 낮아졌는데, 생계를 책임지는 처지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역가입자 보험료가 걱정이었다.

당시만 해도 비정규직 교원이 이토록 흔해지기 전이었고, 관련 제도가 아직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학본부 담당자들을 설득하고 읍소한 끝에, 마침내 한 달 만에 규정이 보완되고 나는 의료보험 직장가입자 자격을 되찾았다.

건강보험은 그 뒤로도 우리 가족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건강보험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건강보험에만 의존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아버지는 지병 때문에 민간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9년 아버지가 심장판막 수술을 받았을 때는 단기간에 1000만원에 가까운 병원비를 내야 했다. 우리를 구원한 것은 신용카드 할부였다.

다수의 장기 체납자 ‘도덕적 해이’와 무관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2017년 어머니가 심각한 담낭염 합병증으로 입원했을 때, 총 1065만6767원이 청구되었고 우리가 직접 부담한 돈은 395만2708원이었다. 건강보험에서 62.9%를 부담해준 것인데, 이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보장률 통계 62.7%에 가까운 숫자였다. 이게 국가 평균치라는데, 400만원은 실로 큰 부담이었다.

어쩌다 보니, 지금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가 입원했고 중간 정산 청구서가 날아왔다. 전체 병원비 630만4288원 중 우리가 직접 부담해야 하는 금액은 103만4625원, 건강보험 보장률이 무려 83%로 높아져 있었다. 선택진료비 항목이 0원이었고, CT 촬영 비용도 건강보험이 45만5652원을 부담하면서 우리는 4만5285원만 부담하면 되었다. 간호간병료도 우리는 6만3864원을 부담하고 건강보험이 나머지 127만7280원을 부담했다. 직접 내야 하는 100만원이 결코 작은 돈은 아니지만(심지어 ‘중간’ 정산이다!), 보장률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캐나다 메디케어 지지자 할머니처럼, 나도 이제 건강보험이 없는 시절은 상상할 수 없고, 절대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런데 건강보험의 보호로부터 살짝 비켜나 있는 이들이 있다. 생계형 장기 체납자들이다. 건강보험은 공적 사회보험이기 때문에 ‘능력에 따른 기여와 필요에 따른 혜택’이라는 원칙으로 작동한다.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다르게 부담하되, 그 혜택은 필요에 따라 동등하게 받는다는 것이다. 보험료를 내기 힘들 정도로 형편이 어렵다면 의료급여 수급자가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그 자격 기준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가처분소득의 상대 빈곤율이 15% 내외를 넘나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급여 수급자 비율은 수년간 변함없이 3%를 유지 중이다. 사정이 이러니 건강보험 가입자이면서 보험료를 제때 납부하지 못하는 체납자가 생긴다.

사실 ‘체납’ 하면 대저택에 살면서 고급 승용차를 굴리는 부유층의 ‘도덕적 해이’가 바로 떠오른다. 국민감정이 좋을 리 없다. 나도 힘들게 세금 내고 보험료 내는데, 저들은 왜? 건강보험 장기 체납자의 다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2016년 국정감사에서 윤소하 의원실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6회 이상 건강보험료를 체납하여 건강보험 급여를 제한받는 지역가입자는 134만7000세대. 이 중 90만8000세대, 약 67.4%가 월 보험료 5만원 미만의 ‘생계형’ 체납자였다.

우리 연구소(시민건강연구소)가 ‘아름다운 재단’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장기 체납자들의 누적 체납액을 체납 개월 수로 나누어 월평균 체납 보험료를 산출한 결과, 2015년 현재 중간값 기준 3만1000원, 평균 4만7000원에 불과했다. 비극으로 생을 마감한 송파 세 모녀 가정의 월 건강보험료가 4만7060원이었다고 하니, 이 정도 보험료를 체납하는 가구의 형편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연합뉴스2018년 2월23일 서울 광화문역에서 열린 ‘죽음보다 가난이 두려운 사회를 멈추기 위한 송파 세 모녀 4주기 추 모제’에서 참가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분석한 자료에는 극단적으로 월 수백만원의 건강보험료를 체납한 사례도 있었지만, 전체 체납자의 50%는 월 3만원 미만의 보험료를 못 내고 있었다. 월 보험료가 낮을수록 오히려 체납 횟수도 많아졌다. 장기 체납자들의 건강보험 가입 이력을 살펴보면 삶의 불안정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2015년 기준 장기 체납자 중에서 2002년 이후 자격 변동 한 차례도 없이 보험증을 유지한 경우는 7.1%에 그쳤고, 30%는 10회 이상 변동을 보여주었다. 적은 보험료를 내는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를 넘나들고, 지역가입자인 경우에도 주소지가 자주 변경되고, 가입자와 피부양자 상태를 오가거나, 때로는 의료급여 수급자가 되었다가 다시 지역가입자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통계는 면담으로 생생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한 40대 남성 체납자는 면담 당시 자활근로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평생 일을 했지만 한 번도 정규직으로 4대보험에 가입해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지역가입자로 월 2만5000원의 건강보험료를 내야 했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다 보니’ 내지 못하는 달이 자꾸 생겨났고, 이제 약 100만원의 체납액이 쌓여 있었다. 빚을 내서 프랜차이즈 창업을 했다가 망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해 갑자기 경제생활을 못하고, 암 수술 병원비 때문에 파산하고,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의 빚과 건강보험 체납을 물려받는 등 체납에 이른 사연은 다양했다. 이혼 후 혼자 고시원을 전전하며 주소지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건강보험 납부 고지를 놓쳐서 체납한 사례도 있었다.

이렇게 소액의 건강보험료가 밀리기 시작하면 갑자기 소득 상황이 나아져서 갚아치우게 될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건강보험료까지 체납할 상황이면 이미 다른 부채도 있고, 또 다른 공과금도 연체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체납에 이르게 된 경제 상황, 가족 상황은 지속되기 마련이고, 각종 부채와 연체 이력 때문에 신용등급이 낮아 은행 대출을 받기도 어렵다. 도움받을 사적 네트워크도 취약한 상황에서 이자 부담이 큰 사금융에 손을 내밀게 되면, 이제 악순환이다.

우리가 만났던 미혼 양육모는 아이가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어 일을 하기 어렵고, 병원비 부담도 컸다. 병원비 700만원이 나온 마당에 보험료 독촉 고지서를 받는다고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민간 후원금 50만원과 정부의 양육수당 15만원이 월 소득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조금씩이라도 체납보험료를 갚아나가려 했지만 건강보험공단은 내부 규정에 따라 최장 24회 분할 납부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체납액을 경감해보려고 조정을 요청했을 때에는 근거 서류를 모두 지참하여 본인이 공단을 직접 방문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몸이 아픈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전 생활수준을 입증하기 위해 지방도시에 있는 과거 주거지의 임대인을 만나서 당시의 월세 계약 서류를 받아와야 한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한 50대 체납자는 사업에 실패하면서 건강보험을 체납하게 되었고, 면담 당시에는 대리운전을 해서 월 80만원 정도를 벌고 있었다. 현재 건강보험료 월 3만~4만원에, 예전에 체납했던 건강보험료를 월 10만~14만원씩 분할 납부 중이었다. 그는 분할 납부 보험료가 왜 낼 때마다 다른지 의아해했다. 체납 총액이 100만원이라면 매월 10만원씩 10개월 동안 갚으면 되리라 생각하지만, 건강보험 체납은 월 단위로 부과된 보험료를 한 회차씩 갚아야 해결된다. 그가 보여준 고지서를 보면, 분납 7회차에는 9만3580원에 연체료 8320원, 8회차에는 12만3440원에 연체료 1만950원이 찍혀 있었다. 그는 월 80만원 소득에서 현재 보험료, 과거에 체납한 보험료 분납분, 연체금까지 합쳐 월 소득의 거의 20%를 건강보험공단에 납부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땅히 갚아야 할 금액이라지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건강보험을 장기 체납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먼저, 의료 이용에 제약이 생긴다. 물론 ‘급여 제한’ 상태라 해도 병원에 못 가는 것은 아니다. 의료기관에서는 실시간으로 체납 여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통상적인 건강보험 적용을 하되, 나중에 건강보험공단에서 이를 ‘부당이득금’으로 간주하여 당사자에게 환수한다. 제때 납입하지 않으면 여기에도 연체금이 가산된다. 우리가 면담한 이들 중에는 체납 때문에 병원에 가면 안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었고, 대부분은 부당이득금 환수 걱정에 가급적 병원에 가려 하지 않았다.

생계형 체납자들은 건강보험공단의 무자비한 일처리 때문에 발생하는 경제활동, 사회생활의 제약을 호소했다. 이를테면 통장이 압류되면 제대로 된 직장에서 급여를 받기 곤란해진다. 요즘 세상에 어떤 기업이 직원 본인이 아닌 타인 명의 통장에 급여를 이체해주겠으며, 채무나 체납이 복잡하게 얽힌 사람을 뽑으려 하겠는가? 설령 사정을 봐준다 해도, 회사에 이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괴로운 일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통장이 압류된 체납자들은 비공식 일자리, 비정규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다.

한 50대 남성은 대부업체도 급여를 압류하고 최소한 먹고살 돈은 남겨주었는데 건강보험공단이 통장을 압류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30대 미혼 양육모는 막막한 상황에서 얼마 안 되는 생활비가 들어 있는 통장이 압류되자 울면서 사정도 해보았지만 공단의 답변은 싸늘했다. “내가 지금 아기 낳은 지 얼마 안 되었고, 사정이 이렇고, 내가 기초생활 수급자인데, 갚을 능력이 안 된다. 나중에라도 내가 아기 어느 정도 키워놓고 능력이 되면 다달이 10만원이든, 20만원이든 갚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 사람이 저한테 하는 말이 그거예요. 당신처럼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우리가 2016년 면담했을 당시 2010년 압류된 그녀의 통장은 여전히 압류 상태였다.

지역가입자 중 체납자 67.4%가 ‘생계형’

국민건강보험법과 시행령에는 징수할 가능성이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 결손처분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결손처분을 받기는 어렵다. 우리가 면담했던 이들 중에는 공단의 결손처분 업무처리지침에 따라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사례가 여럿 있었고, 일부는 여러 가지 조건이 동시에 해당되었지만 간 이식수술 후 장애등급을 받은 한 명을 빼놓고는 누구도 결손처분을 받지 못했다. 건강보험공단은 2012년 이후 매년 3만 건 이상 결손처분을 해왔고, 이를 확대하여 2015년부터 2018년 사이에는 약 67만 건에 이르는 결손처분을 시행했다. 특히 2017년에는 미성년자 납부면제 법안이 통과되면서 일시적으로 36만 건까지 올라갔다. 이렇게 결손처분을 받으려면 ‘넘치도록 충분한’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가 2016년과 2018년에 만났던 생계형 장기 체납자들은, 말하자면 아직 그 시련의 자격 조건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이다.

생계형 장기 체납자들의 사연은 각기 달랐지만, 그 패턴만은 너무도 익숙했다. 빈곤, 불안정한 일자리와 주거, ‘비정상’ 가족에 대한 제도적·비제도적 차별과 배제, 취약한 사회자본, 갑자기 닥친 건강 문제. 이런 것들은 건강보험 체납에만 특별히 관련되는 요인이 아니다. 일반적인 취약성이 건강보험료 체납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을 뿐이고, 건강보험 체납은 그들이 처해 있는 곤경의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건강보험이 그저 보험료를 거둬서 나눠주는 기술적 장치가 아닌 이상, 사회보장제도로서 좀 더 적극적인 구실을 해야 한다. 인심 쓰듯 시행하는 결손처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생계형 장기 체납이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제도화된 보호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연합뉴스‘문재인 케어’는 건강보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건강보험은 국가의 사회보장제도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경험해보고, 또 가장 신뢰하는 제도다. 이제는 장학금 신청을 위한 소득 입증에도, ‘경력’이나 ‘재직’ 상태 증명이 필요할 때에도, 심지어 대학의 취업률 평가에도 건강보험 가입 이력이 근거 자료로 쓰인다. 원래 이런 쓰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는 대표적 사회보장제도로서 건강보험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책임도 무겁다. 문재인 케어가 성공하는 것은 대통령 공약 실현의 의미를 넘어서 국민 대다수의 삶에 실질적으로 중요하다. 단기적으로 보장성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위해 늘어나는 의료비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주치의 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공급체계의 합리화나, 시장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공공보건의료의 확충은 결코 별도의 과제일 수 없다. 또한 건강보험과 의료급여 사이의 불안한 회색 지대에 서 있는 이들에게 건강보험은 가혹한 추심자가 아닌 사회안전망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 국민 의료보장 30주년은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교차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자명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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