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생 홍콩 ‘반환둥이’ 자유를 외치다
  • 홍콩 김영화 기자·관명린(홍콩라디오텔레비전(RTHK) 에디터)
  • 호수 624
  • 승인 2019.09.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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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홍콩 셩완 지역에서 진압 경찰이 주춤하는 사이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방독면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몽콕 경찰서에서 몽콕역까지 1㎞를 쉬지 않고 달려오느라 숨이 가빴다. 8월17일 경찰서 앞, 거리를 점거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곤봉과 방패를 든 경찰 수십명이 깔렸다. 일부 시위대는 육교 위에서 경찰차를 향해 쓰레기통을 던졌고, 경찰은 육교 쪽으로 ‘빈백건(bean bag gun·알갱이가 든 주머니탄)’ 한 발을 쏘았다. 이날 최루탄은 터지지 않았다. 7주 만에 최루가스가 없는 주말이었다. 지하철역으로 피신한 에디 렁 씨(22·가명)는 곧장 검정색 우산을 펴 CCTV에 거꾸로 매달았다. 승강장에 도착한 시위대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땀범벅이 된 헬멧과 마스크 등 보호 장비를 벗을 수 있었다. 앳된 얼굴이었다.

ⓒ시사IN 이명익앳된 얼굴의 에디 렁 씨(가명)는 11주째 까만색 옷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나와 송환법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에디 씨는 11주째 비슷한 주말을 보내고 있다. 평일에 까만색 옷을 입는 것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SNS로 시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모두 조심스러워졌다. 언제든 체포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혼자만 겪는 일은 아니다. 또 다른 시위 참가자 제이미 찬 씨(22·가명)도 마찬가지였다. 모바일 메신저 와츠앱을 통해 그에게 “시위대 최전선에 서본 적이 있느냐”라고 질문했다. 잠시 후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이 열렸다. “민감한 이슈라 보안 때문에 와츠앱에서는 답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어떤 경찰은 신분을 숨겨 시위대로 위장했고, 어떤 경찰은 홍콩에서는 안 쓰는 베이징어를 썼다. 경찰은 시위대로 추정되는 이들이 보이면 멈춰 세워 가방을 검사했다. 한 대학교 총학생회장이 ‘공격용 무기’인 레이저 포인터를 샀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홍콩 경찰은 시위대를 잡기 위해 어떤 방법이든지 동원할 것이다.” 제이미 씨가 말했다.

올해 스물두 살이 된 에디 씨와 제이미 씨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1997년에 태어난 이른바 ‘반환둥이’다. 대개 올해 대학을 졸업하거나 앞두고 있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경우도 있다. 1997년생인 이들을 두고 윗세대는 ‘시대에 선택된 세대’라고 부르고 또래들은 우스갯소리를 섞어 ‘저주받은 세대’로 부른다.

졸업을 앞둘 때마다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터졌다. 2003년 유치원을 졸업할 때 사스(SARS)가 유행했다. 등원할 때마다 체온을 쟀다. 그때도 마스크를 썼다. 2009년 초등학교(6년제)를 졸업할 때 신종플루(swine flu)가 유행했다. 예정됐던 졸업파티가 신종플루로 무산됐다. 2012년에는 중국식 국민교육 과목을 필수로 도입하려는 정부의 시도가 있었다. 단식 농성까지 불사한 그 시위를 주도한 게 바로 당시 10대였던 반환둥이였다. 2014년 중등학교(5년제)를 졸업할 때 우산혁명이 발생했다. 당시 17세였던 이들은 대부분 부모 반대로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수업을 보이콧하거나 기부를 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시위를 응원했다.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했던 점거 농성이 79일 만에 경찰의 진압으로 실패로 끝나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5년 뒤인 2019년, 범죄인 인도법안(이하 송환법) 반대 시위가 촉발됐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어요.” 에디 씨가 말했다. 졸업과 취업을 앞둔 청년들이 시위에 앞장선 것은 ‘지금이 홍콩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6월9일 103만명, 6월16일 200만명이 송환법에 반대하기 위해 거리에 나왔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2년 전 선거에 나서면서 ‘We Connect(우리는 연결된다)’라는 구호를 사용했다.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야말로 그 구호와 어울렸다. 연령을 불문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캐리 람은 물러나라”고 외친 사람들의 직업 역시 학생·공무원·교사·경찰·변호사 등을 가리지 않았다. 홍콩 사회가 캐리 람 행정장관 덕분에 ‘연결’되었으니 이야말로 캐리 람의 성취라고 농담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연결의 중심에 반환둥이가 있다. 2014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홍콩 시민은 최루가스로 호흡곤란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우산혁명 당시 79일간 이어진 ‘센트럴 점거 운동’은 경찰이 쏜 최루탄 89개를 우산으로 막아냈다. 5년 후인 현재, 송환법 시위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이 쏜 최루탄 양은 당시에 비해 10배나 많다. 그 속에서 반환둥이들은 방관자가 아닌 주요 역할을 하는 참여자로 서 있다.

송환법 반대 시위의 한복판에 서 있는, 1997년생 반환둥이 6명을 만났다. 홍콩라디오텔레비전의 관명린 에디터도 취재를 함께했다. 일부는 얼굴과 실명 공개를 꺼렸다. 이들에게 홍콩의 미래를 물었다.

시위는 석 달 가까이 장기화되고 있지만 반환둥이들이 보기에 여전히 송환법은 중단됐을 뿐, 철회되지 않았다. 6월9일부터 8월18일까지 홍콩 시위대는 행진 13회, 점거 8회, 집회 21회, 파업 2회를 이어가며 책임 있는 답변을 정부에 요구했다. 시위대의 5대 요구안인 송환법 전면 철회, 시위대 폭도 표현 취소, 체포된 시위대 석방, 경찰 과잉진압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설치, 행정장관 직선제 중 어느 것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과 시위대 간 긴장은 극으로 치달았다. 홍콩 경찰에 따르면 8월22일 현재까지 420명이 체포되고, 최루탄 1000여 발과 고무총탄 160여 발이 발사됐다.

“내가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윙 씨(22·가명) 역시 체포자 중 한 사람으로 현재는 보석 상태다.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학생이다. 2주 전인 8월5일 홍콩 시내 타이포 쇼핑몰에서 시작된 집회에서 체포됐다. 그날도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쏘았다. “최루탄 연기로 자욱한 가운데 네 살짜리 아이가 울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어요. 홍콩 정부와 경찰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요?”

우산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실의에 빠져 있던 윙 씨는 6월9일 송환법 반대 시위 이후 힘을 되찾았다고 했다. 그날 이후 매번 시위마다 참여했다. 윙 씨의 자리는 언제나 대열 맨 앞이었다. 그는 시위 참여에 대해 “솔직히 후회해요”라고 말했다. “앞으로 재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졸업 후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요? 이번 일이 내 진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짐작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송환법 완전 철회를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이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까지 송환법을 반대하며 목숨을 끊은 이들은 알려진 것만 6명이다.

시위대 일각에서 평화로운 집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 건 지난 6월 중순이었다. 200만명이 거리에 나왔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시위대는 ‘용무(勇武)’와 ‘화이비(和理非)’로 나뉘었다. 용무는 최전선에서 경찰과 물리적인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 시위대를, 화이비는 비교적 평화로운 집회에 참여하는 시위대를 일컫는다.

‘용무’ 노선을 밟는 시위대는 7월1일 입법회를 부수고 들어가 국가 휘장을 훼손했다. “아프면 반응하게 돼 있잖아요. 정부가 대답할 때까지 계속 압박해야 해요.” 8월18일 만난 한 시위 참가자가 말했다. 입법회 점거에 참여했던 이들은 체포되거나, 외국으로 떠났다. 이후에도 이들은 도로를 점거하거나 집회가 끝난 후 인근의 정부 청사로 이동해 기습 시위를 이어갔다. 7월부터는 거의 매 집회가 끝날 때마다 최루탄과 빈백건으로 무장한 경찰의 진압이 거세졌다. 시위대는 ‘풀 기어(헬멧·마스크·고글 등으로 완전무장)’로 맞섰다.

ⓒ장진영8월11일, 침사추이 경찰서를 둘러싼 시위대가 경찰의 최루탄 난사에 맞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고 있다.

올여름 한 언론사에서 인턴 기자 생활을 시작한 멜로디 씨(22·가명)는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그 역시 2014년 우산혁명을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우산혁명 당시 수업을 보이콧하고 시위에 나가는 등 정치에 관심은 많지만, 정당에 가입할 생각은 없다. 그는 자신을 “과격하지 않은 평범한 보통 홍콩 젊은이”라고 말했다.

우산혁명에 학생으로 참여했던 멜로디 씨는 이번 송환법 반대 시위에서는‘기록자’로 참여하고 있다. 6월9일 송환법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그 역시 꾸준히 집회에 나선다. “우리는 현재의 자유가 아니라 미래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싸우고 있어요. 이번에 진다면 온 세대가 다 질 수밖에 없어요. 홍콩의 핵심 가치인 ‘자유’ 역시 잃어버리는 거예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던 6월12일, 멜로디 씨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서 휴대전화로 생중계를 시작했다. 눈앞의 장면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8월이 넘어가며 시위 진압은 더욱 강경해졌다. 아파트가 밀집한 곳에서도 아랑곳없이 최루탄이 터졌다. 생중계를 이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생중계 중 회사 선배에게 전화가 왔는데 무조건 ‘괜찮다’고 했어요. 안 괜찮다고 대답하면 더 이상 현장에 나올 수 없을까 봐서요.”

외동딸인 멜로디 씨의 생중계를 지켜보는 부모는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딸이 사회에 관심이 많아요. 이번 운동을 기록할 수도 있고, 참여할 기회가 있어서 물론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건강이 상할까 봐 정말 걱정돼요.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공격, 셀 수 없이 터지는 최루탄…. 모두가 너무 충격적이에요.”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공격 충격적”

일가친척 모두가 같은 마음인 건 아니다. 멜로디 씨의 친척 중 몇 명은 경찰이다. 홍콩 내에서는 홍콩 자유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2014년 우산혁명의 상징색을 따 ‘노란파’라고 부르고, 친중파로 홍콩 경찰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파란파’로 부른다. 홍콩 사회가 크게 두 쪽 나 있는 셈이다. 그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경찰인 친척은 멜로디 씨 같은 젊은 세대가 ‘선동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려서 뭘 모른다고도 말했다. 멜로디 씨는 파란파가 주도하는 경찰 지지 집회를 취재하러 갔다가 물세례를 맞은 적도 있다.

“우리가 너무 어리대요. 정치적 올바름이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판단할 때 나이가 많으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나요? 경찰인 친척은 폭력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폭력을 행사하는 쪽은 어디인지 묻고 싶어요. 혹여 시위대의 폭력적인 행동이 문제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할 때 정치·사회 문제는 잘 이야기하지 않아요. 싸워도 결론이 안 나거든요.” 그는 자신의 SNS에서 친척들을 모두 차단했다.

지난 6월의 ‘송환법을 철폐하라’는 시위대의 구호는 8월 들어 “광복 홍콩, 시대 혁명(Free Hongkong, Revolution Now)” “조국을 해방하라” 등으로 바뀌었다. 브리트니 리 씨(가명·22)도 8월18일 센트럴 역 근처에서 구호를 함께 외쳤다. 6월12일 생애 처음 나갔던 시위는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다행히 최루탄을 맞지는 않았지만, 이후 어머니의 간섭이 늘어 다툼이 잦아졌다. “엄마도 송환법 자체에는 반대하는데, 중국 정부가 언제든 개입할 수 있어 위험하다면서 못 나가게 하거든요.” 브리트니 씨의 어머니는 중국 출신으로 결혼 후 홍콩에 왔다. 시위에 나가려는 딸에게 자주 톈안먼 사건을 언급했다. 선전에 장갑차와 무장경찰이 대규모로 집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어머니는 걱정이 더 많아졌다.

그에게 홍콩은 “겉에서 보면 화려하지만 속에는 너무 많은 문제로 곪아 있는 도시”다. 고층 빌딩이 밀집한 글로벌 금융의 중심지지만, 브리트니 씨 가족에게 허락된 공간은 11평 남짓한 투룸 아파트다. 이곳에서 자신과 엄마, 언니 2명이 함께 지낸다. 방이 두 개뿐이라 엄마와 방을 같이 썼는데, 2년 전부터는 거실 한쪽에 따로 침대를 두고 쓴다. 부모가 20년 전 공공주택을 분양받아 10년간 매달 1만 달러(약 154만원)를 내고 산 집이다.

ⓒ시사IN 이명익브리트니 리 씨(가명)가 홍콩은 화려하지만 내면이 병들어 있다는 의미를 담아 직접 그린 그림을 들어 보이고 있다.

미술을 좋아해서 중등학교 때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홍콩을 상징하는 고층 건물 아래 옷장 속에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그림 한 장을 보여줬다. 제목은 ‘홍콩의 랜드마크’라고 했다. “홍콩의 집들은 대부분 너무 작아서 감옥처럼 사람을 옥죄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방 창문 너머에는 성냥갑처럼 생긴 작은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홍콩은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다. 부동산 가격은 3.3㎡당 1억원을 넘어선다. 보통 홍콩 청년들은 취직을 해도 월세 부담 때문에 가족들과 같이 사는 경우가 많다. 홍콩의 최저임금은 37.5홍콩 달러(약 5700원) 수준. 대학생인 브리트니 씨는 현재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미술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는 한 달에 한화로 50만~60만원을 번다.

면적 1104㎢의 작은 도시에 사람들이 자꾸 들어오니 집값과 물가가 더 치솟았다. 이런 현상이 가속화된 데에는 1995년부터 시행된 ‘일방통행 허가제도(One-way Permits)’가 있다. 중국 정부는 하루에 중국인 150명이 홍콩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2017년에만 4만7000여 명이 이 제도를 통해 들어왔다. 본토 출신 중국인은 현재 홍콩 총인구의 10%(62만5000여 명)를 차지한다. 중국 정부가 시행한 정책이기 때문에 홍콩 정부가 유입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부담은 원주민에게 돌아갔다. 그가 사는 ‘샤틴’ 지역은 대형 쇼핑센터가 있어서 중국인 관광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 원래 있던 식료품점이 사라지고 여행객을 위한 약국과 상점으로 바뀌어갔다. 샤틴 지역의 8평 크기, 방 2개짜리 아파트 월세는 200만원이 넘는다. “우리가 가진 자원은 한정돼 있어요. 건강보험, 교육기회, 주거공간은 부족해지는데 우리가 막을 방법이 없잖아요.” 브리트니 씨는 열여덟 살 때 공공주택을 신청했지만 4년째 대기 상태다. 중국인이 1년 만에 분양받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중국 이주민에 대한 반감이 심해지자 캐리 람 행정장관은 2018년 9월 “중국 본토에서 오는 사람들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부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런 정부에 반대할 힘이 없다는 것이 제일 화가 나요.” 브리트니 씨가 한숨을 쉬었다.

얼굴을 드러내기까지 수십 번 생각했다. 중국 정부가 시위대를 안면인식 기술로 확인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홍콩 정부는 시민들을 보호하는 대신 시위대를 검거하는 데 앞장섰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홍콩의 현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만류로 집회에 자주 참여하지 못해 다른 방식으로 시위대를 돕고 싶었다. 6월 이후로는 시위대를 위한 헬멧이나 마스크 등을 사고, 체포된 학생들을 위해 법률 지원을 하는 단체에 기부하느라 거의 50만원을 썼다.

제이슨 펑 씨(22)는 1997년 6월29일에 태어났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이틀 전이었다. 원래 영국 식민지 시절에 출생한 사람은 특수 신분 여권인 BNO(British National Overseas·영국 해외 영토 여권)를 가질 수 있었다. 6개월 동안 무비자로 영국을 방문할 수 있고, 홍콩 내 영국 영사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제이슨의 부모는 BNO를 따로 신청하지 않았다. 제이슨 씨는 최근 들어 그게 아쉬웠다. 홍콩이 ‘중국화’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기 때문이다. “홍콩은 중국과 언어, 통화, 경제 시스템 전부 다 달라요. 이번 시위가 실패하면 송환법보다 더한 악법이 강행될 수도 있어요.” 송환법 저지가 실패로 끝난다면 다른 국가로 이민을 갈 작정이다. 그럴 때 BNO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송환법 저지 실패하면 이민 갈 것”

제이슨 씨는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회계 법인에 들어가기 위해 취업을 준비 중이다. 7월21일 위안랑 역에서 발생한 폭행 사건을 보고 충격이 컸다. ‘백색 테러’라 불린 이 사건에서 흰색 티셔츠를 입은 남성 100여 명이 쇠몽둥이와 각목으로 시민들을 공격했다(<시사IN> 제620호 ‘홍콩 백색 테러 배후는 누구인가’ 기사 참조). 최소 45명이 부상당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위안랑 역은 그가 학교를 가기 위해 매일 지나는 곳이다. “한동안 잠을 설쳤어요. 이런 비극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40분 동안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지 않은 데다 이들을 보고도 체포하지 않아 경찰과 폭력배들 사이 유착 의혹도 증폭됐다. 온라인 커뮤니티 ‘LIHKG’과 텔레그램으로 시위와 관련된 소식을 얻는다. 시위대가 경찰에 맞고 쓰러지는 영상과 사진을 보면서, 사회를 양쪽으로 쪼개놓고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정부에 화가 치밀었다. 1997년 반환 이후 중국이 홍콩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해마다 강해지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일국양제가 아니라) 일국일제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도 실패하면 중국의 홍콩이 될지도 몰라요.”

ⓒ시사IN 이명익취업 준비 중인 제이슨 펑 씨는 송환법 저지가 실패로 끝나면 다른 국가로 이민 갈 작정이다.

2003년 7월, 홍콩 정부가 국가보안법 제정을 추진한 바 있다. 당시 홍콩 시민 50만명이 거리에 나와 반정부 인사를 탄압하기 위한 법안이라고 반발해 법안 제정을 저지했다. 최근 홍콩 정부는 대입시험에서 광둥어(홍콩어)로 된 국어 시험을 축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홍콩이 광저우나 상하이처럼 중국의 부속 도시가 될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제이슨 씨가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중등학교 때 배운 일반교양 과정(liberal studies) 과목의 영향이 컸다. HKDSE(홍콩의 대학입학시험)의 과목 중 하나로 정치·사회문제를 다루는 논술·토론 수업이다. 민주주의, 인권, 표현의 자유 같은 이슈를 배웠다. 당시 이 수업에서 국민교육 과목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1200여 명의 선거인단이 행정장관을 뽑는 간선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뽑는 직선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2014년 우산혁명에도 참여했다. 제이슨 씨뿐만 아니라 브리트니 씨도 같은 말을 했다. 이 과목이 지금 시위대를 이끄는 ‘반환둥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제이슨 씨가 다녔던 대학교에도 ‘레논 벽’이 생겼다. 시위를 지지하는 메모가 붙은 벽이 홍콩 전역으로 번져가고 있다. 그는 ‘Free Hongkong, Revolution Now’라는 글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홍콩이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이 심한 사회라고 생각했는데, 함께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지난 8월9일 캐리 람 행정장관이 “소수의 사람들이 홍콩을 파괴하고 있지만, 그들은 홍콩 시민들이 일궈온 사회에 대해 어떤 몫도 없다”라며 시위대를 비난하는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났다. 제이슨 씨는 “전 시위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홍콩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 이곳에 남아 보금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장진영홍콩 경찰이 송환법 반대 시위 참가자를 현장에서 제압해 체포하고 있다.

안토니아 씨(22)는 2018년에만 한국을 여덟 번 방문했다. 한국 보이그룹 ‘소년24’의 팬이다. 송환법 반대 시위가 시작되고, 삶이 바뀌었다. 팬 사인회에 가려고 했는데 이번엔 못 갔다. 원래 정치나 사회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6월12일 애드미럴티 역에 나갔다. 직전 시위에서 100만명이 시위에 나왔지만 행정장관이 법 집행을 강행한다고 밝혔다. 그날 안토니아 씨 바로 앞에 서 있던 시위 참가자에게 최루탄이 날아왔다. 그때는 헬멧과 천 마스크밖에 없었다. 살갗을 바늘 수백 개가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온종일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날 이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많은 시위 참가자들이 다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6월12일 이후 매주 주말 시위에 참여했다. 이 사실을 알고 안토니아 씨의 어머니는 영국으로 딸을 유학 보내려 했다. “다 같이 홍콩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안 갔어요.” 이후 최루가스를 수없이 마셨다. 지금은 그때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8월5일부터 응급조치팀으로 위치를 바꿨다. 그동안 맨 앞에서 싸우면서 경찰이 쏜 최루탄으로 시민들과 시위대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 걸스카우트 시절 딴 응급처치 면허증이 있었다.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으로 시위대들을 먼저 돕고 싶었어요.” 시위 현장에는 노란색 조끼를 입은 응급조치팀이 돌아다녔다.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안토니아 씨는 빨간색 테이프로 헬멧과 조끼에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붙였다. 하루에 생리식염수 5㎖짜리 앰플 10개, 1000㎖짜리 2통, 아세트산염 10㎖짜리 20개를 챙겨서 시위 현장으로 간다. 다 쓰고 오는 날도 있다.

ⓒ시사IN 이명익응급처치 면허증이 있는 안토니아 씨는 시위가 있을 때마다 생리식염수와 아세트산염을 들고 나와 부상자를 치료한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대학에서 건설공학을 전공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 졸업을 하기 위해 건설 현장에서 3개월째 인턴십을 하고 있다. 좋은 점이 있다면 경찰의 의심을 받지 않고 기어를 많이 사올 수 있다는 것. 새로 산 기어들은 시위대에게 모두 무료로 나눠줬다. 매달 인턴십으로 버는 돈 1만 홍콩 달러(약 154만원)는 시위 장비를 사는 데 쓴다. 안토니아 씨는 “우리에게 다른 선택권이 없어요.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중국 정부에 의해 완전히 통제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연일 이어지는 홍콩 내 시위를 사실상 ‘테러’로 규정하고 있다. 8월12일 중국 국무원 산하 홍콩·마카오 사무판공실의 양광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열어 “홍콩 시위대의 행동은 테러리즘의 신호를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중앙인민정부 홍콩 주재 연락판공실(중련판) 역시 성명을 통해 “이런 테러 행위를 용납한다면 홍콩은 바닥없는 심연으로 추락할 것이다”라고 비판 수위를 높였다.

ⓒ시사IN 이명익2014년 10월1일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대가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어 불을 밝히고 있다.
ⓒ시사IN 이명익홍콩의 비좁은 주거 환경을 보여주는 익청빌딩 모습.

이에 아랑곳없이 8월18일 다시 170만명 인파가 거리로 쏟아졌다. 애초에 경찰이 행진을 불허했지만, 지하철 5개 역이 마비될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다. 중국 군대와 무장 경찰의 투입이 거론되며 긴장이 고조됐으나 시위는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 밤 11시가 넘도록 시위대가 애드미럴티 경찰서 건물을 향해 레이저 포인터 불빛을 쏘았다. 온종일 폭우가 내려 에디 씨의 신발이 푹 젖었다. 11주 연속 주말 집회를 다니느라 몹시 피곤했다. 다행히 충돌이 없는 밤이었다.

일국양제가 유지되는 기한은 2047년이다. 반환둥이가 50세 되는 해이기도 하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저희도 정말 모르겠어요. 다만 확실한 건 이번에도 실패하면 우리가 알던 홍콩을 잃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지하철을 타고도 에디 씨는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시사IN 이명익지난 8월18일 시위대가 홍콩 정부청사를 향해 레이저 포인터를 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8월17일 홍콩 경찰이 빈백건을 들고 나와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있다.
ⓒ시사IN 이명익한 홍콩 시민이 경찰이 쏜 빈백건에 맞아 실명 위기에 처한 소녀의 그림을 들고 있다.
ⓒ시사IN 이명익호이삼 공원을 떠나 시내 방향으로 행진하는 시위대.
ⓒ시사IN 이명익8월17일 저녁 시위대가 쏘는 레이저 포인터가 시위 진압 경찰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시사IN 이명익방독면과 마스크로 ‘무장’한 젊은 시위자들.
ⓒ시사IN 이명익홍콩 전역으로 번지고 있는 ‘레논벽’ 모습.
ⓒ시사IN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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