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는 ‘50년 묵은 화약고’다. 북한이 선제공격을 유도해 이 지역을 국제 분쟁 지역으로 끌고 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사진은 2002년 2차 서해교전 당시 화염에 휩싸인 우리 고속정.
서해가 결국 ‘한반도의 사라예보’가 될 것인가. 남북 간 긴장이 높아지면서 국내외 시선이 온통 서해로 쏠렸다. 만일 충돌이 발생한다면,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북한 주장 해상 군사분계선’ 사이 해역(지도 참조)에서 첫 총성이 들릴 것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관측이다. 이곳은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서해교전이 일어났던 한반도 최대의 화약고다.

북한은 왜 무력충돌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일까. 전문가들은 “이명박 정부와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접은 북한이, 이제 실력행사를 통해 우리 정부의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한 남북 관계 전문가는 “1997년 이후 외환 위기 때는 평화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남한의 경제 위기 극복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북한의 기본 인식이고, 실제로 그랬던 측면이 있다. 그때에 비견되는 경제 위기를 맞은 남한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 없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는 것이다”라고 북한의 의도를 분석했다.

안 그래도 경제 위기에 직면한 한국 정부가, 국가신인도 하락·외국자본 이탈과 같은 ‘긴장 비용’까지 추가로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게 북한의 셈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서해일까.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사실상 서해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민화협 상임의장)은 “국제무대에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철저한 계산 끝에 내놓는 곳이 북한이다. 무턱대고 도발하는 게 아니라, 남한에는 심리적 공황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미국은 개입하기 껄끄러운 ‘균형점’을 찾으려 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북한의 선택지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분쟁 지역 만드는 게 목표?

남한에 타격을 주면서도 미국이 적대적으로 돌아설 명분을 주지 않는 수준이 북한에게는 ‘도발의 한계선’이다. 한 국방 전문가는 “비무장지대(DMZ)에서 충돌했다가 자칫 확전이라도 되는 날에는 주한미군이 출동해버린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지상 목표인 북한이 그런 주객전도된 도발을 하겠나”라며 육상 충돌 가능성을 일축했다.

서해는 다르다. 남한에서 ‘사실상의 영해선’이라고 주장하는 NLL의 국제적 지위가 그리 탄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NLL은 한국전쟁 휴전 직후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이승만 정부의 북진 의지를 주저앉히기 위해 그어놓은 전술적인 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NLL 남단에서 벌어진 두 차례 서해교전 당시에도 미국은 국무부 논평에서 ‘한국 영해’라는 표현 대신 ‘공해’ 또는 ‘국제 수역’이라는 표현을 썼다. 북한 처지에서는, 미국에 개입의 명분을 주지 않으면서 남한을 흔드는 ‘카드’로 서해만 한 곳이 없다는 결론이다.

무력 충돌이 있다면 어떤 수준일까. 정세현 전 장관은 “우발적 충돌과 전면전 사이, 남한은 흔들리고 미국은 개입하기 껄끄러운 선이 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역시 ‘균형점’을 찾으려 할 것이란 얘기다. 전면전으로 번지는 것은 경계하되, 두 차례 서해교전보다는 한층 강도 높은 충돌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하나의 시나리오가 북한 전문가 사이에서 회자된다. NLL 남단과 북한 주장 해상경계선 사이의 ‘화약고 해역’에서 북한이 해상 군사훈련을 감행한다는 것. “NLL 사수, 도발에는 엄정대처”를 외쳐온 군과 이명박 정부는 이 군사훈련을 공격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국제 기준으로 보면 남한이 분쟁 지역에서 선제 공격을 한 셈이 되어버린다는 시나리오다. 실제로 남북경협 현장을 누비며 북한 정보에 밝은 것으로 정평이 난 조봉현 박사(북한경제 전공)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NLL 남단에서의 군사훈련을 통해 서해를 국제분쟁 지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라고 북한 내 분위기를 전했다(48~51쪽 기사 참조).

한국외대 이장희 교수(국제법)는 “일단 국제분쟁으로 끌고 가면 우리가 불리하다”라고 말했다. 위의 시나리오가 현실성이 있다는 뜻이다. “NLL은 역사적 근거도 취약하고 국제법상 북한의 12해리 영해권을 침해한다. 남북한 간 합의는 특별법이므로 일반법인 국제법에 우선하지만, 북한이 모든 남북 합의 무효화를 선언한 이상 국제법대로 따질 도리밖에 없다. 참여정부에서 상당한 진척을 이뤘던 서해 경계선 협상이 이번 정부 들어 백지화된 건 그래서 우리에게 큰 손해다.” 실제로 북한은 2006년 남한에 제의했던 ‘전향적인’ 경계선 제안을 포함한 모든 논의를 백지화하고, 1999년 내놓은 기존 안으로 돌아갔다.

상황을 더욱 긴박하게 만드는 것은 남북 모두 군이 강경일변도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결코 대남 온건파라고 할 수 없는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 통전부(통일전선부) 사람들조차 군부가 너무 강경하다고 걱정하더라”라고 북한 쪽 분위기를 전했다.
우리 군 역시 격앙되긴 마찬가지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비상 상황에 대비해 현장에 지휘권을 일임하겠다”라고 말했는데, 남북 문제에 밝은 한 군사 전문가는 이를 두고 “‘이번엔 우리 차례’라고 벼르는 군 현장 정서를 고려하면, 이건 사실상의 확전 선언이다. 한 대 맞으면 열 대 때리겠다는 얘기다”라고 평했다.

“까딱 잘못하면 ‘제2의 이스라엘’ 된다”

북한이 ‘뻥카를 치고 있다’고 보는 한나라당마저 군과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을 썩 미덥지 않게 여기는 눈치다. 한나라당의 한 수도권 의원은 북한이 도발을 선택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만일 충돌이 일어났을 때 전권을 쥔 현장 지휘관이 압도적인 화력을 북한 영토에까지 고스란히 쏟아 부어버리면 문제가 커진다.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제2의 이스라엘’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사망했을 때, 청와대가 상황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3시간 걸렸다. 현대전에서 3시간이면 전쟁이 끝나고도 남는 시간이다”라며 청와대의 취약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염려했다.

전형적인 ‘치킨 게임’ 양상이다. 서로 믿는 구석도 있다. 북한은 남한의 경제 위기와 취약한 리더십을 겨냥하고, 남한은 북한의 식량 위기와 김정일 체제의 위기(건강 악화와 후계자 선정 문제)를 내심 기다린다. 그러니만큼 상대가 태도를 바꿀 때까지 속도를 늦출 수 없다는 의지가 남북 모두에서 읽힌다. “상호 위협을 감소시키는 것이 안보를 위한 첫 행동 수칙인데, 그런 기본은 소홀히 하면서 안보 질서가 깨진 후의 액션만 준비한다. 부적절하다.” 참여정부 시절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민주당 송민순 의원의 지적이지만, 앞으로도 당분간은 공허한 메아리로만 돌아올 것 같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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