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사립 고등학교 재벌 2세 왕자님들의 돈 놀음은 글쎄, 재벌을 곁에 둔 적이 없어서 가타부타 말은 접어두겠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 서민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금잔디(구혜선·사진 왼쪽) 캐릭터만은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우리 모두 가난함, 혹은 서민의 삶에 대해서는 한자락씩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재벌 총수나 대통령도 가난했던 시절을 즐겨 입에 올리는 판이니까.

금잔디의 부모는 딸의 결혼을 밑천 삼아 팔자를 펴보겠다는 야심으로 잔디의 사립학교 뒷바라지를 마다 않는다. 뭐 생경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나 딸이 재벌 후계자 구준표(이민호)와 헤어지는 것을 전제로 준표의 어머니가 3억원을 제의하자 소금 세례를 퍼붓고는 ‘결혼하면 그룹이 다 우리 건데 그까짓 3억원이 대수냐’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이 서민, 비위가 상한다. 서민을 그리자고 주머니 외에 자존심과 염치까지 탈탈 털어가는 것은 너무했다.

그리고 부모보다 더 너무하게 그려지는 게 금잔디다. 속물 부모,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동급생들에게 당하는 ‘왕따’, 자기를 괴롭히던 그 남자아이의 고백 따위는 여고생의 씁쓸하고도 달콤한 상상 안에서 부풀려지고 자기중심적으로 윤색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꽃보다 남자〉의 미련한 제작진은 소녀의 판타지와 리얼리티 사이의 감을 잡지 못하고 금잔디에게 도가 지나친 왕따·폭력·납치 등을 벌여놓는다. 잡초 같은 생명력을 지녔다는 밝고 건강한 여고생 금잔디도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웃어도 울어도 사랑해도 이 괴물 같은 학교와 괴물들이 받들어 모시는 F4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한, 현실 인식 제로의 맹추 같은 계집애가 되어버릴 뿐이다.

더 심한 것은 수모와 모욕의 근원지인 F4의 돈으로 놀러 다니는 통에 잔디는 원작 만화의 생활력 강한 쓰쿠시와는 점점 멀어져 바보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마카오에 가는 표를 구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하는 죽집 사장에게 ‘200만원’을 가불해달라고 요청하는 잔디는 서민의 딸도 보통 여고생도 아니다(다행히 거절당하지만). ‘상상 그 이상의 하이 판타지 로망스’를 표방하는 〈꽃보다 남자〉는 이 땅의 여고생과 서민은 물론이고 ‘판타지’라는 단어에도 대단한 폐를 끼치고 있다.

기자명 유선주(자유 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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