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의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온 세계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질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에 따라 이 위기 상황에 대한 반응이 저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흥미롭다. 사실, 비상사태에서 사물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니까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에서야말로 한 국가나 사회의 지적·정신적·도덕적 역량이 숨김없이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경제 발전 방식에서 여러모로 한국의 모델이 되어온 일본 사회의 최근 동향이다. 이미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졌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근본적 각도에서 묻는 저술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난 수십년간 거의 무시돼온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그 해설서들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고, 80년 전에 쓰인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소설 〈해공선(蟹工船)〉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당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지금의 일본에서 유일하게 공산당이 약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작년 한 해 동안 공산당에 가입한 시민이 1만5000명을 넘고, 그것도 대부분 20, 30대 청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당세의 신장은 일본 공산당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밑에서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적 격차와 대중의 궁핍화 현상을 가장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가의 ‘전향’

일반 시민의 이러한 반응 외에 지식인들의 자세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 한국인에게 특히 놀라운 것은 보수 우파 지식인들에 의한 신자유주의 혹은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 야만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들이다. 극우파 신문 지면에서도 “끊임없는 탐욕과 이윤 추구가 계속된 결과 사회 자체가 심각한 불안정성에 빠진” 현상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교토 대학에서 사회사상을 가르치는 보수파 지식인 사에키 케이시(佐伯啓思)는 산케이 신문 칼럼(2008. 7. 31)에서 〈자본론〉 판매 증가 현상의 의미를 진단하면서 “마르크스의 망령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오늘의 경제가 마르크스가 말한 것과 같은 착취 경제 양상을 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전직 국가공무원으로 현재 일본에서 가장 활발한 언술 활동을 하는 사토 마사루(佐藤優)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보수 우파라고 공공연히 천명하면서도, 일본 사회가 “점점 격차 사회의 지옥으로” 빠져든다고 우려하면서, 이 상황이 계속되면 파시즘이나 쿠데타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최신 저술들에서 되풀이해 경고한다. 그에 따르면 지금 시급한 과제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의 채택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경우는 나가타니 이와오(中谷巖)라는 하버드 대학 출신 경제학자의 ‘전향’일 것이다. 그는 역대 자민당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핵심 자문역을 맡았던 이론가다. 그런 그가 지난 연말 출간된 〈자본주의는 왜 자멸했는가〉라는 책에서 “신자유주의 사상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인간 사이의 유대를 해체하는 위험 사상”임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반성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몇몇 예외적인 지식인들의 경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현상은 현재 일본 지식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지표임에 분명하다.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일본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폐색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일부나마 보수 우파 지식인들의 이러한 자기 성찰적 자세는 언젠가 건강한 공동체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희망적인 신호가 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보수 권력은 이미 자멸의 논리로 판명된 신자유주의 논리에 여전히 집착한다. 아니, 민영화·규제 철폐·부유층 감세를 골자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더욱 확대·강화하기 위해 광분한다. 명백히 시대착오적인 이 우행(愚行)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 어리석음의 필연적인 결과는 공멸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실효를 잃은 상투적인 논리로 파국을 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광기이거나 망상일 뿐이다. 다가오는 파국을 막기 위해서 가장 긴급한 것은 사회적 양심과 이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겸손한 자세다. 삶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저항하다 불에 타죽은 원혼들을 위로하기는커녕 되레 그들의 ‘폭력성’을 비난하는 뒤틀린 인간성으로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기자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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