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왕의 편지’ 대한민국을 달구다
  • 이오성 기자
  • 호수 75
  • 승인 2009.02.1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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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어찰 공개 후폭풍이 거세다. ‘편지 정치’로 국정을 운영한 정조의 새로운 면모에 우리 사회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편에서는 정조 독살설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시사IN 윤무영
2월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 어찰 299통을 새로 발굴해 공개했다.
박종원 감독 영화 <영원한 제국>(1995)에서 심환지(1730~1802)를 연기한 배우는 최종원이었다. 심환지는 노론 벽파의 거두로 정조(1752~1800)와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다. 최종원은 특유의 허스키 음색을 앞세워 노회한 정치인 심환지를 음흉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표현해냈다. 100만 부 넘게 팔린 이인화의 동명 소설에 등장한 심환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2007년 인기를 끈 드라마 <이산>에서 정조와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정태우(이재용 분) 역시 심환지를 모델로 창조한 가상 인물이다. 이처럼 영화·드라마 속 심환지는 ‘개혁 군주’로 칭송받은 정조를 시종일관 견제하며 발목을 잡은 인물로 묘사된다. 특히 <영원한 제국>은 당시 궁중을 장악한 노론 벽파가 정조를 죽였다는 ‘정조 독살설’을 전면에 드러내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를 읽다 보면 둘 관계가 무척 껄끄러웠을 것이라는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소식이 갑자기 끊겼는데 경은 그동안 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어디로 갔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 그러했던 것인가? 나는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1797년 1월17일)

‘하루가 1년처럼 길어 그리운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마침 보내준 편지를 받으니 직접 얼굴을 보는 듯하다.’(1798년 3월17일)

다시 불붙은 정조 독살설 논란

사랑하는 이와 주고받은 연서처럼 보이는 이 편지는 2월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새로 발굴한 정조 어찰(왕의 편지) 299통 중 일부다. 1796년 8월부터 1800년 6월 사이에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이 편지는 심환지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다 이번에 공개되었다. 왕이 실력자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사라지지 않고 대량으로 발굴됐다는 점 그리고 그 내용의 의외성 때문에 연일 학계와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새로운 국면을 맞은 건 ‘정조 독살설’의 진위다. 정조는 노론의 사주를 받은 할아버지 영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즉위 직후부터 노론과 상당한 갈등을 빚은 정조가 끝내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자 정약용 등 노론 반대파 측에서 정조 독살설을 제기했다.

상당수 학자와 언론은 이번 어찰 공개를 계기로 ‘정조 독살설’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조와 노론 벽파 거두 심환지가 하루에도 여러 통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치와 인사 문제를 의논하는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특히 1800년 들어 정조는 지병으로 고생하던 중 심환지에게 자기 병세를 상세히 털어놓는다. 사망하기 13일 전인 6월15일에는 ‘앉는 자리 옆에 항상 약 바구니를 두고 달여 먹는다.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렸기에 체모(體貌)를 높이고자 어쩔 수 없이 탕제를 내오라는 탑교(榻敎)를 써주었다’라며 병세의 위중함을 알린다. 김문식 교수(단국대·사학과)는 “서찰 공개로 ‘독살설’이 잘못됐다고 결정적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심환지가 음모에 관여했다는 의혹은 벗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어찰 내용만으로는 독살설을 뒤집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씨는 “사도세자 문제로 정조와 노론 벽파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사이였다. 심환지와의 각별한 관계는 통치를 위한 방편으로 봐야지, 독살설을 뒤집는 증거로 삼는 건 말도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70쪽 인터뷰 참조).

해석 여지가 분분한 독살설을 논외로 치더라도 이번 어찰 발굴이 갖는 역사·문화 가치는 무척 크다. 봉건 군주제 시대에 왕이 이른바 ‘편지 정치’를 통해 어떻게 통치 철학을 밀고 나갔는지, 정조는 과연 어떤 인간이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알려진 ‘인간 정조’는 인자한 성군(聖君)의 이미지가 짙었다. 하지만 이번 편지에서 드러난 정조는 무척 다혈질이다. 정조를 가까이에서 보필한 신하 서영보에 대해 ‘호로자식(胡種子)’이라고 했는가 하면, 스스로 기용한 젊은 문신 김매순이 자기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자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 감히 선배들의 의논에 대해서 주둥아리를 놀리고자 한다’라며 화를 냈다.

주도면밀한 인사 관리와 여론 통제

가장 인상적인 건 ‘노회한’ 정치가의 풍모다. 정조는 심환지와 비밀 편지를 교환하며 주요 신료의 동향을 파악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반대파인 노론 벽파 인물을 관리했다. 특히 ‘인사’ 문제와 관련해서는 주도면밀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예컨대 심환지가 주도한 조정 인사를 칭찬하면서도 “남인들은 초사(初仕:첫 벼슬)를 얻지 못한 것을 자못 불만스러워한다는데 차후에 김성일의 자손을 거두어 써서 크나큰 비난을 막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권하기도 한다(그림 참조). 지금으로 치자면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내각 구성을 협의하는 셈이다.    

정조는 일종의 ‘언론 통제’까지 시도했다. 심환지로 하여금 자기가 원치 않는 상소를 올리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등 여론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윤함이라는 자가 또 상소한다고 하는데, 어찌 이렇게 함부로 올리는 일이 있단 말인가. 소견이 좁은 자이다. 만류할 수 있다면 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이노춘이 상소한다는 소문도 정말인가. 그에게도 굳이 잘못을 본받지 않도록 하라.’(1799년 2월3일)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 등 주위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알려진 건 그리 많지 않다. 편지가 남아 있다 해도 출가한 공주나 친척의 안부를 묻는 정도다. 정조 어찰처럼 당대 정치 현안이 직접 드러난 내용은 거의 없다. 이번 편지가 호사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발굴된 정조 어찰 299편에 대한 연구 결과를 3월 중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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