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왜 러시아인 이름 딴 기자실을 싫어하는가
  • 브뤼셀·신호철 기자
  • 호수 75
  • 승인 2009.02.1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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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 브리핑실의 공식 이름은 ‘안나 폴리콥스카야 룸’이다. 안나 폴리콥스카야는 체첸 전쟁을 취재하며 러시아 정부를 비판하고, 푸틴의 심기를 건드리다가 2006년 피살되었다.
   
ⓒReuters=Newsis
안나 폴리콥스카야
지난 1월 내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가스 공급 문제로 한바탕 외교전을 치렀다. 유럽연합(EU)이 중재에 나서 1월8일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알렉세이 밀러 부회장과 우크라이나 국영 가스회사 올레 두비나 대표가 브뤼셀에 왔다. 예정대로라면 두 나라 대표는 협상을 마친 뒤 브뤼셀에서 기자회견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자회견 시각을 몇 분 앞두고 갑자기 일정이 취소됐다는 공지가 떴다.

공동 기자회견이 취소된 이유는, 러시아 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공식 이유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주간지 <타임>의 브뤼셀 특파원 레오 센드로비치는 기사에 힌트를 한 줄 넣었다. “공동 기자회견이 취소된 것은 회견 장소가 유럽의회 브리핑실로 정해진 직후였다.” 이곳 기자들은 러시아가 공동 기자회견을 꺼린 이유가 유럽의회 브리핑실의 공식 이름이 ‘안나 폴리콥스카야 룸’이라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동안 러시아는 명시적으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이 브리핑실 출입을 보이콧해왔다. 안나 폴리콥스카야는 2006년 괴한의 총에 피살된 러시아 기자 이름이다.

안나 폴리콥스카야 기자는 체첸 전쟁을 현장에서 취재하며 러시아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자주 썼다. 러시아 군은 그녀의 기사에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했다. 그녀는 <푸틴의 러시아>라는 책을 펴내 푸틴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녀는 체첸 전장에서 몇 차례 러시아 군에 체포되었으며 베슬란 학교 인질 사건을 취재할 때는 수상한 독극물에 중독된 적도 있었다. 그녀의 적은 크렘린, 러시아 군, 체첸 지방정부, 러시아 정보국(FSB) 등 다양했다.

   
ⓒ시사IN 신호철
국제기자협회와 유럽의회는 2008년 6월4일 의회 브리핑실 이름을 ‘안나 폴리콥스카야 룸’으로 붙이는 데 합의했다.

러시아 군의 고문 실체 폭로 직전 살해돼

2006년 10월7일 안나 폴리콥스카야는 모스크바의 자택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가슴과 머리에 총상이 있었다. 그녀가 러시아 군의 고문 실태를 폭로하는 기사를 송고하기 며칠 전이었다. 청부 살인이 명백해 보였지만, 당국은 배후를 밝히는 데 소홀했다.

그녀가 죽은 뒤 유럽의 기자와 지식인은 성명을 발표하며 여러 방법으로 항의했다. 유럽연합 출입기자단 격인 국제기자협회(API)와 유럽 의회 의원들은 2008년 6월4일 의회 브리핑실 이름을 ‘안나 폴리콥스카야 룸’으로 붙이는 데 합의했다. “언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기자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후 유럽의회의 모든 공식 문서에 안나 폴리콥스카야의 이름이 올랐다. 이를테면 “오늘 본회의 브리핑은 4시에 안나 폴리콥스카야 룸에서 열립니다”라는 식이다. 브리핑룸 출입구에는 안나 폴리콥스카야라는 이름이 당당하게 박혀 있다. 처음 본 사람은 이름이 너무 길고 어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걸 불평하는 기자는 아무도 없다. 기자는 이 방에서 열리는 브리핑에 참가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다.

러시아 언론 상황은 아직도 엄혹하다. 지난 1월19일 러시아 인권 변호사가 암살됐는데, 그를 만나던 아나스타샤 바부로바 기자도 같이 피살됐다. 그녀는 안나 폴리콥스카야가 일했던 ‘노바야 가제타’ 소속 프리랜서 기자였다. 푸틴 집권 이래 러시아 기자 21명이 암살됐다. 브뤼셀 기자들이 유럽의회 기자실 이름을 바꾼 것은, 기자를 옥죄는 권력에 대항하는 나름의 저항 방식이다.

우리도 여의도 국회 기자실 이름을 ‘동아투위실’로 바꿔보면 어떨까. 발음이 어색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안나 폴리콥스카야 룸’보다는 짧다. 아니, 시국을 보니 굳이 ‘동아투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어 보인다(근데 다수당 의석을 가진 쪽에서 허락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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