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선
미리 말해두지만 이 글은 언론계의 하이에나들, 뻔뻔하고 무능한 관료들, 착취 불감증에 도덕적 무감각이 신체화한 일부 자본가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난하지만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의 권리와 미래를 위해서 헌신하며 운동하는 친구들을 향한 말 걸기다. 

민주노총이 도마에 올랐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가만두면 자기 분열할 게 뻔한 현 정권과 그를 따르는 언론에겐 호재를 넘어서 횡재다. ‘돈’ 말고는 세상의 어떤 가치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들에게 애초부터 도덕성은 기대할 게 못 된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그리고 어떤 ‘조직’에겐 ‘도덕성’이 존재의 이유이자 근거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누군가는 역사를 날조하고, 교육을 차별화하고, 사회 기간산업을 팔아먹고, 제 나라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제 잇속만 차리지만, 어떤 사람들, 또 어떤 조직은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 세상이 다 요지경 한통속으로 돌아가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깜깜해도, 냉정하게 깨어서 침착하고 집요하게 그것과 싸워야 한다. 당장의 이익이나 조직의 보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올바르고 정당하기 때문이다. 

세칭 ‘민주노총 성폭력 사태’는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충격적이다. 조직의 존재 근거인 ‘도덕성’이 실종되었다는 것. 그리고 조직의 보신 논리에 갇혀 운동 철학이 사라져버렸다는 것.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전태일에서 시작해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도 꺾이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전노협이라는 노동자 조직을 만들었고, 각 부문별 노조의 연합체인 민주노총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운동이 멈춰버렸다. 아직도 갈 길은 멀기만 한데.     

대체 사람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조직’이란 뭘까. 조직은 조직원을 위해 조직원의 편에서 조직원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니던가. 현 정권에게 견강부회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말자. 지금의 정권은 길어야 4년이지만, 삶을 끊임없이 더 나은 것으로 바꾸기 위한 운동과 성찰에는 임기도 없고, 시효도 없다. 소비에트가 관료주의로 말미암아 무너졌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자기를 들여다보지 못한 민주노총

난 나 그림
변화하지 않는 운동,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운동은 이미 운동이 아니며, 자기를 유지·보존하는 데만 주력하는 조직은 진보와는 상관없다. 세상보다 한발 앞서 출구를 열지 못한 채 익숙한 사업, 익숙한 방식으로만 지탱하는 운동은 반쪽짜리다. 우리는 이미 지난 촛불 정국 속에서 이전과는 달라진 운동 방식, 대중의 욕망과 흐름, 건강한 우발성의 사건들을 경험했다. 새로운 내용을 생산하지도, 그 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했던 민주노총은 그 순간 심각하게 자기를 들여다보았어야 했다.

어쩌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직’이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지도 모른다. 모든 활동이 중앙으로 집중되고 위계와 서열에 의해 작동되는 조직은, 그것이 아무리 선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 해도 근대적 관료주의 시스템과 동형적 구조를 지니는 한 언제라도 타락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이익집단이 아니라 여전히 운동하는 조직이고자 한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근본적인 결단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가의 윤리를, 새로운 운동의 방향과 가치를 창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자명 권용선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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